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7일 토요일

[귀로 듣는 블로그] 아파트는 어떻게 무법천지가 되는가?




1년 전 얘기다. 입대의에 최저임금인상과 관련하여 안건이 올라왔다. 난 의아했다. 아니 최저임금이 올랐으면 임금을 올려줘야지,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의결이라는 말인가?

소장과 얘기했다. "소장님 우리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아저씨들 최저임금만은 제대로 지켜주도록 합시다. 우리 동대표들.. 제대로 해줄 걸 해주면서 상전노릇이나 하면 모르겠는데.. 제대로 해줄 것도 안해주는 거 보면, 내가 아저씨들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요. 소장님이 전문가로서 최저임금이 임의규정이 아니라 강행규정이라는 걸 회의에서 못좀 박아주세요." 소장은 답했다. "그럼요 이사님. 최저임금. 그건 당연히 지켜하는 거지 말입니다."

그러나 회의장 밖에서의 소장과 회의장 안에서의 소장은 다른 사람이었다. 120만원 선에서 맞추라는 회장의 한마디에 소장은 씩씩하고 큰 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네! 가능합니다. 휴게시간을 조정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오십대 후반의 소장은 노회한 자였다. 결코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전에도 이미 휴게시간을 7시간으로 늘려잡고 있고 있던 터였다. 소장은 경비아저씨들의 휴게시간을 8시간으로 조정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관리사무소 서류 중 2014년 근로계약서를 검사하던 어제의 일이다. 나는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근로계약서 상의 휴게시간이 7시간인 채로, 임금에만 8시간의 휴게시간이 반영되어 있었다.

근로계약서대로 라면, 휴게시간을 제외한 근로시간 17시간 중 1.5배 할증이 적용되는 야간근로시간이 2시간. 총 하루 총 18시간에 대한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 2014년 최저임금의 90%는 4,689원. 하루 일당 84,402원. 1년 동안 근무일수 182일. 연봉 1540만원, 월급 128만3613원. 근로계약서에 적힌 월급은 이것보다 4만5천원이 적었다. 1년에 최저임금의 54만원을 덜 받는 셈이었다.






그 중의 한 분은 더 심각했다. 그 분은 다른 분들보다 근로계약서 상의 근로시간이 1시간 많았다. 그런데 정작 임금은 다른 분보다 더 낮게 받고 있었다. 이 분의 경우, 열여덟 시간 근무시간 중 1.5배 할증이 적용되는 야간근로시간이 세 시간. 하루 19.5시간에 대한 임금이 지급되어야 했다. 최저임금을 감안하면, 하루 91435원 연봉 1664만1261원. 월급은 1,386,771원이어야 했다. 이분의 근로계약서 상의 월급은 최저임금보다 20만원이상 적었다. 1년 동안 248만원이나 적은 연봉을 받는 셈이었다.

관리사무소에 전화했다. 임금 산출식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관리사무소 경리주임은 근로계약서 상의 휴게시간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처음 안 듯했다. 허둥대는 눈치가 보였다.

퇴근 후, 다른 동대표와 함께 관리사무소에 갔다. 소장의 말인 즉, 서류상으로만 잘못된 거란다. 아무 문제없다는 식이다. 그리고 오류를 시정했단다. 새로 작성된 근로계약서를 내민다. 소장이 있는 자리에서 경비아저씨 한 분을 불러올렸다.

"아저씨, 지금 아저씨 휴게시간을 어떻게 알고 계세요? " "점심시간 한 시간 쉬고요, 저녁시간 한 시간 쉬고요, 밤 12시부터 아침 5시까지 쉬니까, 휴게시간이 7시간입니다." 이 아저씨가 알고 있는 대로라면, 계약서에서 드러난 것보다 문제가 더 크다. 아침 5시부터 6시까지는 할증이 붙는 심야근로시간이다.

결국, 입대의의 결의에 따른 휴게시간의 변경은, 경비 아저씨들에게 고지되지도 않았던 거다. 심지어 근로계약서에서도 그대로였다. 변경된 휴게시간은 오로지 소장과 경리주임의 머리 속, 그리고 근로계약서상의 임금 란에만 반영되어 있었다.

소장이 새로 고쳐 작성한 근로계약서를 언급했다. "이거 언제 싸인하셨어요." "아까 올라와서 싸인하라고 해서 싸인했습니다. "  내가 전화로 임금산출식을 보고하라고 하자, 그제서야 근로계약서 상의 시간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된 소장과 주임. 2014년 근로계약서의 흠을 가리기 위해 2014년이 다 지나가는 지금, 2014년 1월 1일 날짜의 근로계약서를 새로 작성한 것이다. 엉터리 근로계약서다.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

관할 근로감독관에게 질의했다. 근로감독관은 사용자인 입대의 이사가 최저임금제 위반 사실을 얘기하는 게 의아하다는 식이었다. 하긴 사용자가 최저임금제 위반을 알았다면 근로감독관을 찾아갈게 아니다. 직접 시정하면 될 일이다.

