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입주자대표회의의 이사입니다.
이사가 뭐 대단한 벼슬은 아닙니다.
이사가 되면요, 다른 주민들과 달리,
특별한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나,
다른 이사들의
직무상 위법사실 혹은 범법사실 앞에서..
혹시 모르면 몰랐을까,
알면서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면,
저는 그 범죄의 방조범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사라는 직책이 부여하는
보증인적 지위와 보증의무 때문입니다.
저는 취임직후,
관리사무소 장부를 검사한 후,
우리 아파트 잡수입이
규약에서 허락한 용도와
다르게 사용되었던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현행 규약은 더욱더 엄격해졌습니다만,
당시 규약에 따르더라도,
잡수입을 정해진 용도와 다르게 사용하려고 할 경우,
주민들에게 공고한 후
예비비로 편성해서
사용하여야 했었는데...
지금 이 순간까지도 수 대째 연임하고 있는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은
당시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파트 주민들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잡수입을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사용할 생각으로
잡수입을 예비비로 편성하지 않은채
주민들이 모르게
규약에 정해진 목적 외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건에 대해 제가 검토를 해보니..
불과 몇 년전, 대구지역에서
그와 같은 식으로 아파트 잡수입을
다른 곳에 전용하다가..
횡령죄의 형사처벌을 받은 사례가 있었습니다.
혹시 모르면 몰랐을까,
제가 알면서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
이사의 직무를 해태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제가 그러한 횡령의 방조범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제가 회장과 전임감사의 횡령사실을
주민들에게 공고하고...
경찰에도 고소하게 된 배경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사건 고소를 접수한 수사기관은...
제가 고소한 회장과 前任 감사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렸더라고요.
불기소처분에 대해
수사기관이 내세운 공식적인 이유는
“증거불충분”이었습니다만,
아마도 단지 다른 곳에 전용하여 사용하였을 뿐
착복한 것이 아니라는 점..
이 사건에 대해 깊이 수사해서 기소하기에는
더욱더 중요하고도 시급한 사건이 많다는 점...
장부 검사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점
등등을 고려해서
기소편의주의에 따라
검사가 내린 결정이었을 겁니다.
이런 검사의 결정을 두고
반갑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또, 그것을 두고
제가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저에게 고소할 의무와 권한이 있듯이..
검사에게도 자기가 내키는 사건만
기소할 권한이 있으니까요.
국가가
세상의 모든 범죄자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처벌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이기도 하고요.
저는 그냥 저에게 주어진
보증인적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방조범을 면했으니..
그것으로 그만인 겁니다.
그런데,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
자신에 대한 불기소처분을 바라본 심정은
좀 남달랐던 모양입니다.
통지를 받은 바로 다음 회의 때..
대대적으로 소송결과에 대해 떠벌리더군요.
마치 자신의 무죄가
입증이라도 된 듯이 말입니다. 커억.
거기까지는 뭐 그럴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요..
입주자대표회장님께서 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셨댑니다. 허이쿠.
입주자대표회장님..
자신의 무죄가 입증되었다고 보시고..
횡령사실을 아파트 주민들에게 공고까지 한 저의 행위가
명예훼손의 요건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신 걸까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 난감합니다.
고소를 받았으니
경찰에서는 수사를 해야 할 겁니다.
그건 경찰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매우 슬프게도
우리나라 경찰의 수사관님들...
고소인 조서와 피고소인 조서를 받지 않으면,
마치 수사를 하지 않은 것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연히 저보고도 경찰서로 나와서
조사를 받으라고 하는 겁니다.
안 나오면, 체포영장이 발부될 수 있다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출석요구”입니다.
어쩝니까?
제가 전화로 담당조사관님께
형사소송법 강의를 해드렸습니다.
이 사건은
고소인의 주장만 들여다봐도
피고소인의 행위의 위법성이 조각되고,
따라서 범죄는 성립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을텐데..
나한테 어떤 진실을 발견하겠다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굳이 나를 부른다면,
나는 나가서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그랬더니. 조사관 曰.
묵비권을 행사해도 좋지만,
절차상 꼭 필요하니 꼭 나오긴 하랩니다.
안 그러면, 체포영장이 발부될 수도 있댑니다.
아니, 이게 체포영장 발부요건이 되는가?
조사관 曰
구속영장 발부요건은 안되도.
체포영장 발부요건은 될 수 있댑니다.
예비군 훈련을 받지 않았다는 혐의를 받고.
출석요구에도 불응했다는 이유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사례도 있댑니다.
피의자 출석요구는 무조건 하는게 아니다!
수사상 “필요할 때” 하는 거다. 형사소송법 200조.
그랬더니, 조사관님 曰
수사에 필요하시댑니다.
아니 묵비권 행사하겠다고 한 사람을 불러다놓고..
무슨 진실을 발견하시겠다고..
수사상 필요하다고 하시느냐?
조사관님 曰
절차상 수사에 꼭 필요하시댑니다.
절차상 필요한 것은
경찰들의 문제고,
내 의무는 아니다.
내 생각에는 수사상 필요해서
출석을 요구하는게 아니라..
수사의 방법에는
피의자 출석요구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 아닌지 의심된다.
불필요한 출석요구 말고.. “수사”를 하셔라!
난 협조해드릴 생각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약속하시고! 퇴근 시간 후에
우리 집에 와서 물어보셔라! 어떠냐?
내가 차도 한잔 끓여드리겠다.
자꾸 체포영장 체포영장 운운하는데..
체포영장이 발부되려면..
피의자가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정당한 이유없이 출석요구에 응하지 아니하여야 한다.
물론 이 “정당한 이유”에 대한 평가는
최종적으로 판사가 하겠지만...
1차적으로는 나도 할 수 있고.
조사관님도 할 수 있지 않느냐?
조사관이 수사상 꼭 필요해서
출석을 요구하는게 아니라..
조사관이 수사의 방법에는
피의자 출석요구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 아닌지
의심된다는 점은
출석요구에 응하지 않는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조사관님 생각은 어떠시냐?
결국...
조사관님께서는 이 얘기를 곰곰이 들으시더니..
서면조사가 가능한지 알아보겠다는 말씀으로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에효...
평온한 삶을 방해받지 않으면서
이 지구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게 너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