2013년 5월 30일 목요일

입법자의 도덕과 수범자의 도덕



많은 사람들은
형벌법규의 입법과정에서
자신의 도덕관이나 윤리관, 혹은 철학이
관철되도록 하기 위해
입법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어합니다.

사실은 저도 그렇습니다.
똘레랑스사상에 입각한 저의 자유주의철학을
입법과정에 되도록 많이 관철시키고 싶긴 합니다.

그런데, 그리하여 자신의 도덕관이
입법과정에서 관철되어 형벌법규로 만들어진다면,
자신의 도덕관이나 윤리관, 철학이 승리한양,
자신의 도덕관이나 윤리관, 철학이 남의 것보다 더 우월한양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나 봅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어떤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마치 형벌법규를 잘 이용하면..
또는 형법법규가
남의 도덕관이나 윤리관, 철학을
침해하거나 지배할 수 있지도 아니한가 하는...

이러한 착각은
형벌법규가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큰 힘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반증이기도 하고,

그러한 착각들이 모여서
형벌법규가 이 사회 도덕의
가장 큰 기준으로 이용되는것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형벌법규는 오직 깡패같은 국가권력을 등에 업고 있는 탓에
일종의 강제력을 지니고 있을 뿐
개인의 도덕관이나 윤리관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고
개인의 도덕관이나 윤리관을
바꿀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형벌법규는 그 강제력을 빼면
이 사회에서 가장 약한
종이호랑이 규범에 불과합니다.

형벌법규가
도덕보다 약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법철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합니다.

물론, 형벌법규가 지닌 강제력 때문에..
형벌법규가 도덕보다 약하다는 게
실제로 가슴에 와닿기는 쉽지 않지만 말이죠.

강제력을 곧 강함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마도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우리들의 비열한 모습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형벌법규가
자신의 윤리관을 침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어떠한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고
어떠한 형벌을 과할 것인가에 관하여는
원칙적으로 입법자의
광범위한 형성권이 인정된다는 것이
우리 헌법재판소의 입장입니다.

이러한 헌재의 입장에 따르자면,
따라서 반드시 부도덕한 일만
금지되라는 법도 없고
반드시 남의 권리를 침해한 일이나
해악을 많이 끼치는 일만
금지되라는 법도 없게 됩니다.

(물론 형벌법규가
도덕에 관한 일을 다루는 것은
되도록 지양해야 하는 일이고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긴 합니다만..)

헌법재판소의 의견을 따르자면,
특히, 음란물과 같은 것의 유포 등은
그것이 개인의 사생활로서 보호를 받는다고 볼 이유도 없어서,
이러한 형벌법규에 대한 입법자의 형성권이
사생활의 수준으로 제한될 이유도 없어 보입니다.

헌법재판소의 입장에 따르면,
형벌법규란
개인의 도덕가치관이나 윤리관과
전혀 무관한 것이어서,
설사 개인의 도덕가치관*윤리관과
형벌법규가 지향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도덕가치관이나 윤리관을
침해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설사 입법자가
자신의 도덕가치관에 비추어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판단하여
그것을 형벌이 금지하는 행위로 결정하였다고 하더라도,
입법자가 광범위한 입법형성권에 따라 제정한 형벌 법규의
여러 가지 제정 배경 중 하나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입법자가 자신의 도덕가치관을 수범자들로하여금
강요하였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수범자가 법을 지킨다는 것은
입법과정에 반영된
입법자의 도덕관에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법을 지킨다는 것은
단지,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주어진
의무 중 하나일 뿐입니다.




2013년 5월 26일 일요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과 검열금지의 원칙


우리 헌법에 비추어보면,
아쉽게도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기본권은
거의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그것은 “②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고 한,
헌법 제37조 제2항 때문입니다.

헌법 제37조 제2항에 따라,
국민의 대표자가 선출한 국회에서 만든 법률로만 정한다면,
웬만한 기본권은 거의다 제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헌법재판소의 위헌법률심판을 살펴봐도,
기본권의 제한이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인지
심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거의 보통입니다.

이런 척박한 기본권 환경에서
그나마 우리 헌법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조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헌법 제21조 제2항의 “검열금지조항”입니다.

물론, 언론출판의 자유도
헌법 제37조 제2항에 따라 법률로 제한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언론출판의 자유에는
다른 기본권과 달리 제한 사유도 더 폭넓습니다.
그것은 언론출판의 자유에 대해서만
따로 그 제한 사유를 정해놓은 헌법 제21조 제4항 때문입니다.