우리 아파트는 자치관리다. 사용자인 입대의는 문제가 될 경우 직접 형사책임을 질 수도 있는 당사자다. 하지만, 입대의의 과실은 아니잖는가? 계약체결의 주체도 관리소장이었다. 자칫하면, 관리소장의 잘못을 입대의가 뒤집어 쓸 판이다. 미지급금을 뱉어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벌금까지도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아파트에 손해가 되는 일이었다. 책임소재를 명확히 가려놓는 게 필요했다.

마침 현 입대의와 새로 구성된 내년 입대의의 상견례 겸 업무인수인계 자리가 저녁에 있었다. 모두 있는 자리에서 현임 회장에게 보고했다. 분위기는 험악했다. 모두들 문제만 불거지지만 않는다면 문제가 없다는 투였다. 소장은 문제가 일어나면 자신이 책임지겠노라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큰 소리쳤다.

새로 구성된 입대의 이사 한 분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 경비아저씨들이 문제를 삼습디까? 왜 정 이사가 나서서 그럽니까?  정 이사는 아파트 편입니까? 경비들 편입니까?"

일류대를 나오신 전직 미술선생님. 내가 두 번을 찾아가 동대표 출마를 읍소했던 바로 그 분이었다. 다섯 명의 입대의 구성원 중 캐스팅보트를 쥔 분. 앞으로도 소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편을 만들어야만 했던 분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2년이 무서워졌다.

2014년 12월 15일 월요일

우리 아파트 관리사무소 소장 어떻게 해야 하나?


바퀴벌레와 개미에 대한 민원이 끊이질 않았다. 주민들 사이에서 우리 아파트 세대 내 소독을 관리하는 업체의 서비스에 대해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급기야, 나는 소독업체와의 재계약을 한달 유예시킬 것을 입대의에 제안하고, 직접 바퀴벌레약을 먹이집에 짜서 전세대 주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지난해 5월24일 경의 일이다.

아파트관리소장은 당시 대한민국 아파트 역사에 동대표가 나서서 이런 일은 한적이 없다는 둥 내심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다.

한달 후, 나는 소독업체 사장을 불러서 서비스품질에 대한 개선의지를 확인한 후, 두 가지 조건을 붙여 6개월간 계약을 연장하는 안을 입대의에 제안하여 의결시켰다.

첫째. 내가 바퀴벌레에 대해 방역을 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개미약을 전세대에 교부한다.
둘째, 6개월 후 주민들을 대상으로 서비스 품질 평가를 실시하여 그 결과에 따라 그 이후 계약연장여부를 결정한다.




이 조건에 따라  소독업체는 지난 7월 12일. 전세대에 개미약을 교부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지난번 바퀴벌레약에 대한 효과를 조사했다. 주민들에게 스티커를 붙이게 하는 방식이었다.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났다. 소독업체 서비스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은 여전했다. 이제 약속대로 업체에 대한 서비스 평가를 해야 할 시기다.  주민들의 불만을 수치화한 자료가 필요했다. 관리사무소 소장에게 바퀴벌레약 설문 조사 때처럼 스티커 설문조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하면 주민들의 참여가 더 많았다는 사실을 나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소장이 실시한 설문조사는 엉뚱했다. 관리소장은 스티커 평가 대신, 조사원 면전에서 답을 작성하는 방식의 서면평가를 실시했다.  더 큰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설문을 위한 소장의 질문은 평가의 목적도 몰각한 엉뚱한 것이었다. 소독업체계약연장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지난 6개월간의 소독 업체의 서비스 품질을 평가한다는 목적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정답을 결정해준채, 설문조사를 실시했네요." 설문을 위한 소장의 질문을 읽어본 우리집 파출부 아줌마의 평가였다.

소장에게 따졌다. 소장은 천연덕스러웠다. "저는요, 대표님이 뭘 바라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직접 설문지를 작성해주시든지요?"

의도가 있다면 불순한 것이고, 의도가 없이 이런 짓을 했다면 이해력이 떨어지는 거다. 둘다 문제다. 소장은 사회적으로 문제시하는 갑질을 언급하며, 마치 내가 갑질을 하려는 양 말하고 있었다. 적반하장격이었다.


도대체 소장은 왜 이러는 걸까?

이번 동대표선거를 통해, 나를 제외한 입주자대표 전원이 교체되었다. 이른바 권력 교체 시기다. 소장이 새 입대의를 좌지우지하려는 낌새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당선자 상견례 자리. 새 당선자 중 한명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소장이 옆에서 추임새를 넣는다. 자기가 다 정리해서 나눠주시겠단다. 별도로 그 당선자의 전화번호를 본인으로부터 받아냈다.

며칠 후, 그 새 당선자에게 연락할 일이 생겼다. 적어둔 전화번호를 집에 놓고 온 탓에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당선자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소장이 안내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자 "없는 국번"이라는 안내가 나왔다. 다시 한번 소장에게 전화번호를 확인해달라고 했다.

