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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28일 화요일

법률가 박민식 의원의 천박한 법철학


1. 흉기는 들고 오셨나요?
2. 물건만 훔치러 오셨나요?
3. 그냥 도망치실 건가요?
4. 몇살이세요?
5. 혹시 어디 아픈 곳 있어요?

이를 물어보고
제압하거나 방위행위를 해야
정당방위로 인정 받는 것 아니냐?

국회 법제사법위원인
새누리당 박민식 의원의 질문이다.

문제의 집주인이 어떤 짓을 했는지
퍈결문을 통해 한번 톺아보자


서랍장을 뒤지며 절취품을 물색하던
피해자 ***을 발견하고는
“당신 누구야?”라고 말한 뒤,

피해자에게 다가가
주먹으로 피해자의 얼굴을
수 회 때려 넘어뜨리고,

피해자가 넘어진 상태에서도
계속하여 도망을 하려 하자

피해자가 팔로 감싸고 있던
뒤통수를 수 회 차고,

뒤이어 빨래 건조대를 집어들고
피해자의 등 부분을 수 회 때린 뒤,

피고인의 허리에 차고 있던 벨트를 풀어
피해자의 등 부분을 수 회 때렸다.

박민식의원 말인 즉,

흉기를 들고 왔는지 모르면,
이런 짓을 해도 된다는 거다.

물건만 훔치러 온 게 아니라
가족을 해칠지 모르면,
이런 짓을 해도 된다는 거다.

그냥 도망칠 것 예상할 수 없으면,
이런 짓을 해도 된다는 거다.

도둑이 몇살인지 모르면,
이런 짓을 해도 된다는 거다.

박민식의원은 이런 짓들이
과연 방위의 의사로 한 짓들로 보이는가?
침해의 의사의 산물로 보이는가?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 반격을 한다!"
"'이 시키 잘 걸렸다 너도 한 번 죽어봐라"

집주인의 행위가
과연 이 중 어떤 의사의 산물인가?

박민식의원 왈
 "도둑 뇌사 사건은
대한민국의 법 역사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라며
법이 누구의 편인지 알려주는 사건"이랜다.


이렇게 법이 누구의 편이어야 한다는
박민식의원의 사고 자체가 천박하고 유치하다

절취의 의사로 절취품을 물색하러 가택에 침입한 자는
어떤 잔인한 복수를 당해도 싸다는 것이
박민식 의원의 법철학인가?

그렇다. 법은 피해자의 편이어야 한다.
그러나, 가해자 피해자 관계는
일면적이지 않고 총체적이며,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해간다.

남의 집에 침입하여
절취품을 물색하는 행위에 대한 피해자?
물론 집주인이다.

그러나, 집주인이
침해의 의사 내지 복수의 의사로
사적형벌을 가한 순간부터
피해자는 침입자다.

단순히 도둑의 인권이 아니라,
피해자 인권을 말해야 하는 이유다.

법은 범법자의 행위를 처벌할 뿐
그의 인격은 처벌 불가능한 권리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법이 누구의 편 식의
얄팍한 법철학을 가지고 있는 자가
대한민국의 검사였으며, 지금 국회 법사위원이라는 것..

이거야 말로
우리 법 역사에
아주 중요한 사건 아닐까?
 

2014년 10월 25일 토요일

도둑을 때린 것이 정당방위가 아니라는 판결이 불합리하다고 볼 수 없는 이유



도둑을 때려서 뇌사상태로 빠지게 한 사람. 그에 대해 실형을 선고한 것을 두고, 어제 하루종일 시끄러웠다. 법이 잘못되었다는 사람도 있고, 판결이 잘못되었다는 사람도 있다. 도둑 무서워서 살겠냐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 도둑을 때린 죄로 실형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법과 판결을 성토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조차, 이 사건의 자세한 사건의 내막을 잘 알지는 못한다. 사건을 판단하는데 주어진 정보는 제한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둑을 때려서 실형을 살게 된 사람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것은 혹시 우리 안에 도둑은 때려도 괜찮다는 의식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나 또한 그러하다.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다. 다만, 신문기사를 통해 알수 있는 주어진 정보들을 취합해서, 여러가지 가능성들을 타진해보기로 했다.

    지난 3월8일 새벽 3시15분께다. 원주시에서 집에 귀가한 최모(21)씨. 누군가가 거실 서랍장을 뒤지는 것을 발견하고, 순간 도둑임을 직감하고 격투 끝에 몰래 집으로 들어온 김모(55)씨를 제압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 과정에서 최씨는 도둑의 머리 부위를 발로 여러차례 차고 알루미늄 빨래 건조대로 등 부분을 수차례 내리쳤다. 하지만 이로인해 도둑은 의식을 잃어 응급실로 후송돼 5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일단, 시간이 눈에 들어온다. 새벽 3시15분. 야간이다.