이렇게 법률로 언론출판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제한의 수단으로 “허가나 검열”을 사용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이
바로 헌법 제21조 제2항입니다.

우리 헌법재판소는 “위 제21조 제2항의 검열금지원칙이 적용되는 ‘검열’에 관하여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 사상이나 의견 등이 발표되기 이전에 예방적 조치로서
그 내용을 심사, 선별하여 발표를 사전에 억제하는,
즉 허가 받지 아니한 것의 발표를 금지하는 제도’라고 의미 규명한 바 있”습니다.
(93헌가13등, 94헌가6),

“여기서 말하는 검열은
그 명칭이나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실질적으로 위에서 밝힌 검열의 개념에 해당되는 모든 것을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이랩니다. (2005헌가14)

“언론의 내용에 대한 허용될 수 없는 사전적 제한이라는 점에서
위 조항 전단의 ‘허가’와 ‘검열’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할 것이며
위와 같은 요건에 해당되는 허가?검열은 헌법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전 검열은 법률로 정하는 것 역시 불가능합니다.
절대적으로 금지되는 것이죠.

이러한 검열금지원칙에 따라
“영상물등급위원회에 의한 비디오물 등급분류보류제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204헌가18)

“외국음반의 국내제작을 위하여 그 표현물을 영상물등급위원회에 제출토록 하여 당해 표현행위의 허용여부를 결정하도록 하던 음반·비디오물및게임물에관한법률 제35조 제1항도 위헌을 면치는 못했습니다. (2005헌가14).

심 지어 민간이 주도해 설립한 기구인 한국광고자율심의기구의 텔레비전 방송광고 사전심의 역시 위헌판정을 받았습니다. 행정기관인 방송위원회로부터 위탁을받아 사전심의를 담당하고 있고, 그 위탁받은 업무에 관하여 국가의 지휘·감독을 받고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2005헌마506)

다만, 비디오물 등급분류제는 위헌임을 면했는데, 표현물의 공개나 유통 그 자체의 당부를 결정하려는 절차가 아니라 공개나 유통을 전제로 하여 단지 청소년 보호를 목적으로 미리 등급을 부여하는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전검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2004헌바36)

물론 “검열금지의 원칙은 정신작품의 발표 이후에 비로소 취해지는 사후적인 사법적 규제를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법절차에 의한 영화상영의 금지조치(예컨대 명예훼손이나 저작권침해를 이유로 한 가처분 등)나 그 효과에 있어서는 실질적으로 동일한 형벌규정(음란, 명예훼손 등)의 위반으로 인한 압수는 헌법상의 검열금지의 원칙에 위반되지” 않습니다.


표현할 경우 처벌받는 행위가 존재한다는 건,
그 사회에서 금지된 표현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어짜피 금지된 표현이 존재하고,
금지된 표현에 대해 위축효과가 일어나고 있는 사회에서,
그것이 사전금지냐 사후처벌이냐
이걸 따지는 게 무엇이 중요하냐고
묻는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혹시 표현에 대한 사후처벌과 사전불허를 구분하고 있는
우리 헌법의 모습은..
결코 사소하지 않은
법의 “겸손함”을 내포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정책적으로 법으로 금지된 행위를
나중에 처벌할 수는 있되,
그것은 수범자의 도덕관, 윤리관과는 무방하고,
누군가의 생각이나 표현을 처음부터 막는 것은 법으로라도 불가능하다는 것.

그것은 우리 헌법이 표방하는 결코 작지 않은 철학이며 가치입니다.



또다리..

총기사용의 위험과 표현의 위험은 같지 않아서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측면도 있긴 합니다만,
저는 우리나라의 검열금지원칙을 바라볼 때마다,
미국의 총기보유권한이 생각이 납니다.
총기사용은 처벌되지만, 총기보유는 허락하는 원칙
아니, 사용이 금지될 총기의 보유는 왜 허락되는가라고 고민해보지는 않으셨나요?

법적처벌은법익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의 정책일 뿐..
개인의 윤리관이나, 도덕관과는 결코 무관합니다.
우리는 법규범을 너무 지나치게
자신의 윤리관과 도덕관에
개입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인의 권리를 전혀 보호해주지 않는 무법천지를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순 없지만,
우리 도덕관 윤리관에 개입하기에
법은 너무나 허술하고 너무나 불완전합니다.
그 사실은 법 스스로도 자인하는 바입니다.



의사의 태아 성별 고지. 혹시 아직도 금지되었다고 아시는 분 계셔?


