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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13일 토요일
김부선을 보고 떠오른 내 젊은 날의 추한 자화상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남에 의해서 확인받아야 하는 사람, 곧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로부터 동의를 얻지 못해도, 자신을 스스로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황임란) 내가 상처받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상, 어느 누구도 내게 상처를 입힐 수 없다고 했다.
절름발이 자유주의자 김부선의 이중성과 천박함
김부선은 멋진 배우였다. 어떤 금기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펴나갈줄 아는 씩씩한 전사였다. 김어준의 말처럼,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금기인 마약에 관한 사회인식에 최초로, 단신으로,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다, 적어도 나에게 오늘
아침까지는 그랬다.
2010년 10월 21일 목요일
2010년 6월 20일 일요일
성매매를 바라보는 시각
1.
어떤 사람들은 섹스를
가장 중요한 가치 중에 하나로 취급하지.
심지어,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으니까,
섹스를
목숨보다 소중하다고
여기는 사람의 경우,
자신의 섹스가 무너졌을 때,
이를테면 강간을 당했을 때,
목숨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할지도 몰라.
그렇게 길러져온거야.
섹스가 목숨보다 소중하다고.
그건 이유야 어쨌든,
어떤 사람의 가치체계에 속한 문제라.
옳고 그름을 따지긴 어려워.
남성들의 순결이데올로기에서
출발했다는 걸 모른채,
그렇게 길들여진 것이
안타까운 건 사실이지만..
2.
그런데, 사실 섹스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진 사람들도 많아.
그게 가족일 수도 있고, 꿈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쾌락일 수도 있어.
그 사람들은 섹스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아니 별로 중요하지 않다기 보다는,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섹스를 어느 순간 희생시킬 수 있다는 거지.
쉽게 말해 섹스를 파는 거야.
가족을 위해, 꿈을 위해,
돈을 위해, 때로는 쾌락을 위해서..
3.
첫번째 사람도, 두번째 사람도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아.
그런데, 첫번째 사람이 두 번째 사람에게
뭐라고 나무라거나, 흉을 볼 수 있을까?
가치체계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다수라는 이유로?
흉을 보면 안될 것 같은데,
흉을 보는게 현실이야.
그건 미풍양속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하고,
법의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하지.
그런데 과연 자신과
단지 가치체계가 다른 어떤 사람을 두고,
같은 하늘을 지고 살수 없다며 비분강개하며,
법의 이름으로 그걸 금지하는 건
정의로운 일일까?
4.
성매매를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영역으로 두자는 주장을
마치 장기매매를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영역으로 두자는 것과
동일시하는 사람이 있어.
"그렇다면 장기매매도 자유화하지 왜?"
이러면서 말야.
그러나, 난 성매매와 장기매매 사이에서
어떤 공통점도 보지 못해.
성매매가 비인간적이라면,
그건 몸을 이용하기 때문이 아니야.
모든 노동은 몸을 이용하잖아?
성매매가 비인간적이라면,
그건 가장 혹독한
"감정노동"에 속하기 때문이지.
좋지도 않은 사람한테
가장 좋아하는 사람한테 해야 하는
행동을 해야하는 것.
그런데, 그런 감정노동은
비단 성매매에 속한 문제만은 아니잖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모두 웃음을 팔면서,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 아닌가?
"성은 상품이 아니라 인격"이라지만,
사실 우리 모두 사회생활을 하면서,
인격을 팔고 있잖아?
그러는 주제에, 누가 누굴 뭐래?
5.
노예란,
인격적으로
모멸감을 느끼는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컽는 말이 아냐,
예로부터 노예들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거든.
노예란,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우린.. 노예였다"라고 말하는
조선일보 기사는 되씹어볼만해.
성매매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나갈 바는
여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성매매의 문제는
성매매 자체에 있지 않고,
성매매종사자 수탈에 있다는 것.
성매매 종사자 수탈의 고리가
사실은 성매매 처벌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거.
성매매는 금지하지 않되,
성매매에 대한 알선,
장소임대 등은 엄격히 처벌하는
일부 선진국의 예를
참고해볼만할 것 같아.
대신 세금받고, 국가가
성매매종사자들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주면 되지.
국가가 기둥서방이 되라는 얘기냐는
말도 나올 수 있고,
공창얘기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기는 하겠지만,
세금 받고, 폭력으로 보호해주는 일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국가의 당연한 직무 아냐?
그걸 두고, 기둥서방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 자체가
성매매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서 나오는 거 아닐까?
세금 내고 국가와 법에 의해
폭력으로부터 보호받는 식당을
국영 식당이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김길태라는 괴물 앞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어가는 우리사회.
한 뉴스 앵커가 곤욕이다. 최근 검거 압송되는 김길태를 스케치하면서, “마음고생이 심해서인지, 얼굴이 수척해보인다”라는 말을 했단 이유다.
분노한 네티즌들은 단단히 뿔났다.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살인한 범인에게 마음고생으로 수척해보인다는 말은 김길태의 변호사가 할 말이지, 사실보도를 해야할 언론이 할 말이 아니”랜다. 하긴, 인면수심의 사이코패스에게도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그도 인간이었다는 것이 곤혹스럽고, 불편할 수도 있다.