이 시간이 중요한 이유는 형법제21조 3항 탓이다. 이 조항은 과잉방위가 야간 기타 불안스러운 상태하에서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으로 인한 때에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야간인 것은 틀림없어서, 형법제21조3항이 적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는데, 이 사건 판결을 볼 때,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과 관계없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점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최 모씨가 수사기관에서 조서를 작성할 때가 중요하다. 최모씨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양심에 거스르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개연성이 크고, 이에 따라,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설명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모씨가 당시 자신의 심리상태를 설명하면서, 만약 자신의 상태를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과 관련없이) 침착했던 것으로 진술하거나, 침착한 상태였다고 확신케할만한 정보를 제공한 사실이 있다면? 형법 제21조3항의 적용은 물 건너 간 거다.

둘째, "도둑"이 눈에 들어온다.

강도가 아니라는 거다. 사실 절도는 순수재산범이다 그런데도, 보통의 경제범과는 심하게 다르게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피해액이 훨씬 큰 배임, 횡령, 사기에 비하자면 더더욱 그러하다. 일단 사건을 강력사건으로 분류할 뿐만 아니라, 세간의 인식도 강도와 크게 다름없이 보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강도로 발전할 위험이 크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 같은데, 강도로 발전하지 않은 이상, 도둑은 그냥 도둑이다. 게다가 이 사건 도둑은 흉기조차 소지하지 않은 순수한 도둑인 것으로 알려졌다.

    "법이 정의를 추구하는 공정함에 무게를 두기 보다는 그저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기득권층의 도구로 쓰이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법은 의외로 기득권층의 폭력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지만 피지배계층 국민들의 폭력에 대해서는 매우 엄정하다"

파워트위트리안인 김빙삼 옹께서 이 사건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나는 의심한다. 도둑을 일반적인 경제범과 다르게 취급하거나 도둑에게 지나친 공포심을 가지는 것이야 말로,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기득권층의 도구로서의 법과 관계가 깊지 않는가? 실로 공정한 사회라면, 도둑이든, 배임이든, 사기든, 똑같이 취급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셋째, 격투 끝에 몰래 집으로 들어온 도둑을 제압해 경찰에 신고하셨단다.

물론, 그 도둑? 현행범이다. 그리고, 현행범인은 누구든지 영장없이 체포할 수 있다. (형사소송법 212조) 또한 최씨처럼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리 아닌 자가 현행범인을 체포한 때에는 즉시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리에게 인도하면 된다 (형사소송법 213조) 최모씨는 수사기관에 인도할 생각으로 직접 체포를 시도한 듯 보인다.

문제는 그 체포과정에서 불필요하게 지나친 폭력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자신이나 가족의 신체의 실체적인 위협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폭력은 제압과 체포에 꼭 필요한 정도에 그쳤어야 했다. 만약 쓰러진 도둑의 머리부위를 발로 여러차례 찼거나, 불필요하게 도구를 사용하였다면, 그것은 "폭행"에 해당한다.

만약 최씨의 조서에서 최씨가 방위의사를 확인할 수 없고 체포의사만 드러냈다 치자. 만약 추후 방위의사를 드러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관적이지 않고, 변호사의 조언을 받은 이후에 말이 바뀐 것이라면, 당시 최씨에게는 방위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판사가 믿는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니다. 이래서 변호사의 조언은 처음부터 받아야 한다. 변호사가 오기 전에는 묵비권을 행사해야 할 이유다.




경찰수사단계에서의 정당방위 8가지 기준이라는게 세간의 조롱과 함께 돌아다닌다. 이 8가지 기준이라는거? 경찰 '내부' 지침이다. 수사시에 정당방위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검찰과 법원에서 판단하게 하라는 의미다. 하지만, 경찰이 체포를 할 때, 당할 수 있는 폭력을 제압할 때 준수할 지침의 성격도 강하다고 보여진다. 도망가는 범인의 등에 총을 쏘지는 말라는 거다.