"여기는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없는 국번이라고 나오는데요?"

"여기는 그렇게 적혀 있다니까요?"  "지금까지 관리사무소에서 한번도 그 분에게 통화를 한적이 없습니까?"

"없습니다." "문자는 보냈을 거 아닙니까? 나도 후보자와 당선자로서 관리사무소로부터 여러 통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후보자와 당선자로서 받은 안내문자를 이 분은 한번도 못받았다는 겁니까?"

"보내긴 보냈는데.. 받으셨는지 못받으셨는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소장님!! 우리 일 똑바로 합시다! 만에 하나. 내가 받은 문자를 그 당선자님도 받으셨는데, 전화번호를 소장이 잘못 알려주는 거라면, 나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

소장에게 버럭 화를 냈다. 소장은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서야 소장으로부터 그 당선자의 제대로 된  전화번호를 받을 수 있었다.

소장이 나에게 처음 보낸 번호는 진짜 번호에서 숫자  세 개를 바꾼 엉뚱한 것이었다.

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박원순을 위한 변론 - 박원순은 호모포비아인가?



인권침해에 대한 가장 좋은 대응방법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법 아니겠습니까?"

"법이 인권침해의 구제수단도 될 수 있지만, 법은 인권침해의 주체가 될 수도 있어요. 지금까지 우리 국제적인 인권사회가 합의한 인권침해에 대한 가장 좋은 대응방법은 바로 폭로입니다. 폭로는 평화로울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잘못을 똑같이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복수와 구별되지요. 뿐만 아니라, 침해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드러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에, 징벌적 효과와 예방적 효과도 뛰어납니다. 그래서 국제적인 인권단체들은 주로 폭로를  인권침해에 대한 대응수단으로 채택하고 있어요. "

대학시절 박원순 변호사로부터 인권을 배웠다. 누구보다 뛰어난 인권이론가이자 활동가였던 그가 시장이 된 지금. 그를 괴롭히는 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서울시 인권헌장이다.

박원순 시장의 말에서 앞뒤 잘라내서,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 이 부분만 밝힌 다음,  동성애는 지지와 반대가 유효한 영역이 아니네 마네 운운하는 윤똑똑이들의 말은 잠시 접어두자.

박 시장은 이미 명토박은 바 있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첫 번째 국가가 되길 바란다’(<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와의 인터뷰). 이러한 박 시장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박 시장의 이후 발언에서 이 발언과 모순되는 말을 나는 찾을 수 없다.

서울시가 확인한 문제 발언의 정확한 내용은 이러하다. "(동성애에 대해) 보편적 차별 금지 원칙에 대해서는 지지하지만 사회여건상 (종교나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라) 동성애(결혼)를 명백하게 합법화하거나 지지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다.  시.민.사.회.단.체.가 역.할.에 따라 해.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서.울.시.장.으.로.서.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긴다. 여기서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는 말이 과연 어떤 의미인가? 동성애자들의 인권에 반대하고 그들에 대한 차별에 동의한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시장과 시민사회단체의 역할분담에 관한 내용 내지는 동성애자 측들의 '안'에 대한 입장으로 보아야 하나?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이미 명시해놓았다.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 , 성적 지향, 등을 이유"를  가지고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행위를 하지 말라고.

그랬더니, 김조광수라는 자가 나타나 용춤을 췄다. 가족등록사무를 수행하는 공무원들을 졸지에 위법한 인권침해자로 몬 것이다. 동성애자 혼인을 위한 국가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게 빌미였다.

동성애자들이 결혼을 할 권리? 지금은 없는가? 김조광수가 스스로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결혼했다. 국가는 그것을 금지한바 없다.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결혼할 권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국가가 자신들의 결혼을 장부에 적어놓고 관리하고 보호해야만, 자기들이 차별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자신들의 인권이라는 것이 김조광수 일당들의 주장이다.

도대체 국가가 그들의 결혼을 관리하고 보호하지 않아서 그들이 받는 실체적 침해란 무엇인가? 상속권도 없고, 일상가사대리권이 없어서 배우자가 수술을 할 때 동의해줄 수도 없단다. 전세대출도 받을 수 없단다.

상속권이 없으면, 유언을 해주면 된다. 일상가사대리권이 없으면 수권행위를 하면된다. 전세권 대출이 안되면, 전세권대출을 해달라고 주장하면 된다. 그게 과연 국가가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관리하고 보호하지 않으면 차별적 인권침해라고 할 이유인가?

인권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권리”로 정의된다.

