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인종청소를 주장하며
백인만의 미국을 만들자는
정당이 미국에서 생겨났습니다.
이른바 미국 네오 나치(NSPA)가 그들이죠.
그들이 유대인학살피해자 마을에서
행진을 하겠다고 하는 통에
미국전체가 들썩거린 적이 있었죠.
한마디로,
일제침략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또라이들이
위안부할머니들 마을에서
집회를 가지겠다고 신고했다고
상상하시면 틀리지 않습니다.
과연 그때 미국은 어떤 식으로 해결했을까요?
지금은 해직당한 문화방송 교양피디 중에
이채훈프로듀서라는 분이 계시는데요.
그 분이 12년 전에 만든 다큐멘터리
MBC스페셜.
"자유의 초석, 수정 헌법 1조" 편을 보시면
그 때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대본 한번 읽어보시겠습니까?
무한한 표현의 자유는
때로 미국인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야기하기도 한다.
1977년, 시카고에서는
한 집회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경찰에 의해 저지되고 있었다.
이날 집회의 주인공들은
신 나치주의자들이었다
미국 네오 나치(NSPA)의 목적은 내 생전에 백인만의 미국을 만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대대적으로 우리의 의견을 알려야 한다. 이왕이면 합법적으로 정치 권력을 얻고, 헌법을 고쳐서 백인만의 미국을 건설하겠다 (신 나치주의자 콜린 연설)
성난 시민들이 반발했지만
신 나치의 집회는
경찰의 보호 속에 예정대로 진행됐다.
이제 어떤 폭력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이 나치 마크를 가지고 나왔을 때 우리는 모두 수 천개의 썩은 달걀를 비롯해서, 쓰레기, 막대기, 돌 등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던졌습니다 . (SCHUTZ INT)
어 떤 사람은 주머니에 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집에 가라고 했지만 그는 ,"싫다, 유럽에 있을 때 나치는 내 가족을 몰살하고 나도 죽일 뻔 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총을 쏠 준비가 돼있었습니다. (Bender INT.)
그러나 누구도 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들에게도 표현의 자유는 뺏을 수 없는 권리였다
시카고 북쪽의 고급주택도시, 스코키.
한가롭게 보이는 이 도시에는
좀 특별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인구의 7만 중에 3만 명이 유태인.
그 중에는 나치 수용소의 학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온 사람들도 있다.
종전이후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난 유태인들이
연고를 찾아 하나둘씩
이곳에 정착을 했던 것이다.
희생자를 기리는 동상 앞에는
여전히 꽃이 바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1977년 신 나치주의자들은
바로 이 마을에서 행진을 계획했었다
여기서부터 마을 사람들이 꽉 차 있었습니다. 여기가 스코키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인데, 시장이 여기 있었고 우리 모두 여기서 모여 있었습니다. 나는 군에서 쓰던 철모를 쓰고 있었는데. (SCHUTZ INT.)
"나치야 물러가라. 나치야 무러가라" (자료 화면)
유태인 생존자들은 오늘까지도 모두 똑같이 얘기합니다. (SCHUTZ INT.)
사 람들은 생존자들에게 "걱정마라, 미친 사람들의 작은 조직일 뿐이다. 신경 안 쓰면 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학살의 생존자들에게 통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히틀러도 처음에는 작은 조직에서 시작했으니까요. (Gertsner INT)
신 나치들은
시카고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미국에 3천개정도의 우익단체가 있다. 시카고에 전국 본부가 있고 세인트루이스에도 우리 사무실이 있다 (신나치주의자들 인터뷰)
당시 그들에 따르면,
신 나치는
정치적 세력을 키우기 위해
각종 선거에 출마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대중들을 위한 집회나
행진을 벌일 예정이라고 했다.
신 나치는
다른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스코키에서도 대중 집회를 계획했다.
시청의 허가를 요청했으나
유태인의 마을, 스코키로서는
곤란한 일이었다.
폭력 사태에 대비해서
35만 달러의 보험을 가입해야만
집회를 허가해준다고 통보했다.
사실상의 거절이었다
신 나치주의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들은 스코키 시청이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며
강력히 항의를 하고 나섰다.
이번 사태에서 우리가 요구한 것은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뿐이었다. 우리를 받아들이고 환영하는 곳에서 연설하려는 것뿐이었다 (나치주의자 인터뷰)
신 나치와 스코키의 충돌은
법적 소송으로 번져갔다
재판은
일리노이주대법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좀처럼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다.
일리노이 법정은 판결을 내리기까지 시간을 정말 길게 끌었습니다, 감정적으로는 스코키 사람들과 같았기 때문에 결정을 함부로 내리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상당히 다루기 힘든 사회적 이슈였습니다 (Downs 인터뷰)
일리노이주법원은
신 나치의 행진을 불허했다.
수정헌법 1조에도 불구하고
스코키가 유태인마을이라는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판결이었다
유태인 생존자들을 볼 때에게 그것은 생각을 교환하는 연설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Schwarz인터뷰)
인종대청소의 이름으로 자행된
유태인 대학살은
인류가 저지른
가장 잔혹한 범죄였다.
광기 어린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태인이 600만명.
비록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흘렀지만
스코키 사람들에게
나치는 아직 잊지 못할 공포였다
네델란드 출신으로 종전 후
미국으로 이주해온
엘리자베스 슈츠 부인.