법조문에서는 정당방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

(1) 현재의 부당한 침해가 있을 것,
(2) 자기와 타인의 법익을 방위하기 위한 행위일 것,
(3)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것

법이 이렇게 정당방위의 요건을 엄격하게 제한하는데는 특별한 이유와 법치주의의 철학이 담겨있다. 법치사회에서 사형(私刑, 사적형벌)이나 복수는 금지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정당방위가 자칫 사형이나 복수의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선빵을 자기 폭력의 알리바이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거다. 상대방의 선빵은 자신의 폭력범죄를 유발한 동기로서, 형량에 참작할 인자가 될 수는 있을 지언정.. 자신의 위법행위에 대한 면허가 될 순 결코 없다.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나 강도를 발견하였는가?  가능하다면 퇴로를 차단하고 지체없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최선이다. 만약 직접 체포가 필요하다면, 최소한의 폭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할 자신이 있을 때만 직접체포를 감행하여야 한다.

만약 현행범을 직접 체포한답시고, 오로지 체포와 제압을 목적으로 물불가리지 않다가는 이처럼 법의 처벌을 피할 길이 없다는 거. 이번 사건이 주는 큰 교훈이다. 현행범에 대해 우리에게 허락된건 폭행이 아니라 체포 뿐이다.


2014년 10월 24일 금요일

경비아저씨들. 결국 짤라야 하나.. 입주자대표의 고민.


내가 사는 아파트의
장기수선충당금 사정이 별로 좋지 않다.
1개동당 1억3천만원 가량 비축되어 있는데..
이 금액이 현실에 비해 턱도 없다.

내년엔 외벽의 트랙을 보수하고,
외벽과 복도 페인트칠도 새로 해야 하는데,
여기에 드는 돈이
한 동당 3500만원 (추정)

엘리베이터도 20년 정도 지나서
내구연한이 지난지 오래고,
안전문제와 보수비용을 감안하자면 교체해야 마땅한데,
이를 모두 교체하는데 드는 비용만 대당 4000만원선
한 동에 두대씩이니, 한동당 8000만원 (추정)

지금 보유한 장기수선충당금으로는
장기수선계획은 커녕..
당장 시급한 보수도 해결하지 못할 지경..

아파트 주민들 부담을 고려해서
각 세대로 부터 매달 걷는 장충금을
오랜 기간 8000원선에서 묶어놨던 게 화근이다.

올해 겨우 12,000원으로 올렸는데,
내년엔 20000원, 후년엔 30000원으로 올려야 할 판이고,
시급히 지출해야 하는 금액을 감안하자면,
이렇게 짜놓은 인상시기도 앞당겨야 할 판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입주자 부담을
어떻게 최소화하여야
할 것인지 하는 점.

결국
일반관리비와 경비비를 줄이는 것이
장충금인상으로 늘어난 입주자 부담을
최소화하는 길인데..

가슴 아픈 일은 그 과정에서
경비아저씨들이 희생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점이다.

박봉에 시달려온
우리 아파트
경비아저씨들.

내년부터는
최저임금적용유예가 끝나서
경비아저씨들에게도
최저임금이 적용된단다.

올해까지는 여느 아파트처럼
휴게시간을 제멋대로 부여하는 꼼수를 부려서..
월급을 억지로 맞춰왔던 것 같은데..

내년에 내가 재선하게 된다면,
내 손으로 그런 불합리를
그렇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당연히 경비비의 부담이
훨씬 늘어날수 밖에 없는데..
아! 결국 방법은
구조조정 뿐인가?

아파트의 사정과
주민들의 부담을 생각하자니
구조조정밖에 답이 없고..
경비아저씨들 생각하자니..
죄송하고 가슴이 아프다.

솔직히 이 분들께
범죄예방의 기능은
사실상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아저씨들 탓이 아니라,
우리 아파트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생긴 문제인데,
이 아저씨들의 주업무는
택배수령과 재활용품 분리작업.

만약 이 분들을 내쫓자면,
경비아저씨가 매주 담당해오던
재활용분리수거작업을
각 세대가 돌아가며 직접 해야한다.
2년에 한번꼴로 차례가 돌아온다.

무인택배수거함을 만들거나.
택배수령시스템도 다시 짜야 한다.



지금까지는
장기집권하던 기존 동대표들을 견제하느라,
이런 것을 신경쓸 틈도 없었다.

만약 내가 내년에 재선되어
한번더 봉사할 기회가 주어지고
새로운 입대의가 구성되면..
이 문제와 관련한
공청회부터 해야 할 듯하다.

과연 주민들의
선택은 무엇일까?

인상된 장충금을 포함하여
지금보다 세대당 2만원이 넘는
관리비 인상분을 감당할 것인가?

아니면, 경비아저씨가
안계시게 됨으로써
겪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것인가?

