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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17일 화요일

인권침해와 공소시효


요즘 이 제도에 대해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공소시효 이야기다. 공소시효는 죄를 진 사람을 용서해주자는 제도가 아니다. 어떤 범죄에 대해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국가의 형벌권을 소멸시키는 제도이다. 그런데 요즘 이 제도가 여기저기 불려다니면서 고생이라나?

한 영화감독이 ”막말엔 공소시효도 없구나”라고 말한데 이어, 유명 배우까지도 "도대체 연예인들에게는 들이대는 공소시효”도 없다며 덧붙였단다. 김구라 막말 파문을 두고 한 소리다.

장진과 정찬의 불편한 심기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어떤 사과를 해도 용서가 되지 않는 어떤 거부 못할 바람에 대한 불편한 심기일게다. 그러나, 공소시효 얘기는 번짓수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만약 역사의 심판이나, 여론의 비난에 공소시효를 논하는 사람이 있다면, 공소시효의 뜻을 몰라서 나오는 무지의 결과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있을까? 역사의 심판과 여론의 비판에 당연히 시효란 있을 수 없다. 김구라를 비판하는 걸 두고, 시효를 따지는 것은 이완용을 비판하는걸 두고 시효를 따지는 거나 똑같은 얘기다.

더구나 김구라의 발언은 전쟁범죄 피해자를 모욕 주는 언사였다. 물론 이에 대해 형벌권을 행사하자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다만 문제의식을 가지고 참회를 요구하는 것조차 문제인가? 과연 그것이 시효를 들먹일 일인가? 더구나 1998년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 제정 이후 각국은 반인륜범죄 및 반인도범죄, 전쟁범죄 등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쪽으로 법규를 바꾸는 추세에 있지 않은가?

장진의 말. “김구라가 8년 전에 써놓은 일기가 발견된것도 아니고, 다알면서 지금까지 기사 쓰고 방송 출연 시키고 광고 섭외해 놓고, 그분들 모두 사기당하신거야?” 그렇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사기 당한 거다. ㅜㅜ

정찬의 말. “아니 김구라씨가 막말방송한 거 몰랐어요?" 막말 방송‘만’ 한 줄 알았다. 정신대 피해자를 윤락녀취급까지 한 지는 몰랐다. 내가 지금까지 막말 김구라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의 막말에는 그래도 금도와 역사의식이 살아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만 그랬던가?

물론 김구라를 죽을 때까지 결코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했던가? 지금 김구라처럼 자진해서 참회와 후회의 자세를 보이는 자에게 돌팔매질을 멈추지 않을 순 없는 법이다. 과거 인권침해 발언을 한 전력이 있더라도 그렇다. 세상에 과연 용서할 수 없는 죄가 무엇이 있던가?

이 혼란한 와중 김미화의 제안은 단연 돋보인다. “구라야 은퇴 하지 마라! 누나랑 손잡고 할머니들께 가자. 가서 큰절 올리고 안아드리자. 누나가 할머니들 홍보대사고 딸이다. 할머니는 어머니고, 어머니는 아들의 과거 허물 다 용서하신다. 그게 어머니 마음이다”

옳다. 정답은 김미화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 것. 인권침해를 말하는 목적이 벌 주자는 데 있어서는 안된다. 인권 침해를 말하는 목적은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아프게 반성하도록 하는데 있어야 한다. 가해자가 인권침해자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스스로 아프게 반성하는데도, 벌주자는 자의 인권은 인권이 아니라, 복수일 뿐이다.

최근의 사건을 바라보며, 그나마 마음의 위로를 얻는 것은 이제는 사회에서 책임있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반인권적 발언들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러한 성장에는 아픔도 따르는 법. 김용민과 김구라의 설화는 그런 소중한 사회를 위해 바쳐야할 우리가 치러야할 소중한 제물일지도 모른다.

2012년 4월 15일 일요일

김용민의 결단을 기대하며 써내려간 김용민 변론


인권 감수성이니 어쩌니 하는 비판에 부화뇌동하고 싶지는 않다. 그가 실제로 라이스를 강간 살인당하길 바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실제로 지하철에서 엘리베이터를 없애고 계단을 통으로 만들기 원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깐에는 웃자고 한 소리다.

 그의 웃자고 한 소리가 금도를 어긋나게 된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이른바 ‘카타르시스 커뮤니케이션’을 선호하는 우리 사회의 패거리 문화가 무관치 않다. 데이터를 합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해서 다른 사람과 접근하든가 설득하든가 하는 과정이 익숙치 않기 때문이다. 설득을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생각을 일방적으로 주장만 하면 되는 일종의 ‘배설 커뮤니케이션’에 우리 사회가 젖어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커뮤니케이션이 힘을 얻게 된다. 물론 이때, 그 서클 안에서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지지도도 오른다. 우리 정치문화가 바로 그랬다.

관타나모 캠프에서 벌어진 미군의 성폭행이 나쁘다는 건 사실 설득이 필요 없는 문제다. 그저 그 사건에 대한 그 분노를 결집하고, 해소시켜줄 풍자가 야유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김용민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게다가 분노의 번짓수도 한참 틀렸다. 라이스가 강간을 옹호하는 미 군국문화의 아이콘은 아니지 않는가?

니체는 말했다. “괴물과 맞서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동안 들여다 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 될것이다.” 오오.. 괴물과 맞서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불쌍한 자여. 김용민...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의 김용민은 이렇게 괴물이 되었었던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양심 있는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를 용서할 수 있는 것과 정치인 김용민을 허락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아파도 할 수 없다. 새누리당 석호익 후보는 “구멍” 발언이 문제가 되어, 낙마했다. 그 때 포화를 쏘아대던 통합야권이여! 김용민에게는 다른 잣대를 들이댈 것인가?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던가?

아 이러니하게도, 이런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문화를 한 단계 성숙시키고 사회의 진보를 앞당길 수 있다. 물론 아깝다. 그 제물이 이미 후보등록을 마친 김용민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김용민을 버림으로써 더 큰 진보적 가치를 쟁취해야 한다.

통 합야권과 김용민은 결단해야 한다. 사실 이런 자충수는 수구들에게서 더 빈번하다. 지금 당장 김용민이 아깝다고, 앞으로 수많은 수구들 앞에서 눈 질끈 감아야할 가련한 신세로부터 자칭 진보개혁세력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는가? 그 점은 바로 지금 그 결단의 여부에 달렸다.  만에 하나 당선된다고 해도, 통합야권은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발칙한 상상력이 뇌리를 스친다. 만약 사퇴와 함께, 노원갑 무소속의 노동자 후보에게 김용민과 통합야권의 힘을 실어준다면 어떨까? 모르긴 해도, 김용민은 더 큰 정치적 자산을 얻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차피 지금은 완주를 해도 당선은 물 건너가지 않았나? 당에 부담이나 되지.



2012년 4월 11일 수요일

같은편만 결집하는 트위터가 아니라, 다른편을 설득하는 트위터를 만들어야



같은편만 결집하는 트위터가 아니라, 다른편을 설득하는 트위터를 만들어야... 그러기 위해서는 적에게 적용한 기준을 우리 편에게도 적용하는 공정성이 필요하다...는 반성을 해본 아침이었습니다. 출처 : 김두식 ‏@kdoos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