산부인과의사가 태아의 성별에 대하여
임산부에게 고지하는 것을
금지하던 시절이 있었어..
성별을 이유로한 낙태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지.

성별을 이유로한 낙태가 남용되는 것은
이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그런 금지의 목적은 정당하다고 볼 수 있을 거야.

또, 임산부에게 태아의성별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성별을 이유로 한 낙태를 예방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수단도 적합하다고 할 수 있어.

성별을 이유로한 낙태의 남용을 방지하려는 법익은
임산부의 알권리 못지 않게 중요하기 때문에
법익의 균형성도 충족돼.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산부인과의사가 태아의 성별에 대하여
임산부에게 고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의료법 제19조의2 제2항에 대해
위헌을 확인했어.

2008년도 7월 31일의 일이야.

그래서 요즘은, 임신초기가 아닌 이상..
산부인과 병원에서도 태아의 성별을
임산부에게 알려줘.

도대체 헌법재판소가
이 제도가 불합리하다고 판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의사에게
태아의 성별에 대하여
임산부에게 고지하는 것을
임신기간 내내 금지하지 않더라도,
성별에 의한 낙태를 방지하는
침해가 더 적은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침해의 최소성 원칙에 어긋난다는 거지.

결정례를 한번 읽어볼까?

1) 임신 기간이 통상 40주라고 할 때,
낙태가 비교적 자유롭게 행해질 수 있는 시기가 있는 반면에,
낙태를 할 경우 태아는 물론,
산모의 생명이나 건강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하여
낙태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는 시기도 있다.
예컨대 모자보건법 제14조는
일정한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에는
낙태를 허용하고 있지만,
모자보건법시행령 제15조 제1항에 따르면,
이러한 예외적인 낙태도
임신한 날로부터 28주가 지나면
이를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다.
임신 후반기에 접어들면
대체로 낙태 그 자체가 위험성을 동반하게 되므로
태아와 산모를 보호하기 위해
이를 절대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낙태 그 자체의 위험성으로 인하여
낙태가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는 임신 후반기에는
태아에 대한 성별 고지를 예외적으로 허용하더라도
성별을 이유로 한 낙태가 행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한정하여
태아의 성별 고지를 허용하게 되면,
낙태의 위험은 없으면서도
의료인의 직업의 자유를 보장함은 물론,
태아의 부모가 태아에 대한 정보에 접근하는 것도
방해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낙태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는 시기에 있어서
태아의 성별 정보에 대한 고지의 허용은
이 사건 규정의 입법목적 달성에
특별한 지장을 주지는 않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별을 이유로 하는 낙태가
임신 기간의 전 기간에 걸쳐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 사건 규정이 낙태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는 시기에 이르러서도
태아에 대한 성별 정보를
태아의 부모에게 알려 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의료인과 태아의 부모에 대한 지나친 기본권 제한으로서
피해의 최소성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2) 한편, 우리 형법은 성별에 따른 낙태뿐만 아니라
모든 경우의 낙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낙태죄를 형사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낙태죄는 모자보건법에서 예외적으로 정한
일정 사유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낙태를 처벌하여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을
입법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이와는 별도로 이 사건 규정은
여러 가지 낙태 중에서
특히 성별을 이유로 한 낙태를 근절시킨다는 명목 하에
태아의 성별 고지를 금지하고 있다.
형법상 낙태죄만 가지고는
성별을 이유로 한 낙태를 방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고,
이 사건 태아의 성별고지금지 제도를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산아제한이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되던 시절에 만연했던
성별을 이유로 한 낙태가,
저출산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어
출산장려 정책이 실시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만연할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으로
낙태를 형사처벌하는 외에
태아의 성별 고지를 금지하는 것은
필요 최소한의 정도를 넘어선
과잉규제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2005년 9월 보건복지가족부가 발표한
전국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 해 낙태시술 추정 건수 약 34만 2000여건 중
42% 정도에 해당하는 14만 3000여건이
미혼여성의 낙태로 나타났고,
나머지 기혼여성의 낙태도 76% 정도는
자녀를 원치 않거나(단산)
터울 조절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태아의 성별을 이유로 이루어진 낙태는
겨우 1.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는바,
위 실태조사는 실제 대부분의 낙태가
성별을 이유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성별에 대한 고지가
곧 성별의 인위적 선택 및 성별을 이유로 하는
낙태의 사전 준비행위라고 전제하고
성별고지 행위를 낙태의 원인행위로 보아
이를 무조건 금지하는 것은
지나친 선입견에 입각한 것이라 할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 사건 규정의 입법 당시에 비하여
남아선호경향이 현저히 완화되고 있고,
전체 성비가 2006년 107.4로
자연성비 106에 근접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성비불균형이 심각한 사회문제인가 하는 점 및
태아에 대한 성별고지가
낙태의 원인행위로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규정이
임신기간 전 기간에 걸쳐 태아의
성별 고지를 금지하는 것은 과도한 대처라고 할 것이다.