2014년 10월 20일 월요일

가정폭력의심사건 신고후기




일요일 아침, 나를 깨운 것은 어느 남자의 폭언이었다.

"씨팔뇬아" 우당탕탕~!

아래 층 쪽이었다. 놀래서 일어나 침대에 앉았는데.. 점시 멈췄던 폭언과 물건던지는 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그만하나 싶으면, 또 이어지고 그만 하나 싶으면 또 이어졌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아마도 아래층쪽에  분노조절에 애로가 계신 분이 이사온 모양이다.

내려가서 경비아저씨를 모시고 올라왔다. 바로 아랫집인 듯 했다. 현관문이 열려있었다. 건장한 체격의 중년남자가 부서진 가재도구를 복도로 내놓고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별일 아닙니다."

남자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뭔가를 더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경비아저씨를 내려보내고, 다시 집으로 올라왔다. 이제는 멈추겠지. 그런데, 잠시 후, 또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우당탕탕~! 씨팔뇬아"

다시 뛰어내려갔다. 조용하다. 그놈의 폭언소리는 내가 내려만가면 멈춰졌다. 아까 그 집이 맞긴 맞는걸까? 그 옆집 벨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동대푭니다~"

그 댁의 아주머니가 문을 열었다.

"소리나는 곳이 옆집 맞나요?"

"... 7시반부터 "

조용한 대답에는 우려와 짜증이 섞여있었다.  핸드폰시계를 보니 10시다.  집에 다시 올라왔다. 이를 어쩌나. 텔레그램 친구에게 이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다.

"뭐해? 언능 112 신고해~" "가정폭력방지법이 있으니 경찰에 집에 진입할 거야" "언능 전화해! 112"

"국가공권력 그럴 때 써먹으라고 세금내는 거야." "  빨리" "그러다가 누구하나 죽으면 어떻게 하려구"

"지금 경찰이 진입해서 그 상황을 종료시키는 게 가장 근선무"

텔레그램을 나누던 중, 또 온동네가 떠나가게 욕소리가 들렸다.

"야~ 이 씨발뇬아~"

112로 SMS 문자를 쳤다.

"저기요, 경찰이죠? 밑집에서 부부싸움을 하는데요.. 아니 부부싸움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를 잡는 것 같은데요"

"아침부터 지금까지 물건던지는 소리, 욕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답문이 왔다.

"정확한 위치를 말씀해주세요" "^%$#동 ^%$# 아파트인데요"

"저는 1234호 사는데, 소리는 1134호쯤으로 추정됩니다."

"몇 호인지는 모르시나요?" "저희 밑집 1134호 같습니다. "

"경찰관 출동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채 10분도 지나지않아, 핸드폰이 울렸다.

"경찰관입니다~ 현장에 왔는데요, 지금은 진정이 된 거죠?"

"아! 경찰관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내려갈게요."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갔다. 경찰관 두명이 문제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이 집이 맞습니까?" "네"

탕탕탕.. "경찰관입니다. 문좀 열어보세요. "

안에서는 침묵만이 흘렀다.


다른 경찰관은 복도에 내놓여있는 부서진 가재도구를 살펴보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내가 들은 소리를 경찰관에게 설명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현관문을 열고 여자가 나왔다.

"무슨 일 있습니까?"

"별일 아닙니다."

"잠시 나와보세요."

출동한 경찰관은 능숙했다. 여자는 나왔고, 현관문이 닫혔다. 밖으로 나온 여자는 생각보다 어려보였다. 연신 침착하고 차분하면서도 단호히 "별일 아니라"고 얘기하던 여자의 목소리.

별일 아니라는 말에도 경찰은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최선을 다해 상황을 파악해보려는 마음이 읽혔다.

"몇 살이에요?" "열 일곱살이요."

어휴, 고등학생이다. 예뻤다. 이 집 딸인 듯 했다. 대답이 되풀이 될 때마다 목소리는 점점 잠겨왔다. 눈가엔 울음을 참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곧 현관문을 열고 남자가 나왔다. 현관문 밖에서 경찰관이 돌아가지 않고, 딸과 오랫동안 얘기하는게 불안했었을까? 남자는 술에 취해있었다. 이마에 빨간 생채기가 나 있었다. 남자는 말했다.

"아니 성질이 나면 내 집에서 소리도 지를 수 있고 그런거지. 도대체 누가 신고를 했답니까?"

경찰관 뒤에 있던 내가 답했다. "이 아파트 동대표인데요, 내가 신고했습니다. "

남자는 이게 신고할 일이냐며 나에게 따지고 들었다. 경찰관은 나에게 올라가라고 손짓했다. 불필요한 다툼을 막으려는 듯 보였다. 집으로 올라왔다.