이 정의는 인권의 개념에 대한 사람들의 합의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할 것을 예정하고 있다. 추정이라는 것은 반증으로 뒤집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소한의 반증 이전에 가지고 있는  인간의 추정된 권리는 매우 슬프게도 문화적 습속과 감수성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시대와 사회에 따른  변화를 예정하는 것은 인권 개념에 대한 인류의 인지능력일 뿐이다. 인권이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인권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권리라는 뜻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사람 말이다. 노예해방 이전에 존재하던 흑인 노예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인권과 똑같은 인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추정력이 깨지는 과정을 통해 오늘날에서야 비로소 그것이 인권침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

과연, 국가가 자신들의 장부에 적어놓고 결혼을 관리하고 보호해야만 차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동성애자들의 권리. 그것이 과연,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권리", 즉 인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솔직해지겠다. 나도 모른다. 나중에 반증을 통해서 뒤집어질 지도 모르겠지. 그러나, 그들의 권리에 추정력을 부여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의 주장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성공하였는가?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 인권헌장 앞에서 묻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박 시장은 묻는다. "인권헌장은 뭐하러 만드냐"고.  이미 "성적 지향" 문구가 인권위원회법에 명시된 상황이다. 그런데 법률적 강제력도 없는 인권헌장이 우리 사회구성원들에게 인권적 규범을 제시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무엇인가? 다수결인가? 사회적 합의인가?  박 시장은 강조한다. "인권헌장은 표결대상이 아니"라고. 그랬더니,  "박시장, '인권헌장은 뭐하러 만드냐'" 이 한 마디만 따서 용춤을 추는 게 이른바 진보라는 언론들의 작금의 행태다.

헌법재판소 말씀이다. "헌법상 평등의 원칙은 국가가 언제 어디에서 어느 계층을 대상으로 하여 기본권에 관한 사항이나 제도의 개선을 시작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헌법상 평등의 원칙이 이럴진대, 서울시 인권헌장의 평등조항이 국가가 이성애자를 대상으로 하여 기본권에 관한 사항이나 제도의 개선을 시작하는 것을 선택하는 걸 방해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은 뭔가?

동성애자 인권운동가들에게 묻는다. 이미 성적지향이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의해 차별행위로 규정된 마당에 당신들의 서울시 인권헌장과 관련된 작금의 작태는 당신들의 권리 확대에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그대들은 박원순보다 인권에 대한 철학을 지닌 정치지도자를 본적 있는가? 그를 잃는 것이 긴 안목에서 동성애 인권을 위해 득이겠는가? 해가 되겠는가? 신망받는 지도자 한 명을 인질로 잡고, 사회적 합의에 의한 서울시인권헌장의 첫걸음을 방해하려는 자들은 스스로의 행위를 성찰하길 바란다.    

“서울 시민은 누구나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대신에 “서울시민은 성별, 종교, 장애, (중략)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 병력 등 헌법과 법률이 금지하는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라고 쓰인 인권헌장을 갖는 것. 이게 과연 신망받는 지도자 한명을 호모포비아로 몰고 사회적 합의를 갖춘 인권헌장을 포기할 만큼 중요한 문제인가?

2014년 12월 3일 수요일

[심층인터뷰] 국가적 마녀사냥 피해자 홍가혜를 만나다 1

  






















제 나이에 맞는 생각, 
제 나이에 맞는 행동. 그리고 삶.
그냥 평범하게 현명한 부모님 밑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대학 다니다가
직장 다니다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큰일 없이 그렇게 사는거?
어느 회사에 다니든, 사업을 하든
평범하게 연애하고
남들처럼 저렇게 사람들이랑 밥도 먹고
길거리도 다니고..

큰 일에 안 끼고 그냥 이렇게?
사실 내 나이에 사회적 이렇게 ..
회색 세상이라고 하죠?
이렇게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많이 없어요
정치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
나는 그렇게 살고 싶은 거예요.
내 행복. 내 삶에 신경 쓰면서...
그런데 그렇게 안 살잖아요?
오지랖이 넓어서 그래요. 잘 안돼요.
그러니까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게
내 꿈이라고. 꿈..

엄마는 아빠를 많이 사랑했다. 부산까지 아빠를 따라온 엄마가 미혼모가 되었을 때 엄마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할머니와 고모의 손에 집에 들여졌을 때, 아빠는 소리를 질렀다. “왜 데리고 왔냐고? 고아원에나 보내라고!” 다행히 고아원에 보내지진 않았다. 할머니와 고모 덕이었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친엄마가 나타났다. 미국에서 총 맞아 죽었다던 엄마였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학교를 자퇴했다. 머리가 나쁘지 않았던지, 검정고시를 통해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느 날 엄마 같던 고모가 자살을 했다. 약을 먹었다. 할머니와 열일곱 살 조카가 보는 앞에서였다. 119에 신고를 했지만, 어린 조카의 말을 믿어주질 않았다. 장난전화 취급했다. 구급차가 도착한 것은 신고한 후 40분이 지나서였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고모는 이미 숨져있었다.

엄마 같았던 고모의 죽음. 마음껏 슬퍼할 수도 없었다. 고모가 자살할 때, 조카와 싸웠다는 얘기가 돌았다. 심지어 신문에서도 확인하지 않은 사실을 써댔다. 할머니와 함께 경찰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유족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던 경찰.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 모두가 미웠다. 그래도 유족인데...