3) 낙태를 형사처벌하도록 하고 있는 형법 규정이
현재는 거의 사문화되어
낙태의 근절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상황에서는
성별을 이유로 한 낙태라도
근절시키기 위해서는
이 사건 규정과 같은
입법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또 다른 낙태 규제 제도를 신설하는 방법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법 집행을 실효성 있게 하여
제도가 목적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도록 하는 방법을 통해 해결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낙태 근절의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형법상의 낙태죄를 엄격하게 집행한다면
성별을 이유로 한 낙태는 물론,
다른 원인으로 인한 낙태도 근절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낙태를 범죄로 규정하여
형법으로 처벌하고 있는 마당에
엄중한 법 집행을 통하여 그 실효성을 도모하기보다,
성별을 이유로 한 낙태 근절에
과연 효과가 있는지도 불분명한 태아의 성별 고지 금지를
임신기간 전 기간에 걸쳐 강제하는 것은
피해의 최소성 원칙에 반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어때? 이 결정례를 읽어보니까.
헌법재판관 할배들이
생각보다 꼴통들은 아닌 것 같아서..
조금은 안심되지 않아?

매우 슬프게도
우리 헌법재판관 할배들이
항상 이렇게 합리적인 것은 아닌것같아.

우리 헌법재판관 할배들..
사형제도에 대해서도 이런 태도를 가져주시면..
얼마나 존경스러울까?

2013년 5월 23일 목요일

자신의 블로그에 생식기사진을 게재한 대학교수




1.

자신의 블로그에 생식기사진을 게재한 대학교수가 있었다. 방송통신위원회 심의위원으로 활동하던 박경신이었다. 그가 게재한 생식기사진은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음란정보로 “의결”한 것들이었다. 생식기사진 밑에는 “이 사진을 보면 성적으로 자극받거나 성적으로 흥분되나요?”라고 쓰여 있었다. 박 교수는 당시 "생식기 이미지 자체를 음란물이라고 보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서 부당하다"는 취지의 주장을 담은 글을 함께 게시했다.

검찰은 박 교수를 기소했다. 정보통신망을 통해 음란한 화상 또는 영상을 공공연하게 전시했다는 혐의였다.

1심은 박 교수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1심법원은 재판장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여지는지는 절대로 밝히지 않은채, “우리 사회의 평균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사건 게시물은 지배적으로 성적 수치심이나 호색적 흥미에 치우쳐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하긴 진실의 발견과 사실의 확정에 대해 가지고 있는 법원의 권한에 따르면, 1심법원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판단할 권한이 있었다. 그게 바로 자유심증주의였다.

또한 1심법원은 그 게시물이 “별다른 사상적·학술적·교육적 가치를 지니지 않”다고 했다. 그 게시물은 방송통신위원회의 의결을 비판하고자 하는 나름의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지만, 1심법원은 그것을 애써 외면했다. 하긴 진실의 발견과 사실의 확정에 대해 가지고 있는 법원의 권한에 따르면, 1심법원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판단할 권한이 있었다. 자유심증주의였다.

다행히 2심법원의 자유심증은 1심법원의 것과 달랐다. "게시물을 전체적으로 본 일반 보통인이라면 핵심내용이 사진이 아니라 그 뒤의 박경신 교수의 주관적 견해 부분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박 교수의 게시물에는 “사상적·학술적 가치있기 때문에 음란물이 아니라”고 했다. 박 교수는 2심선고 후 “사법부의 승리”를 선포했다. 사법부의 승리는 무슨... 개뿔




2.

98년도에 내려진 헌법재판소의 견해에 따르면, 음란물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째, 인간존엄 내지 인간성을 왜곡할 정도로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성표현이어야 했다. 둘째, 전체적으로 보아 하등의 문학적, 예술적, 과학적, 정치적 가치를 가지지지 않았어야 했다.

1심법원과 2심법원은 둘 곳다 이 기준을 적용했다. 문제는 각자 법원에게 주어진 “사실발견에 관한 자유심증” 권한이었다. 진실을 발견하고 사실을 확정할 권한이 있는 법원은 각자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판단을 했다. 그러기에 같은 기준을 가지고, 같은 사건을 보면서도 사실에 대한 판단은 달랐다.