애써 울음을 참으며 잠긴 목소리로 "별일 아니라"고 말하는 애띤 여고생이 눈에 밟혔다. 출동한 경찰관에게 문자를 쳤다.

"경찰관님. 혹시 가내에 진입해서 내부 사람들 안전을 확인하는 건 법적으로 어려운 일인가요?"

15분쯤 후, 답문이 왔다.

"안쪽의 상황은 확인하였고, 딸도 이상없다고 하여 한번 더 주의를 주었습니다.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있을 경우 다시 한번더 신고해주세요."

"네 고맙습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

경찰관은 능숙하고 유능해보였다. 아마도, 남자와 얘기를 하다, 동의를 얻고 집에 들어가 확인을 한 듯 했다.



경찰관이 돌아간 후 30분쯤 되었을까?

또 욕설이 들린다. 이제 대놓고 베란다에서서 창 밖으로 욕설을 울부짖는다. 답이 없는 이웃이다.

"씨팔뇬 새끼.. "

도대체 저 남자의 분노는 무엇 때문인 걸까? 저렇다고 분노가 해결될 리는 없는데..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는데 애로가 있는 남자, 저 안에서 또 공포에 떨고 있을 가족들.. 욕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쓸어내려야할 우리 아파트 주민들.. 아까 출동한 경찰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지금 베란다에 서서 창밖으로 온동네가 떠나가게 '씨팔뇬' 소리지르고 있는데요..  처벌이 무겁지 않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경범죄처벌법 위반 범칙금 스티커라도 발부하시면 안되겠습니까? 소란죄나? 불안감유발 조항에 해당되지 않겠습니까? "

경찰관은 침착했다.

"가능하긴 합니다만, 신고하신 분이 동대표님인 거 저 사람이 아는데요, 이웃간에 앙심을 품을 수도 있고요, 더 큰 다툼이 생길수도 있고요. 제가 한번 다시 가서 주의를 주겠습니다."

"에효, 제가 다른 주민들이 피해보는 거 보고만 있을 순 없잖습니까? 전 괜찮고요. 하여간 여러차례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경찰관님."

잠시 후 경찰차가 한번더 다녀간 이후에야, 아래집은 조용해졌다.



오늘 회사에 있는데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여자경찰이었다. 여성계라고 했다.

"험한 소리가 이번이 처음인지, 자주 났었는지.. " 이것저것을 캐물었다. 현장출동경찰관을 통해서도 상황을 다시 파악하시겠단다. 여자경찰관이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런 일이 밑집에서 또 발생하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 때마다 신고해달라고.

가정폭력 의심사건은 현장경찰관이 상황종료하더라도, 입건여부와 무관하게 관할서 여성계에서 주시하면서 관리하는 모양이었다. 나름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있는 것 같았다. 이처럼 경찰의 대응이 믿음직한 경우가 나에겐 처음이었다.






2014년 10월 14일 화요일

자본이 시민불복종운동을? 카카오톡의 영장불응선언



다음카카오가
감청영장 불응을 선언했다.

텔레그램의 망명이 느는 가운데,
상장 예정일 직전에 이뤄진 선언.

영장집행에 불응하겠다는 건,
법질서에 대한
일종의 불복종선언이다.

네이버 사회학사전은
시민 불복종에 대해
특정한 법률의 의심스러운 비정당성이나
도덕적 정당화의 결핍에 대해
공공의 관심을 모으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고의로 법률을 위반하는 공공연한 행위라고 말한다.

처벌을 감수하고,
비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저항권과 구별된다.

간디의 불복종이 그 시초다.

군대 대신에 감옥을 택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행위 또한
불복종운동에 속한다.

법률의 비정당성이나
도덕적 정당화의 결핍이 의심되는 마당에
기업의 대표자가
법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고객의 정보를 보호하겠다는 거?

평상시라면 가상한 일이다.

그런데, 상장 직전에 이뤄진
울며겨자먹기식의 불복종선언.
여기에 과연
어떤 사명감이 숨어있을 지.

법 질서까지 불복종하게 만드는 그들의 결단이
부디 자본의 논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고객의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명감에서
출발하기 바라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인가?

부당한 법질서를 바로잡아
인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일.

시민의 저항으로는 불가능했던 그 일이..
자본의 논리로 한순간에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점은
개운치 않다.

오! 법질서 마저 무능화시킬 수 있는
위대한 자본의 힘이여!

