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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30일 토요일

고은태 사건이 준 선물




“고은태 사건 같은 것을 예방하기 위해 성희롱 교육을 강화하면 어떨까?” 어떤 분이 제안을 했다. 글쎄다.. 과연 성희롱 교육으로 고은태 사건 같은 유사사건을 예방할 수 있을까?

고은태 사건은 고씨 개인에게 큰 재앙이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실보다 득이 많지 않았나? 고은태 사건보다 더 확실한 성희롱 예방교육이 어디있겠는가?



우리가 알지 못해서 그렇지, 수면아래에서 훨씬 더 황당하고 이상한 성희롱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한테 고은태 사건보다 더 확실하게 교훈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겠는가? 이 사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뭐냐고? “착각하고 들이대면 좆될 수 있다.”

그런데 뭐하러 이런 유익한 사건을 예방하나? 물론 개인적으로는 슬프고 황당할 수 있다. 특히 고씨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당사자들에게는 가혹하기까지 할 거다. 그러니 누구든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누구든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방법 중에 고은태 사건만큼 효과가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는가?
오히려 우려된다. 고은태 사건같은 걸 예방하자고 나서면, 오히려 폭로를 위축시킬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폭로할 일이 적어지면 좋다. 그걸 위해서 바로 고은태 사건은 굉장한 기여를 한 거다.

성희롱예방교육? 그런게 없어서 이런 사건이 벌어진 건 아니잖는가? 물론 없는 거보다는 낫겠지. 고은태 사건보다 더 확실한 교훈을 줄 순 없겠지만..

회사에서 1년마다 한번씩 시켜준다. 모르긴 해도 고씨도 받았을거다. 가사 받지 않았더라도 고씨같은 경우는 성희롱교육의 주체가 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갖췄다. 인권교육을 하시던 분이잖는가? 무엇보다도 고씨는 관계에서 동의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사과할 때도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무엇이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인지 잘 알고 있었다.

1년에 한번씩 꼬박꼬박 성희롱예방교육을 받는 나도 가끔씩 친구들에게 싱겁고 허튼 소리를 할 때가 있다. “사랑해”. “결혼해줘”. 심지어 결혼한 친구들에게도 가끔은 그런다. 글뿐이 아니다. 하트도 날린다. 물론 그 친구가 불쾌하라고 한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 의도와 상관없이 그 친구가 불쾌했다면, 그것도 성희롱이다.

내가 성희롱이 될 수도 있는 말을 맘 놓고 친구들에게 할 수 있었던 건, 그거 때문에 참기 힘들 정도로 불쾌함을 느끼지 않을 거라는, 농담으로 받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희롱 교육을 안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데, 만약에 나의 이런 믿음이 단지 믿음일 뿐일 때는 난 가차없이 성희롱 가해자가 되는 거다.

혹시 고씨의 경우가 이런 경우가 아니었을까? 고씨의 말이 내가 하는 것 같은 농담이었는지 아니면 진짜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고씨가 피해자를 신뢰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농담의 상대가 젊은 여자라 좀 다르다고? 오히려 지나치게 젊었기 때문에 농담이 더 유효할 수도 있지 않는가?

결국 고씨가 믿었던 여자사람이 피해자를 자처하며 고씨의 신뢰에 철퇴를 가했으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궁금증은 더해간다. 사실 피해자가 불쾌함이나 고통을 느꼈다면, 피해자에게 그 불쾌함이나 고통을 차단하고 회피할 방법이 여러 가지였을 거다. 그런데 그 피해자는 그것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거절하지도 않았다는 점은 피해자도 인정한다. 그러니 고씨로서는 피해자를 더 믿고 오해를 키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에효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여기까지 하자. 나라고 JS처럼 피해자로부터 2차가해자로 낙인찍혀 가루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

조심스럽게 내가 알고 있던 고씨를 말해본다. 덕이 높거나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피해자가 싫다고 하거나 관계를 끊으려고 할 때 피해자를 괴롭힐 사람도 아니었다. 나름 자존심도 셌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이 사건이 성희롱교육을 받지 않아서 생긴 사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건을 처음 접한 그날 아침 얘기다. 너무나 황당한 소식에 나는 잠시 고은태씨가 자작극을 하나 싶었다. 왜 그랬냐고? 만들어진 사건을 통해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있거나 너무 외로워서 관심받고 싶었구나 싶었다.