이 사건처럼 같은 잣대를 가지고 같은 사건을 바라보면서도, 법원마다 판단이 달라지는 일은 너무나 빈번한 일이다. 변수는 여러 개다. 검찰의 거증능력, 변호인의 변호능력, 심지어 예상치않은 법원의 예단도 변수가 될 수 있다.

이번 재판에서는 다행히 상급법원이 해당 게시물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메시지를 인정해줘서, 박경신이 유죄를 겨우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재판부가 이 사건의 2심재판부처럼 두눈 번쩍 뜨고, 정신을 잘 차리고 있으란 법도 없다.

3.

그렇다면 박경신을 두 차례의 재판에 불러들이며 고초를 겪게 한 원흉은 무엇일까?

모호한 처벌기준일까? 아니다. 두 차례의 재판에서 사용된 기준은 똑같은 것이고 나름 명쾌했다. 똑같은 사건에 똑같은 기준이 적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법률가들의 판단이 다른 것은 사실에 대한 확신이 달랐기 때문이지, 기준이 모호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법적 잣대를 들이대지 말아야 할 도덕적 문제에 대해 법적 잣대를 들이댔기 때문에 생긴 문제일까? 그도 아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판결번복과 사실판단을 둘러싼 법원사이의 의견차이는 늘상 모든 사건에서 늘상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절도, 폭행, 상해, 살인, 강간과 같은 범죄의 판단에 있어서도 이런 일은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

그렇다. 박경신을 두 차례의 재판에 불러들이며 고초를 겪게 한 원흉은 바로,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 아니었을까? 재판과정에서 진실의 발견과 사실의 확정에 대한 전권을 지니고 있는 판사는 슬프게도 그 권한에 걸맞지 않게 인간의 불완전함을 달고 다닌다. 권한은 있는데 능력은 없는거. 이거 골때리는거다.

4.

물론 우리 사회는 재판관의 인간적인 불완전함과 그 판단의 불완전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걸 따르기로 마음 먹은 것은, 그것을 따르지 않고서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존재라는 이유로, 어떤 인간에게도 진실의 발견과 사실의 확정에 대한 권한을 주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될까? 이 세상 모든 이가 동의하지 않는한 어떤 판결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재판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보다 사회정의를 위해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재판제도와 재판관의 불완전함을 직시하고 욕하면서도, 그 제도에 복종할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재판관의 인간적인 불완전함을 잘 알고 있는 이 사회가 그 불완전함을 완화시켜줄 나름대로의 장치를 여러 가지 두고 있다는 점이다. 심급제도와 탄핵주의 같은 것들은 모두 그런 재판관의 인간적인 불완전함을 완화시키고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나름의 제도라 할 거다.

이렇게 인간의불완전함 때문에 벌어지는 일을 두고, 애초에 있었던 음란물 규제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것처럼 책임을 돌리는 것은 좀 생뚱맞다.

5.

과연 박교수는 왜 생식기 사진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놓았을까? 음란물 규제 자체에 반대하는 걸까? 그가 음란물 심의위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보자면, 그건 아니었을 거다.

박 교수라고 “모든 표현이 시민사회의 자기교정기능에 의해서 해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겠는가. “일정한 표현은 일단 표출되면 그 해악이 대립되는 사상의 자유경쟁에 의한다 하더라도 아예 처음부터 해소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거나 또는 다른 사상이나 표현을 기다려 해소되기에는 너무나 심대한 해악을 지닌 것이 있다”는 것을 박교수라고 모르겠는가? 박 교수라고 굳이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성을 왜곡하고 저해하는 표현물”을 자유롭게 하고 싶겠는가?

다른 사상이나 표현을 기다린다면, 시민사회의 자기교정기능에 의해서 충분히 해소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생식기 사진이라는 이유만으로, 성적으로 자극받거나 성적으로 흥분될 거라고 예단하고, 더 이상의 판단을 거부해버린 심의위원들에 대한 항의. 박교수가 그것 때문에 생식기사진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놨다는 것은 박 교수의 글을 통해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교수가 항의하고자 하는 현실 역시, 음란물 규제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심의관들의 불완전함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었을까? 박 교수가 항의하고자 하는 현실은 음란물 규제를 존속한채, 인간의 불완전함을 완화시켜주는 제도의 도입을 통해 타협할 수 있는 일은 혹시 아닐까? 음란물일 지라도 함부로 그 표현을 규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똘레랑도 오늘은 생각이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