그녀는 오빠를
아우슈비츠로 보내야 했고
자신도 수없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이분이 우리 어머니입니다.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저, 그리고 남동생은 살았습니다 (SCHUTZ 부인 인터뷰)
그 집에는 식당이 있었는데 마루를 들어내면 그곳에는 물이 있었어요. 네덜란드는 집에 물 위에 있기 때문이죠. 그는 숨을 곳을 만들었는데 철제 목욕통을 그 안에 집어넣었어요. 그리고 독일인들이 오면 저는 목욕통에 들어갔는데 아주 조심해야 했어요. 왜냐하면 밖으로 나가 운하로 떠내려갈 수 있었기 때문이죠. (SCHUTZ 부인 인터뷰)
슈츠 부인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미국인의 도움으로
가짜 신분증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미국은
생명을 되찾아준 나라였다.
그런데 그곳에 다시
나치의 망령이 살아난 것이었다
(나치주의자 인터뷰)
- 사실 마지막 해결책이라는 것은 유태인 국제 공산주의자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죠
Q. 그것이 마지막 해결책인가요?
- 만약 내게 선택권이 있다면 한편으로는 완전히 유태인들을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신 나치는
스코키에서의 집회를 위해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미국 최대의 인권단체인 ACLU가
이들의 변호를 맡은 것이다
ACLU, 미국 시민권연맹은
인권문제 해결에 앞장서온
가장 신뢰받는 시민 단체였다.
그런 그들이 왜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변호를 맡은 것일까.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견해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말못하게 한다면, 우리는 세상에 어떤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사람들도, 견해가 맞지 않는다고, 그들을 말못하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변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Goldberger변호사 인터뷰)
더구나 신 나치의 변론을 담당했던
골드버거 변호사는
바로 자신이
유태인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이 사건을 맡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유태인이니까요, 제가 볼 때 프랭크 콜린의 생각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의견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던 달라질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검열 당하면, 다른 누구도 검열당할 수 있다는 얘기니까요 (Goldberger변호사 인터뷰)
그러나 이런 ACLU의 입장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신 나치의 편에 선 그들을
비웃는 사람도 많았고
심지어 ACLU는
3만 명의 회원이 조직을 떠나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제 자신을 포함한 많은 ACLU사람들이 탈퇴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경우 그 자유는 일정한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 인종 문제로 그들을 저지할 수 없다면, 600만 명을 죽인 사람들에게 자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SCHUTZ 부인 인터뷰)
1978년 1월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내려졌다.
"나치마크를 앞세운 시위는
상징적 발언으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집회는
허가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 나치의 승리였다.
이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이제 어디서든
집회의 자유를 누릴 것이다
신문마다 신 나치의 승리가
대서특필했다.
상식을 넘어선
대법원 판결을 놓고
많은 논쟁이 계속됐다.
재밌는 일은 대법원에서 판결을 내리면서 스코키 사람들에게 사과를 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판결을 내려서 미안합니다, 학살 생존자들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법은 어쩔 수 없다라고 말입니다 (Downs 인터뷰)
대법원의 판결이 당시 그런 상황에서는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겼다고 해서 나쁜 선례를 만든 것도 아니고 수정헌법 1조를 퇴보시키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Schwarz인터뷰)
우 리가 취한 입장은 미국 법체계 속에서 일관성 있는 태도였습니다. 나치의 의견이 너무나 해롭고 말이 안 된다는 이유로 졌다면 법이 바뀌어서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기가 어렵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Goldberger 변호사 인터뷰)
그리고 24년이 흘렀다.
그 후 스코키에서는
신 나치의 어떤 집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 이상의 집회 요청도 없었다.
신 나치가 스코키에 오지 못한 것은
법적인 제재 때문이 아니었다.
1978년 6월에
시카고에서 있었던 신 나치의 집회.
신 나치보다 더 많이 모인 사람들이 있었다.
유태인, 기독교인을 비롯한
여러 종교인들과 흑인 인권운동가들.
이들이 스코키를 위해
함께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옳건 그르 건
사상과 이념도 자유롭게 경쟁을 하면
마침내는 진리가 승리하게 된다.
결국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진리와 허위를 판단하는
최선의 해결책인 것이다
신 나치와의 충돌이 지나고 난 뒤,
스코키 시내 중심에는
특별한 건물이 하나 설립됐다
스코키 홀로코스트 박물관.
스코키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대학살의 증거들을 모아
전시해놓은 곳이다.
광기 어린 살육의 도가니에 아내를 잃고,
아이를 잃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
그 동안 스코키 사람들은
그 참혹한 기억을 잊으려고만 애썼다
하지만 신 나치의 등장 이후,
스코키 사람들은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나치가 얼마나 끔찍했으며
자신들이 어떤 고통과 희생을 치렀는지
더 많이 알려야할 필요를
깨닫게 됐던 것이다
이곳에서 행진하려고 했던 사건의 결과로 생겨났습니다. 모든 연령의 사람들에게 나치이념의 위험성을 알리고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가르치는 곳이었습니다. (Gertsner 인터뷰)
이상은 MBC스페셜 미국시리즈 "자유의 초석, 수정 헌법 1조" 편 (글구성:노경희, 연출:이채훈)의 대본 중 일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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