도덕과 인권의 무관함을 역설하기 위해, 인권교육을 목적으로 자신의 전인격을 재물삼아 살신상인의 자세로 자작극을 벌인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하지 않고서야 이 사건을 이해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의혹은 아직도 나에겐 유효하다.



2013년 3월 26일 화요일

고은태 사건의 피해자님께 드립니다.


피해자님. 다시한번 피해자님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피해자님께서 느끼셨을 불쾌함과 당혹스러움에 심히 공감합니다. 피해여성께서는 이 사건에 대해 매우 현명하게 대처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피해자님! 작금의 피해자님의 트윗글을 보고 있자면,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고 사죄한 후에도 피해자님의 고통이 줄어들지 않고 있고, 어떤 측면에서는 피해자님 스스로 자신을 복수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하시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까운 마음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피해자님! 피해자님께서 바라신 것은 “단지 성희롱에 대한 인정과 사과”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고은태의 사과문에는 “성희롱”이라는 단어조차 들어있지 않습니다. 클리셰인지, 변명인지, “피해자도 원하는 줄 알았다”라는 말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해자님! 이것을 가해자가 성희롱을 부인한 것으로 받아들이셔야 할까요? 피해자님의 생각처럼 가해자는 성희롱 인정만은 끝까지 피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게 도대체 뭐가 문젭니까? 지금 온나라가 가해자의 행위를 성희롱이라는 인권침해로 규정하고 가해자를 규탄하고 있습니다. 어떤 지식인은 이 규탄분위기에 다른 의견을 제시하다가 한순간에 가루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아직도 분이 덜 풀리십니까?

이 순간, 자신이 인정한 행동이 성희롱인지 아닌지, 그걸 가해자가 아느냐 모르느냐? 그게 왜 중요합니까? 피해자님에게 가해자가 아직도 그렇게 중요한 사람입니까? 피해자님께서 가해자의 선생님이 되어 가해자를 가르치고 싶으신 건 아닐 것 아닙니까?

잠수를 타서 피해자님을 “2차 가해”에 빠지게 놔두었다고요? 에효. 한순간 자신의 행위를 인정함으로써 전 인격과 명예, 그리고 가정을 박살낸 가해자입니다. 그에게 이 순간 피해자님이 주장하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원하시는 겁니까? 피해자님을 2차가해에 빠지지 않도록 말입니까?

피해자님. 2차 가해와 관련해서 위로가 되실지 모르겠지만 유시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유주의자는 부당한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며 집단의 위세 앞에 주눅들지 않는다. 술자리의 안주감으로 씹히고 괘씸죄로 걸려도 어쩔 수 없다. 어느 시대든 신조를 지키는데는 언제나 비용이 따르는 법이 아니겠는가?”

피해자님께서는 부당한 권위에 항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깟 집단의 위세 앞에 주눅들어 “2차 가해”를 말씀하십니까? 이 정도 집단의 위세 앞에 주눅들 정도면 그 “거물”의 부당한 권위에는 어떻게 항거하셨습니까? 유시민의 말처럼 “어느 시대든 신조를 지키는 데는 비용이 따릅니다.” 시대의 선구자이신 피해자님에게 어떻게 비용이 따를 수 없겠습니까? 그냥 담담하게 그 선구자로서의 비용에 직면하시면 안되겠습니까?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와 우리 시민여성사회는 피해자님께서 그 비용을 혼자 짊어지지 않도록 지원할 것임을 저는 믿어마지 않습니다. 이제는 복수심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해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피해자님께서는 처음 직면한 이 전대미문의 사태에 당황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시는게 당연합니다. 더구나 “오로지 혼자이며 혼자 판단하고”계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도움을 주시는 분들과 상의하신 후” 부디 복수심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 고통과 불쾌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시길 바랍니다.
거물 가해자의 부당한 행동에 항거하신 피해자의 용기에 다시 한번 찬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2013년 3월 25일 월요일

국회의원은 과연 유권자의 대변인이어야 하나?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미안하다. 국회의원은 유권자, 혹은 국민의 대변인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 헌법에 따르면 아니다. 헌법은 국회의원으로 하여금, 국민의 대변인으로서가 아니라,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헌법 제46조 제2항) 따라서, 국회의원이 보기에, 국민의 민의가 국가 이익을 거스른다고 생각한다면, 국민의 민의보다,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직무를 행해야 한다. 