고등학교를 그만두었다. 할머니가 계시던 집을 떠났다. 독립했다. 열일곱 살이었다.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한 끼 먹는 게 급할 때도 있었다. 버터구이 오징어를 파는 알바, 피팅 모델, 일본에서 식당운영도 해봤다. 호떡도 팔았다. 삼겹살도 팔았다. 명품샵도 운영해봤다. 옷가게도 해봤다. 스스로 생각해도 직업이 참 많았다. 독하게 살았다.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유혹도 많았다. 그래도 마음속의 선은 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특히 섹스만큼은 온전히 자유로운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내가 내 몸도 되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먹는 즐거움.
사랑을 하는 즐거움.
섹스를 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그런 즐거움을
돈을 받고 팔기 싫은 거죠.
내 즐거움을 팔기 싫으니까..
그거 하나는 철저하게 지켜서..

사람은 그 때마다 나이에 걸 맞는 일이 있다. 지나보니, 어린 가혜가 스스로 안타깝고 안쓰럽다. 그 나이의 다른 아이들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모습을 보면 감정적으로 자유로워지질 않았다. 그들의 슬픔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한 고아원과도 연을 맺었다. 어쩌면, 그 고아원에서 자랄 수도 있었다.



그 날, 어쩌면 별 볼일 없을 지도 모르는 잠수경험을 믿고 팽목항으로 달려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아이들이 꼬록꼬록 잠겨가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이미 열일곱 살 때 고모가 죽어가는 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텔레비전만 보고, 인터넷에서 키보드만 두드리며 있을 순 없었다.

베테랑 잠수사는 아니다. 사람을 구조해보지 않았으니까. 다만, 깊은 수심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시야확보가 어려운 야간 다이빙 경험도 있다. 그냥 한 사람이라도 살려보자. 구해보자.

그렇게 도착한 팽목항.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대부분의 민간잠수사들도 투입될 수 없었다. 흉흉한 말들이 돌았다. 답답했다. 패닉이 왔다. 얘들은 물속에서 꼬록꼬록 죽어가고 있을 텐데, 해경이 민간 잠수사들의 투입을 거부하는 이유는 가지가지였다.

방송에서 말하는 상황은 딴 세상이었다. 550명 투입. 120대 헬기. 현장에서의 분위기는 냉소적이었다. “구라치네” “거짓말 하네..” “저봐라 저~” 사고해역의 상황은 잘 몰랐다. 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국은 바지선조차 대주질 않았다.

이미 투입되었던 민간잠수부들의 입에서 생존자 얘기가 나왔다. ‘생존자 확인했다.’ ‘신호를 주고 받았’고. 심지어 ‘대화도 했다’고 했다 . 대화? 이상했다. 잠수를 해봤기 때문에 안다. “어떻게 물속에서 대화가 가능해요? 물 밖에서 했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수면 위에 나와 있는 부분, 그 밖에서 커뮤니테이션이 되었다고 했다.

눈이 뒤집혔다. ‘아! 그런데 왜 안 되는 거야?’ ‘왜 지금 구조를 제대로 안하는 거지?’ ‘큰일 났다. 여기는 고립되어 있구나.’ 마침 MBN 뉴스제작진이 인터뷰를 요청했다.

“에어포켓에 서른 세 명 생존자 있다는 얘기들이 있다.” MBN 제작진이 문자로 보낸 예상 질문지에 담겨져 있는 내용이었다. 제작진은 확인을 부탁했다. 그 질문을 할 거라는 의미였다. 현장에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MBN이라는 뉴스에서 이런 것을 좀 알아봐달라고 하는데 어떻냐? 하나같이 손사래를 쳤다.

“인터뷰를 그렇게 하는 것은 좋은데. 나는 하기 싫다” “왜요? 지금 텔레비전에서는 종편에서는 550명 투입이다 뭐다 이렇게 하고 있는데 현장은 그게 아니라면서요, 다 뻥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안 해요? 왜 못해요?” “야! 너 그렇게 얘기하면 정부에서 발언.. 정부에서 한 게 있는데.. 너 안 돼!! 골치 아파져! 머리 아파져! 하지 마~ ”

4월 18일 새벽. 결국 직접 인터뷰에 나섰다. 인터뷰가 끝나자, 다 잘했다고 했다. 민간잠수사들과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격려했다. “이 얘기는 누군가는 했어야 했다. 잘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을 한 대가는 혹독했다.




느닷없이 전화가 빗발쳤다. 1분에 전화가 10여 통이 왔다. 모든 전화 수신거절을 설정해 놨다. 욕설 문자도 쇄도했다. 모두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문자가 하도 많이 오니, 뭘 누를 수도 없었다. 연락을 누군가에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문자를 확인할 정신도 아니었다. 인터넷은 확인할 정신도 없었다.