투표로 정치인을 잘 뽑는 거보다
소비자 운동을 통해
기업과 자본을 지배하는 것.

이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어쩌면, 그게 더 현실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거.
카카오톡의 선언이 깨우친 교훈이다.


ps.

바보.
나같으면
서버를 압수수색이 불가능한 외국으로
옮기겠다고 선언하겠다.


2014년 10월 2일 목요일

서북청년단의 만행백태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 강매


당초 서청은
민간인 자격으로 제주도에 들어왔다.
처음엔 주로 엿장수를 하다가
점차 세력이 커지자
이승만의 사진과 태극기를 강매했다.
4. 3이 발발하자 서청은
경찰로 또는 군인으로 옷을 바꿔입었다.
과거에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를
사지 않았던 사람들은 총살되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말 태우기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그 위에 태워 빙빙 돌게 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뺨 때리기


또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을 때리도록 했다.
머뭇거리거나 살살 때리면
곧 무자비한 구타가 가해졌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오라리, 고은

제주도 토벌대원 셋이 한동안 심심했다
담배꽁초를 던졌다
침 뱉었다
오라리 마을
잡힌 노인 임차순 옹을 불러냈다 영감 나와
손자 임경표를 불러냈다 너 나와
할아버지 따귀 갈겨봐
손자는 불응했다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경표야 날 때려라 어서 때려라
손자가 할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세게 때려 이새끼야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세게 때렸다
영감 손자 때려봐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때렸다
영감이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다
이놈의 빨갱이 노인아
쎄게 쳐
세게 쳤다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손자
울면서
서로 따귀를 쳤다
빨갱이 할아버지가
빨갱이 손자를 치고
빨갱이 손자가
빨갱이 할아버지를 쳤다
이게 바로 빨갱이의 놀이다 봐라
그 뒤 총소리가 났다
할아버지 임차순과
손자 임경표
더 이상
서로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
총소리 뒤
제주도 가마귀들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다


총살박수치게하기


심지어는 총살에 앞서
총살자 가족들을 앞에 세워놓고
자기 부모형제가 총에 맞아 쓰러질 때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표선면 가시리 안공림 씨(58)는
여덟 살 때 총살장에서 박수를 쳤던
끔찍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너무도 끔찍해 눈을 뜰 수도 없었지만
벌벌 떨며 박수를 쳐야 했다" 고 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초토화작전


10월 5일 중앙정부는
제주도 출신으로
그간 온건책을 지향해온 경찰청장을 사퇴시키고
강성 인물을 새 경찰청장에 임명했다.
이어 경비대 총사령부는
10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병력을 증파했다.
10월 17일에는
제주도 주둔 9연대장의
포고가 발포되었다.
포고문은
해안선에서 5km 이외 지점의
통행금지를 명하면서
이를 어길 경우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주도의 지형상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지점'은
특정한 산악지역이 아니다.
해변마을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들이
이에 해당한다.
중산간에서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발포하겠다는
무시무시한 작전이 수립된 것이다.
가장 참혹한 희생은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무렵까지
약 4개월 동안에 발생했다.
이른바 '초토화작전' 이 벌어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을 덮쳐 온 가옥에 불을 지르고
80대 노인에서부터 젖먹이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토벌대는 초토화작전을 감행하기에 앞서
10월 18일 제주 해안을 봉쇄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제주도 출신 군경검 학살..


서청의 위세는 너무도 커서
제주 출신은 경찰조차 꼼짝 못했다.
중문면 상예리의 강기주는
당시 제주경찰청 고위 간부인
강기천 총경의 동생이었다.
초토화작전이 막 시작되던
1948년 11월 중순께 서청이
상예리에 들이닥쳤다.
모두 죽을 위험에 놓였을 때 강기주는
"나는 강기천 총경의 동생입니다. 무고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청은
"경찰 간부면 다냐. 이 새끼는 더 악질이다"
라며 그 자리에서 먼저 총살했다.