대의제란 국민 개개인의 개별적 이해관계에 따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경험적 의사’가 국가의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국민 전체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객관적으로 추정되는 ‘추정적 의사’가 국가의사가 될 수 있도록 이를 대표할 대표자를 선출하고 그 대표자로 국가의사나 국가정책을 결정하게 하는 통치원리이다.

물론 국가의사와 국민의사가 일치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이상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대의제는 이들 양자가 일체되어야 함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양자의 불일치를 전제로, 대표자의 국가의사결정이 전체국민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되도록 하는데 있다.

시에예스는 이렇게 말했다. “경험적인 국민의사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대의기관의 의사만이 진정한 국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에서 대의란 국민의 의사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대의기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국가의사를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의 대표자인 대의기관의 담당자는 이미 존재하는 국민의사를 확인하여 그것을 표시하지 않는다. 국민의사는 대표자에 의하여 비로소 국가의사로 형성되고 표시되는 것이다.

이러한 대의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 헌법은 의원의 면책특권을 인정하고 국민소환제를 부인함으로써 무기속위임을 보장한다.

선 거철에 자기 지역을 위해 이것저것을 해주겠다고 공약하는 국회의원들이 많다. 그 공약을 성실히 이행하는 사람도 있긴하다. 그러나, 그것은 국회의원의 직무라기 보다는 국회의원 당선을 위한 일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약이라기 보다는 사약이라고 함이 옳다.

우 리는 이런 사람들을 더 조심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직무를 행해야 할 헌법상 의무보다는 자신이 보다 오랫동안 국회의원을 하기 위해, 국회의원의 직을 이용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당문화를 지닌 우리나라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여진다.

헌법 제46조 제2항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국군해외파병이나 FTA와 같은 국가 정책 결정과 관련되어서이다. 자신의 양심이 평화주의자라서, 국군의 해외파병을 소신에 따라 반대하는 국회의원이 있다 치자. 그렇더라도, 이 국회의원은 직무를 행함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의 양심을 접고, 오로지 국익과 관련하여서만 판단하여야 하다. 무엇이 국익에 보탬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별론으로 하자. 자신의 소신에도 불구하고 해외파병이 국익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방면으로 직무를 행해야 한다. 맘에 안들어도 어쩔 수 없다. 그게 헌법이고, 그게 대의제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자신의 소신을 접고 국익을 선택할 국회의원이 몇 명이나 될까?

이 렇게 국회의원이 민의의 대변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국회의원을 더욱 잘 뽑아야 한다. 자신의 소신과 국익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민의와 국익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곤란하다. 일단 뽑고 나서는 4년동안, 그 사람의 국익에 대한 판단을 무턱대고 믿고 신뢰하는 수밖에 유권자로서는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니, 누구를 뽑을지 고민되는가? 하긴 선거철에 “저는 지역이나 국가의 민의가 국익과 충돌할 때에는 헌법에 따라 국익을 우선하여 직무를 행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국회의원 후보는 아직 보지 못했다.

이렇게 죄다 자격미달일 때에는 그나마 덜 나쁜 놈을 골라 뽑는 것이 상책이다.

혹시, 국회의원이 국민의 대변인이 아닌 게 심정적으로 영 못마땅한가? 못마땅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게 우리 헌법이다. 불완전하지만, 역사 발전의 흐름에 따라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다.



2013년 3월 24일 일요일

누가 사유재산제도와 자본주의를 헌법적 가치라고 하는가?