인터뷰 당일부터 인터넷에서는 경찰발 홍가혜 잠적설이 퍼졌다. 경찰과 연락이 되자마자, 출두를 약속했다. 출두하기로 한 전날 자진 출두했다. 102일 감옥생활의 시작이었다.

경찰조사에서 수사관이 물었다. “티아라 사촌 사칭한적 있나?” “아닌데요?” 뭐지 싶었다. 검찰조사에서 담당수사관이 물었다. “연예부기자 김용호씨를 아나?” 그때서야 김용호가 뭔가 크게 한판 했다는 걸 알았다. “해경명예훼손이라면서요, 그거랑 이거랑 내가 옛날에 이랬다 저랬다더라 하는 카더라랑 뭐가 중요하죠? 중요하면 얘기할게요.”

병든 할머니가 면회를 오셨다. 수감된 후 한 달쯤 후였다. 파킨슨병. 근육들이 파괴가 되는 병. 종국에는 밥도 혼자 못 드시고, 화장실도 혼자 못가시고 걷지도 못 하게 되는 병. 근육이 제어가 되지 않기 때문에 걸으면 스톱이 안 되기도 하신다. 특별한 치료법도 없다. 지금도 손을 떠신다. 몸이 많이 아프실 때는 움직이지를 못 해서 어디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분도 아니다. 장거리여행도 힘드신 분.

경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경찰이 물었었다. 가족들한테 알려줄 사람 있냐고. “할머니한테 알려줄까요?” “절대 알리지 마라. 집에. 다른 사람에게는 상관없지만 할머니한테는 이 일을 모르게 하라” 부탁했었다. 그런데 언론에서 하도 많이 떠들고, 이웃사람들까지 와서 한마디씩 거드니, 할머니라고 모르실 수는 없었다. 움직이지도 못하시는 분이 수감 한 달 후에 면회를 오셨다. “내 새끼 어떡하냐고.. 내 새끼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내 새끼 어떡하냐.. 내 새끼 불쌍해서 어떡하냐.. ”

아무 말도 안 나왔다. 아무 말도 못했다. 다른 변명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 미안해. 다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진실은 밝혀진다. 할머니 내 걱정하지 말고, 나 여기서 밥도 잘 먹고 잘 자고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할머니가 말했다. “잘 했다. 너 다이빙 배우러 다닌다고 하는 거 다이빙하러 다닌 거 할머니가 알고 그거 거짓말 아니라는 거 알고 네 성격상 애들을 살리려고 간 것도 안다. 가혜야, 너무 억울해 하지 마라. 억울하다 생각하지 마라. 너는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했다. 네가 아니었어도 다른 사람이 했어도 너처럼 이렇게 됐을 거다. 잘 했다.”

고마웠다. 키워주신 친할머니. 할머니는 평생 그 동네에 살면서, 다른 분들한테 피해 한번 안 끼치고 헌신적으로 사셨다. 이런 할머니에게 이웃사람들이 찾아와서 입방아들을 찌고 갔단다. “가혜가 거짓말해서 잡혀갔대.” “가혜.. 거짓말해서 감옥 갔다며?” 우리 할머니는 그게 아닌 거 아는데.. 할머니는 미치시는 노릇이셨을 게다.

미안해요. 할머니한테 제일 미안해요.
아빠 엄마보다 미안한 건 할머니..
나를 키워주셨으니까.
내가 이런 성격이 생겼고.
이렇게 살고 이렇게 예쁘게...
저는 제가 얼굴이 예쁜 게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을 항상 할 수 있고,
이렇게.. 남들 위해서 살 수 있는 이런 것들이
저희 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요?
할머니의 교육, 가르침으로..
그렇게 할머니는 나를 예쁘게 키워주셨는데,
나는 국민악녀가 되었잖아요?
그게 할머니한테 미안하죠.
그렇지만 저희 할머니는.. 고마운 게 그거에요.
이런 저를 사랑한다고 하시고.
잘했다고 해주시고.

수감된 후 한 달은 독방에 있었다. CCTV가 스물네 시간 가동되는 곳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혼거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검찰조사가 끝난 후였다. 그 안에서도 유명했다. 다들 거짓말쟁이 유언비어유포자로 알고 있었다. 이지메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무시했다. 재판에서 유리하게 이런 증언이 있었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그 말조차 믿지 않았다.  말을 막 뱉는 스타일이라 더더욱 그랬다. 사기범조차 말끝마다 “거짓말해서 들어 온 년” 운운했다. 그 안에 있으면 사람들이랑 다투기도 하는 법이다. 무슨 말을 하면 교도관들마저도 거짓말로 받아 들였다.

평생 이렇게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힌 체 살아야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도 나를 이렇게 무시하고 괄시하고 하는구나. 사실이라고 하는데도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구나. 세상에 혼자 있는 기분이었다. 사막에 나 혼자 있는 기분. 가위에 눌린 것 같은데 의식은 있는데 소리를 치는데 아무도 내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 남자친구의 존재가 큰 위로였다.