1948년 10월 말부터 11월 초순 사이에
9연대 장병 1백여 명이
군사재판도 거치지 않고
불법적으로 처형되었다.
희생된 군인들은 주로 제주 출신이었다.
같은 시기인 11월 1일 제주도 경찰당국은
경찰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 프락치를 색출했다고 발표했다.
무장대에 동조한 혐의를 받은 군인과 경찰들은
바닷물 속에 수장되었다는 풍문만 전해질 뿐,
대부분 시신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이로써 초토화작전의 걸림돌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주읍내에서는 제주도청 공무원을 비롯해
교육계와 언론계 등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9연대 본부로 끌려가 감금당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중학교 교장, 제주도 총무국장,
재산관리처와 신한공사 직원들이 학살되었다.
심지어 제주지검 검사를 포함해
법조계 인사들까지 끌려가 죽었다.
읍내 사정이 이 정도이고
지방 주민들의 처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언론인 학살


열세살 소년을 고문해서 죽게 만든 사건이
48년 9월15일자 중앙신문들에 보도되자,
언론마저 토벌대의 토벌대상이 되었다.
48년 10월 경향신문 제주지사장 현인하와
서울신문 제주지사장 이상희가
끌려가 처형당했다.
지역언론사인 제주신보
사장과 전무가 끌려갔고,
편집국장은 총살되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겁간 학살하기


야수로 돌변한 토벌대에 의해
여성들의 수난도 컸다.
성산면 시흥리의
박태수 할머니(당시 60대 중반)에게는
스무 살 가량의 손녀가 있었다.
주변에 소문난 미인이었다.
서북청년단원이 그녀를 탐했지만
할머니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화가 난 토벌대는
할머니를 대낮에 길가로 끌어내어 총살했다.
안덕면 감산리의 강매옥(당시 19세)은
군인들의 겁탈을 죽음으로 막았다.
강매옥의 언니 감경옥 씨(78)는
지금도 학살자의 성씨와 얼굴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친정집에는
군인 3~4명이 임시주둔했는데
그 중에서 '최상사'라는 놈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동생은 참 예뻤지요.
그놈들은 처음에 처녀들을 몇 명 집합시켰다가
동생이 제일 곱다고 생각했는지 덮쳤습니다.
그러나 맘대로 되지 않자 총을 쏜 겁니다.
동생은 배꼽 부근에 총을 맞아
창자가 다 나올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숨졌습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1948년 12월 14일 밤
표선면 토산리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주민들을 향사에 집결시킨 후
1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를 따로 세웠다.
또 "달을 쳐다보라"고 한 후
달빛에 비춰가며 젊은 여자들을 불러냈다.
불려나온 150명이
군인들에게 끌려갈 때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그 이유를 몰랐다.
이들은 18일과 19일 이틀 동안 총살당했다.
한 유족은 "만일 사상문제를 구실 삼는다면
18세부터 40세까지만 사상이 있으며,
유독 젊고 예쁜 여자들만
사상에 연루되었겠느냐"고 항변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4.3 발발 이듬해 봄으로 기억되는데,
금덕리에서 소개온 한 처녀가
하귀지서에 끌려와 매일 전기고문을 받았어요.
사라진 오라버니를 찾아내라는게 빌미였지요,
그녀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몰래 도망쳐 바닷가에 숨었지만
며칠 후 경찰에 붙잡혔지요.
경찰들은 하귀국교 동녘밭에
남녀 대한청년단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녀를 끌고 왔습니다.
그 땐 너나 할 것없이
대한청년단원이 돼야만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앞에 끌려왔을 떄
그녀는 이미 초주검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를 홀딱 벗긴 후
'여자니까 대한청년단 여자대원들이 나서서
철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린 기겁을 했지요.
누가 나서서 찌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단장인 한 여자가 나서서 먼저 찔렀어요.
경찰은 모두들 한번씩 지르라고 했습니다.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내 차례가 되기 전에
그 처녀는 이미 죽었습니다.
경찰은 시신을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죽음을 확인하고는
남자들에게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토하고 밥도 못먹고 난리가 났어요.
또 그 일로 몹시 앓았습니다.
사촌언니는 그 떄 찔렀다면서
그 후 막 아파서 죽다 살아났다는 겁니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 앓는 것이 당연하지요.
내가 죽어서야 잊혀질 일입니다.
그런데 경찰들은 그녀에게 몹쓸짓을 하려다
안되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친구는
"몸을 줬으면 살수도 있었을텐데...'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김계순, 당시 열덟살, 제주4.23사건진상규명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진상조사보고서.)

그들은 또 여맹이 뭣하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촌 처녀들을 붙잡아다가
공연히 여맹에 가입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발가벗겨놓고 눈요기를 일삼았다. ...
지서에 붙들어다놓고
남편의 행방을 대라는 닦달 끝에
옷을 벗겼다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그건 간밤에
남편이 왔다갔는지 알아본다는 핑계였는데,
남편이 왔다갔으면 분명 그짓을 했을 것이고,
아직 거기엔 분명 그 흔적이 남아있을테니
들여다보자는 것이었다.