부동산 가격이 다소 안정된 지금은 쏙 들어간 얘기다. 한 때 한나라당 홍준표의원이 “성인 한 사람이 집을 두 채 이상 갖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준비한다고 알려져서 큰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홍 의원은 “1가구 1주택이나 1인 1주택까지도 보유세를 강화하는 것은 있는 자의 것을 뺏어서 없는 자에게 주겠다는 이것은 그야말로 사회주의적 발상에 다름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동산 세제 개편도 같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쯤되면 누구나 예상했겠지만, 뻔한 비판이 빗발쳤다.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 “재산권 침해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위헌시비였다.

물론 사유재산제도는 자본주의국가의 3요소 중 하나이긴 하다. 또한 소유권절대의 원칙은 “근대” 민법의 3대원칙 중 하나이기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금 “근대”에 머물러있지 않다. ‘자본주의’가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 헌법 가치도 아니다. 아니, 우리나라헌법이 자본주의를 채택한 적도 없다. 헌법에 적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곧 자본주의나 시장경제질서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우리나라 헌법이 지향하는 것은 현대사회국가다. 자본주의도 현대사회국가의 틀 안에서만 운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 헌법은 제헌헌법 이래 현행헌법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사회국가조항’을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행헌법은 전문에서 사회정의의 실현과 기회균등,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 등을 규정하였다. 제31조 이하에서는 사회적 기본권을, 제119조 이하에서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를 규정하는 등 우리나라가 “사회국가”임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도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질서가 헌법질서인양 착각하고 있는 걸까? 그것은 근대입헌주의적 습관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유재산제도와 소유권절대의 원칙이 헌법적 가치이던 시절은 근대입헌주의헌법 시절의 얘기다.

권력분립과 기본권 보장은 근대입헌주의 헌법의 핵심요소였다. 당시 국가의 주된 임무는 국민의 자유보장이었고, 이를 위하여 국가권력은 최소한으로 제한된 범위내에서만 인정되는 제한정부였으며, 이러한 국가권력행사의 범위와 한계에 관한 근거규범이 근대입헌주의적 의미의 헌법이다.

근대입헌주의 국가의 경우 국가가 보장하는 기본권의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것과는 질과 양을 달리하는 특수한 것이었다. 국가의 기본권보장의무의 핵심은 사회적 다수를 구성하는 무산자들로부터 사회적 소수자인 유산자의 재산적 권리를 법의 이름으로 보장해주는 것에 있었다. 따라서 시민적 자유로서 신체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이 중요시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시되는 것은 재산권과 경제적 자유의 절대적 보장이었다(김종철, 고시계 2000.10호 참조)

근대입헌주의적 헌법 하에서의 평등권은 개인간의 기회불균형마저도 개인책임주의에 환원하여 제도적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 반면, 현대사회국가의 헌법은 모든 사람은 사회적 지위와 능력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실질적 평등의 실현을 기초원리로 한다.

현대사회국가의 헌법은 모든 인간의 지위와 능력이 동등하다는 추상적 인간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능력이 상이하다는 구체적 인간상을 전제로 하여 절대적 평등이 아닌 상대적 평등, 실질적 평등의 달성을 추구한다.

물론 현대사회국가라고 해서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마구 침해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래서 헌법도 말하고 있다.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 바꿔말한다. 법률로 정한다면, 재산권도 제한될 수 있다.

홍 의원이 구상했던 “성인 한 사람이 집을 두 채 이상 갖지 못하게 하는” 법안의 배경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홍 의원의 헌법이 매우 편리하고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재산권이 법률에 의해서 제한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홍 의원에 따르면, 부자에게 높은 세금을 과세하는 것은 “있는 자의 것을 뺏어서 없는 자에게 주겠다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랜다. 홍 의원이 생각하는 “사회주의”가 도대체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나라 헌법에 혹시 “사회주의적 발상”을 배격한다는 말이라도 있던가? 혹시 홍 의원의 생각이야 말로, 근대입헌주의적 발상은 아니었을까?

이것만은 분명하다. 시장의 지배는 “지향”해야 할 것이 아니다. 방지해야 할 일이다. 내 얘기가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의 목소리다. 우리나라 헌법은 현대사회국가를 지향하고 있고,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제2항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2013년 3월 22일 금요일

착각이라는 죄. 고은태를 논한다.