내가 네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아는데
언론에서는 그렇게 떠들어 대니까
누군가한테 내가
홍가혜 남자친구라는 말도 못 할 뿐 아니라
자기네들 술 먹으러 가는 회식자리에서도
제 얘기가 나오고 이랬데요.
화가 났대요 많이. 그래서 그렇게 얘기 했데요
남자친구도 그렇게 얘기 했데요.
참 세상 무섭다.
자기 이제 자기 위에 사람한테
그렇게 얘기 했데요
참 세상은 무서운 것 같지 않습니까?
홍가혜 사건을 보면 좀 그렇지 않냐고..
그 사람이 무슨 이득이 있어서
거기 가가지구 그렇게 했겠냐?
모든 걸 지금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데
민간잠수부 막은 것도
이렇게 사실로 들어나고 있는데
이런 거 보면 참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인 거 같다고
그냥 제삼자 얘기 하듯이
그렇게 얘기를 했더니
다들 반응이 다들 반응이 그랬데요.
쟤가 뭔 말하나.. 쟤가 뭔 말하나..
그러면서 또 개중에는 그래 억울한 거 같더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때 당시에 뭔가를 하려고 해도
이미 저는 잊힌 사람이 되었어요.
그 때 안에 들어가면서 어떻게 됐는지
사람들이 잘 모를 뿐 아니라
그렇잖아요? 기사한 건 안 났으니까
수감되고 나서는 잊힌 사람이 된 거죠.

수감된 사람들과 사이가 좋아진 건, 같이 보던 텔레비전 뉴스에 어느 날 유가족들이 불처벌 탄원서를 냈다는 게 방송된 이후다. “홍가혜씨 말에 뭐 공감을 하고 사실인 부분들이 많다.” 식의 인터뷰가 방송되자, 비로소 같은 방 사람들이 믿어주기 시작했다.




7월 30일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보석금 500만원을 공탁하는 조건이었다. 할머니가 보증보험을 끊어서 보석금을 해결해주셨다. 같은 방 재소자들이 믿어주기 시작한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때였다.

세상에 나와 인터넷을 보니 기가 막혔다. 눈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티아라 사촌 사칭, 연예부 기자 사칭, 자신을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밝힌 한 악플러까지. 안에서도 조사받을 때 얼핏얼핏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수감된 100일 동안 국민쌍년이 되어 있었다.

목을 매려고도 했다. 달리는 차에 뛰어들려고도 했다.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예전에 밝던 모습이 없어졌다. 만날 인터넷 검색하면서 힘들어하고 울고, 밥을 아예 안 먹거나 폭식을 하고, 잠도 못자고, 남자친구 말 한마디에 예민해졌다. 자주 싸우게 됐다.

남자친구가 많이 힘들어했다. 진짜 많이 힘들었을 거다. 오죽하면 울면서 그랬다. “나도 피해자라고.. 나도 세월호의 피해자다.” 남자친구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자신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옛날에 그 모습이.. 밝고 긍정적이고 그런 모습들이 없어졌으니까.

남자친구가 없을 때
제가 목을 맨 적이 있어요.
근데 남자친구가
뭔가 이상해서 들어왔었던 거죠
바로.. 그런 것도 있었고..

한번은 너무 답답해서 집에만 있었거든요 제가?
답답해서 나와 가지고 씻지도 않고 나와서
차 도로에 1시간을
가만히 앉아 있은 적이 있어요.
차 그.. 인도있는 거기.. 앉아서
그냥 .. 앉아가지고 멍 하게
너무 답답 했어요.
그 '왜'라는 단어하나가 저를
그렇게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아요.

“얼마나 힘들지 알 거 같다.” “힘내세요.” 이런 말을 들어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났다. 웃기는 소리였다. ‘지들이 뭘 얼마나 알아? 뭐? 아픔을 알아? 이렇게 지금 나오고 나서 할 게 아니라 들어 가 있을 때 좀 해 주지. 지금 와서 자기네들이 뭘 안다고. 나에 대해서 정말 뭘 안다고. 왜 마치 나를 다 안다는 식으로 얘기를 할까’ 싶었다. 그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표현할 수가 없다. 지금도 마녀사냥에 대해 떠올리고 생각하고 하면 너무 힘들다.

출구가 안 보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래도 그나마 많이 나아진 것은 이제 법정에서 다 사실로 밝혀졌으니까. 진상 규명까진 아니더라도 그 때 했던 발언이 다 사실로 밝혀졌으니까.

지금도 페이스북 메시지나 카톡으로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게 사실이냐 저게 사실이냐” 자기네들이 검색하면 지금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대답을 안 해주면 대답을 안 하는 걸 보니 너 그게 사실인가 보다 식이다. 대답 안 해주기도 곤란하다. 강요되는 폭력적 질문에 그런 기억 떠올리는 자체가 너무 고통스럽다. 사실이 아니니까.