(현기영, 순이삼촌, 창작과비평사, 1979)

사살 연습

우리 마을 북촌리에
대학살이 벌어지던 그날,
아침부터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군인들이 마을 동쪽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설이 있으니
학교 운동장으로 집합하라 했습니다.
군인들은 우선
경찰가족, 군인가족을 따로 분리시키더군요
낌새가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은
사돈의 팔촌이라도 경찰이 있으면
경찰가족쪽으로 줄을 섰습니다.
군인은 우선 민보단 간부를 불러내
바로 총살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사람이 죽었씁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엎혀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김석보, 1998, 63세, 조천읍, 북촌리)



강요배, 젖먹이



강제 성행위


미친 짓거리는 점점 심해져 갔다.
연행자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남녀 모두 옷을 벗긴 후
강제로 성행위를 시키다
총살한 일도 있었다.
4. 19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국회에 양민학살 진상규명 특위가
구성되었을 때
한 증언자는 제주도를 찾은 국회의원들에게
"군인과 서북청년단들이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서
정조를 맺게 하고 총살시켰다" 고 폭로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함정토벌

토벌대는 무장대처럼 낡은 옷으로 변장해
민가에 들어가 "산에서 왔다"며
식량을 요구하거나 숨겨줄 것을 애원했다.
측은하게 여겨 밥을 주는 사람은
곧바로 본색을 드러낸 토벌대에게 총살되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대살

토벌대는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 이라며 수시로 학살했다.
48년 12월 13일
대정면 상모리와 하모리 주민 48명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1948년 12월 22일 표선리로 소개한
가시면 주민 76명이
속칭 '버들못'에서 집단학살되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호적을 일일히 대조했다.
그 결과 젊은이가 사라진 경우엔
"폭도로 산에 오른 게 분명하다"며 총살했다.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총살극을 구경시켰다 하여
"관광총살'이라고도 부른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자수사건

또한 여기저기서 소위 '자수강연'이 열렸다.
토벌대는 주민들에게
"과거에 조금이라도
산에 협조한 사실이 있으면
자수해 편히 살라"고 했다.
이미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거나
자수하지 않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협박이 뒤따랐다.
사태 초기 무장대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을 때
주민들 중 어느 누구도
무장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옷가지를 올렸고
쌀 한 되 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나 둘 자수자가 나오자
토벌대는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렇게 하여 1948년 12월 13일
대정면 하모리에서 48명이 희생되었다.
주민들은 이를 '자수사건'이라 부른다.
조천면에서는 '자수'한 150명 가량이
1948년 12월 21일 제주읍내
속칭 '박성내'로 끌려나와 총살되었다.
토벌대는
몇몇 사람이 총에 맞은 채 꿈틀대자
시신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박성내의 학살극은
총에 맞고도 탈출에 성공한
유일한 생존자 김태준 씨(작고)에 의해
가족들에게 알려졌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이름 빼앗기지 마라"

무장대 협조자의 명단이 발각되었다며
집단총살하는 것도 비일비재했다.
토벌대의 고문이 워낙 가혹해
일단 취조를 받으면 허위로라도 자백해야 했다.
남원면 신례리 양경수 씨(78)는
당시 "이름 빼앗기지 마라"는
유행어가 있었다고 말했다.
우연히 토벌대에게 끌려가는 사람의
앞에 가거나 근처에 있다가 그의 기억 속에
자신의 존재를 남기지 말라는 뜻이다.
"매에는 장사가 없어 고문을 받으면
아무 이름이나 튀어나오는 법"이라고 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참수

초토화작전 기간 중에서도
1948년 12월 중순부터
약 열흘간은 집단학살이 가장 극심했다.
이 무렵 토벌대는
입산한 사람들을 총살한 후
목을 잘라오기도 했다.
그래야 전과(戰果)를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다.
한 서청 출신 증언자는
"목을 잘라오면 승진을 시켜주었다"고 말했다.
1948년 12월 25일
서귀면 주둔 토벌대는
작전을 마치고 내려올 때
길목인 서홍리에 들렀다.
서홍리 주민들은 토벌대의 손에 들린
끔찍한 모습을 목격했다.
한 할머니는 "어떤 여인에게는
자기 아들의 목을 들고 내려오도록 했다" 고
증언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30만 제주도민 중 빨갱이로 몰려
학살된 희생자가 최소한 3만.

2001년 5월
제주 4.3사건 지원사업소가 접수한
희생자 신고에 의한 피해자
1만 3천여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학살 희생자중 여성이 21.1%
10세이하 어린이가 5.6%,
61세이상노인이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