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3일 금요일

더 큰 표현의 자유로 보복합시다.



신영복 선생은 동양사상의 핵심 개념으로 인(仁)을 꼽고, “인(仁)은 기본적으로 인(人)+인(人), 즉 이인(二人)의 의미”이며 “인간관계” 자체 또는 “관계들의 총화”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촉망받는 인권변호사인 젊은 법률가 정정훈은  이러한 신영복 선생의 설명이 인권의 개념에 대해서도 훌륭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합니다. 정정훈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인권은 항상 ‘관계의 문제’이고, 중첩적인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특히 ‘권력관계’를 포착해 드러내는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인권은 권력관계 속에 놓여 있는 약자들의 자리를 파악하는 언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가끔 인권문제가 가해자 인권과 피해자 인권이 대립하는 양상으로 진행되곤 합니다. 이에 대해 앞의 법률가 정정훈은 "관계가 일면적이지 않고 총체적이며,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해간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여성들만을 골라 살해한 연쇄살인범은 연쇄살인이라는 범죄의 맥락(가해자-피해자 관계)에서는 상대적으로 강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체포되어 형사절차로 들어온 이상, 그는 형벌권을 행사하는 국가에 대하여, 그리고 선정적 소재를 사냥하는 언론에 대하여 스스로를 보호하기 어려운 관계의 약자라는 것입니다.

정정훈은 가해자 인권’이 아니라, ‘피의자 인권’을 말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정정훈과 견해를 같이 합니다.

오늘 아침, 표현의 자유원칙이 겨냥하는 곳은 권력이라는 취지의 고명섭 논설의 한겨레 칼럼은 인권은 권력관계 속에 놓여있는 약자들의 자리를 파악하는 언어라는 정정훈의 말과 같은 얘기입니다. 그런데, 고명섭 논설처럼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을 단지, 이슬람세계와 서구 세계의 구도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위험해보입니다. 지금까지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이 단지 이슬람세계만을 겨냥해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와 교황, 당대의 정치권력들 역시 모두 샤를리 에브도에 의해 풍자되었고 조롱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종교권력과 힘 없는 만평지의 구도로 보는 것이 마땅한 이유입니다.

철학자 이상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버릇이 없으면, 결코 권력적일 수 없다.  권력 있는 사람들의 "미움 대상"이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말이 권력을 향해 촌철살인이 되어도, 결코 권력적일 수는 없다. " 권력을 향해 있었지만, 결코 권력적이지 않았던 "샤를리 에브도". 지배적 가치에 맞서 다른 견해를 표현했을 지언정, 강자의 자리에서 약자를 내려다보며 비아냥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사 권력에 맞서고 버릇없던 샤를리 에브도에게 성숙하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잠시 눈을 감는 것이 희생자에 대한 도리이고, 테러를 바라보는 성숙한 자세입니다. 민간인을 상대로한 테러를 통해서는 어떤 메시지 전달도 성공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 인류사회는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 대신 수많은 테러 앞에 직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차별을 주장하는 우익 테러에 맞서서, 우리는 더 큰 똘레랑스로 보복해야 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위협한 테러에 맞서 우리는 더 큰 표현의 자유로 보복합시다. Je suis Charlie. 나 역시 샤를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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