먼저 피해여성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성희롱이 맞다. 인권침해다. 피해여성께서 느끼셨을 불쾌함과 당혹스러움에 심히 공감한다. 피해여성께서는 이 사건에 대해 매우 현명하게 대처하셨다고 생각한다. 부디 하루 빨리 그 고통에서 벗어나시길 바란다. 같은 남성으로서 사죄한다.
고은태를 편들어줄 생각은 없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두 번 만난 그는 까칠했다. 재수없었다. 게다가 그는 양아치스러웠다. 나에게 양야치스러움이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함을 뜻한다.

그러나 오늘 아침. 고은태가 겪고 있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목격한 나는 왠지 불편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도대체 그는 무슨 죄를 지은 걸까?

옳다. 그는 유부남이다. 불륜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대해 비난할 수 있는 지분이 없다. 그에 대한 비난은 그의 처와 가족의 몫으로 남겨두자. 피해자와 우리는 그의 도덕선생님이 아니다.

감히 20살이나 어린 사람한테 어떻게 그러냐고? 미안하지만, 남자라는 동물들은 그런 욕망을 마음속에서 늘 달래며 산다. 그게 다 완전하지 않은 결점투성이 인간인 탓이다. 어쩌랴? 나 또한 그러한 것을. 그러나 욕망과 본능이 죄인가? 아니다. 욕망과 본능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런 욕망이 없는 자여! 고은태에게 돌을 던질지어다.

취향이 엽기적이라고? 하긴 그가 한 것으로 알려진 멘트가 좀 노골적이고 엽기적이긴 하다. 그러나 어쩌랴? 그걸 꿈꾸는게 결점투성이 인간인 것을? 남과 다른 것을 꿈꾸는게 죄가 될 순 없다.

남을 비판하고 사회정의를 외치는 사람에겐 일반인 이상의 도덕과 윤리가 요구된다고? 미안하지만, 성인군자만이 사회정의를 외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완전하지 않은 결점투성이 인간들이고, 사회정의는 누구나 외칠 수 있다.

그가 성희롱을 위해서 권력을 이용했다고?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데 있어서 권력을 이용했다는 어떤 징후도 나는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그의 그런 행동이 폭로되는데 그의 권력이 도움이 되었다는 게 옳지 않을까?

부적절하고 부도덕한 행동이 결코 용서받지 못할 변태짓으로 전환된 지점은 “착각”에 있었다. 그렇다. 그는 착각했다. “상대방도 그런 대화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권력자”의 착각은 여러모로 위험했다.

불편하게 들리겠지만, 이 “착각”을 뺀다면, 그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인권적이다. 그는 인권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남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인권의 시각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관계에 있어 동의의 중요성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자유로웠다. 게다가 “착각”까지 했다.

적어도 인권에 대해 일관적인 그는 “착각”의 책임과 대가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했다.

착각의 대가 치곤 지금 그가 치러야 할 것이 너무 크다. 한 때 피해여성으로부터 권력자로 받아들여지던 그는 지금 선정적 소재를 사냥하는 언론과 네티즌들에 대해 스스로를 보호하기 어려운 약자가 되었다.

물론 착각이 알리바이가 될 수는 없다. 더구나 그의 착각으로 인해 한 여성이 너무나 큰 고통을 겼었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리고 착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지금 고은태의 착각에 분노하기 보다는 지금까지 고은태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지나친 기대와 한 결점많은 인간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대”의 폭력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결점 많은 한 인간을 자신의 주관적인 기대라는 잣대 속에 가둬놓고, 그 잣대 밖으로 벗어났을 때, 분기탱천하는 건 얼마나 폭력적인지? 그 폭력성은 지금 공공의 적이 된 고은태와 네티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분모가 아닐까?

아무리 훈련받은 인권쟁이라도, 한순간 긴장을 늦추면 인권침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인권을 공부하면서,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인권침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고착된 것이 아니라 관계에 따라 변화한다. 그리고 결점투성이인 우리는 누구나 언제든지 인권침해자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