결국 성난 넷심에, YTN도 두손을 들었다.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자, “표현이 부적절했다”며 사과했단다. 코미디다. 엽기적이다. 과연 “마음고생이 심해서인지 얼굴이 수척해보인다”라는 말 속에 범인에 대한 어떤 특별한 배려가 담겨져 있는가?
흉악범을 향한 넷심의 분노는 이런 평범한 스케치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평범한 스케치는 범인에게도 배려라는 얘기다. 분노하는 자신들의 마음과 똑같지 않은 감정의 스케치는 그 역시 분노의 대상이 된다는 거다.
경찰은 압송과정에서 김길태의 얼굴을 노출했다. 기존의 마스크의 제공을 중단한 게 아니다. 쓰고 있던 마스크 조차 빼앗겼다. 이례적이다. 얼굴노출을 결정한 건, 법도 판사도 아니다. 시민의 분노에 힘을 얻은 수사팀이다.
“인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런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오히려 공익에 맞는 것 같다는 수사팀의 의견에 따라 이같이 결정했"단다. 지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한다. 왜? 판결까지 지들이 하지.
경찰은 “공개수배할 때 이미 사진이 공개돼 굳이 얼굴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다. 불가피하게 한번 침해된 인권이기 때문에, 계속 침해되어도 괜찮다는 논리다. 검거를 위해, 얼굴공개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의 얼굴 공개와 압송시의 얼굴 공개는 분명 다르다. 목적의 정당성? 수단의 적합성? 침해의 최소성? 법익의 균형성? 어느 하나 충족하는게 없다. 과잉금지의 원칙은 수사팀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내동이쳐졌다.
똑똑히 보자. 경찰은 자신들의 말처럼 “굳이 감춰”주는 서비스를 ?안한게 아니다. 성난 민심을 위해 마스크를 빼앗고, 친절하게 벗겨주는 서비스까지 해준 거다. 분노한 민심을 등에 업은 분풀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언론은 이에 호응하듯, 만방에 체포된 범인의 얼굴을 뿌려대고 있다.
김기태 때문에 이 사회가 잃은 건, 소중한 여중생 한명만은 아니다. 이 사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원칙들을 하나하나 내려놓고 있다. 과연 우리 사회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고, 김기태라는 괴물 앞에서 분노할 방법은 없는걸까?
니체는 말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속에서 스스로 괴물이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동안 들여다 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 될것이다”
분노한 네티즌들은 단단히 뿔났다.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살인한 범인에게 마음고생으로 수척해보인다는 말은 김길태의 변호사가 할 말이지, 사실보도를 해야할 언론이 할 말이 아니”랜다. 하긴, 인면수심의 사이코패스에게도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그도 인간이었다는 것이 곤혹스럽고, 불편할 수도 있다.
결국 성난 넷심에, YTN도 두손을 들었다.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자, “표현이 부적절했다”며 사과했단다. 코미디다. 엽기적이다. 과연 “마음고생이 심해서인지 얼굴이 수척해보인다”라는 말 속에 범인에 대한 어떤 특별한 배려가 담겨져 있는가?
흉악범을 향한 넷심의 분노는 이런 평범한 스케치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평범한 스케치는 범인에게도 배려라는 얘기다. 분노하는 자신들의 마음과 똑같지 않은 감정의 스케치는 그 역시 분노의 대상이 된다는 거다.
경찰은 압송과정에서 김길태의 얼굴을 노출했다. 기존의 마스크의 제공을 중단한 게 아니다. 쓰고 있던 마스크 조차 빼앗겼다. 이례적이다. 얼굴노출을 결정한 건, 법도 판사도 아니다. 시민의 분노에 힘을 얻은 수사팀이다.
“인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런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오히려 공익에 맞는 것 같다는 수사팀의 의견에 따라 이같이 결정했"단다. 지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한다. 왜? 판결까지 지들이 하지.
경찰은 “공개수배할 때 이미 사진이 공개돼 굳이 얼굴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다. 불가피하게 한번 침해된 인권이기 때문에, 계속 침해되어도 괜찮다는 논리다. 검거를 위해, 얼굴공개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의 얼굴 공개와 압송시의 얼굴 공개는 분명 다르다. 목적의 정당성? 수단의 적합성? 침해의 최소성? 법익의 균형성? 어느 하나 충족하는게 없다. 과잉금지의 원칙은 수사팀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내동이쳐졌다.
똑똑히 보자. 경찰은 자신들의 말처럼 “굳이 감춰”주는 서비스를 ?안한게 아니다. 성난 민심을 위해 마스크를 빼앗고, 친절하게 벗겨주는 서비스까지 해준 거다. 분노한 민심을 등에 업은 분풀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언론은 이에 호응하듯, 만방에 체포된 범인의 얼굴을 뿌려대고 있다.
김기태 때문에 이 사회가 잃은 건, 소중한 여중생 한명만은 아니다. 이 사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원칙들을 하나하나 내려놓고 있다. 과연 우리 사회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고, 김기태라는 괴물 앞에서 분노할 방법은 없는걸까?
니체는 말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속에서 스스로 괴물이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동안 들여다 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