위로가 되는 유일한 일은 세월호 유가족 분들을 만나는 일이다. 그 분들을 만나면 일단 마음이 편하다. 얘기를 나누면 공감이 된다. 서로 그 사건에 대해서 너무 잘 아니까. 그 분들도 다른 데서 얘기하지 못 하는 속 얘기들을 해주신다. 그런 걸 듣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유가족이 열분 정도. 가끔은 모르는 유가족 분들로부터도 카톡이 온다. 고맙다는 말들을 많이 하신다. 정작 드릴 말씀은 “죄송하다.”라는 말 밖에 없다.

그분들이 ‘고맙다.’
‘가혜씨가 있어서..
자기네들이 당한 일들을
정말 그대로 여과 없이 목격해 준 발언해 준
자기네들 대신에 발언 해 준 가혜씨가 있어서
우리가 숨통은 튀었다.’
그리고 미안하다. 나한테 말하는 게..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 했다. '
구속 됐다는 소리 듣고
석방하라고 강력하게 항의도 하긴 했지만
바로 구해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했다
뭐 이런 말들도 하시면서
어떤 분은 이제 얼마 전에
성호어머님이라고 언론에 나오시는 분인데
성호어머님이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가혜씨 버텨달라. 좀 더 버텨 달라.
역사에 중요한 사건의 증인이 된 걸 잊지 말고
당신은 이 사건에 있어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유일한 사람이 된 걸.. 유일한 사람이 된 걸...
유일한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이 사건에 있어서는 당신이
제일 유일한 사람이라고.. 이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이렇게 맨몸으로 뛰어 들어 그 분들을 위해 이렇게 했던 것. 어떻게 보면 그랬기 때문에 그 분들이 그렇게 표현하시는 지도 모른다. “유일한 사람” 이런 말씀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이제 지지해주는 분들이 많다. 그래도 그 분들의 달콤한 말에 일희일비하게 되진 않는다. 감사할 뿐이다.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러나 그걸 떠나서 위안을 받고 위로를 받는 곳은 유가족들뿐이다. 유가족 분들의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버틸 수 있는 버팀목이다.

이번 달에 선고공판이 있다. 유죄를 받을지, 무죄를 받을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밝혀질 부분들은 다 밝혀졌다. 유죄와 무죄. 그건 법리적인 싸움이니까. 재판부가 정치적인 눈치를 보지 않고 사실만 가지고 판결을 정의롭게 해줄 거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결과를 예단할 수는 없다.

이미 세월호가 정치적으로 많이 기울었다고들 한다. 이 사건도 어떻게 보면 세월호 사건 아닌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판결까지도 정치적으로 기울 수도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유죄가 되던 무죄가 되던 중요하지 않다.

아직도 이 나라를 법치국가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이제 국가를 신뢰할 수 없다. 검찰과 경찰. 검사가 그렇게 무리하게 기소를 했다. 취지는 왜곡되고 검사에 의해 마음대로 해석되었다. 믿고 있던 원칙들은 작동하지 않았다. 불구속수사원칙조차 지켜지지 않았다. 인격과 인권이 무너졌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보장받아할 권리. 그런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사람이 되었다.

원칙을 안 지키는 건 이미 우리나라 검찰의 현주소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사람마다 다른 법칙이 존재한다. 정미홍씨나 권은희씨나 정몽준 아들. 한명도 구속 안 되지 않았나? 힘없고 빽없으면 겪을 수 있는 일. 그래서 좀 더 많이 배워야겠다. 좀 더 내 힘을 길러야겠다. 계속 힘없고 빽없는 바보일 순 없다.

저는 이번 제가 이런 큰일을 겪고 나서
제가 큰일을 겪고 나서 이제 든 생각이에요
바뀐 생각이지만..
아! 꿈이라기보다는
아 내가 이런 일을 당했으니까
앞으로 이런 일을 해야지
뭐 이런 생각이 들 거 아녜요?
근데 어.. 저는 평범.. 아까도 얘기했지만
평범하게 살고 싶고
내 나이에 맞게 살고 싶거든요?
하지만 저도 언젠가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고
이렇게 하나의 가정의 엄마가 될 거잖아요?
내 자식한테 이렇게 얘기 해 주고 싶어요.
진실과 사실과 정의를 외치면
억울하게 마녀사냥 당하지 않고
배고파지지 않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깐 썩은 사회에서는
진실과 정의를 외치면
배고파지고 왕따가 되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게 되지만
더 이상 썩은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진실과 정의를 외치면 배 안고파지고
왕따 안 되고 억울한 감옥살이 할 일 없다.
내가 할머니한테 받았던 가르침 그대로
양심을 항상 살찌우고 살아라.
그렇게 살아도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준다는 말을
해 주고 싶어요.

엉뚱한 생각이지만, 만약 무죄를 받는다면, 수사했던 경찰과 기소했던 검사를 찾아가고 싶다. 왜 그랬는지 묻고 싶다. 그러고 나서 다 이제.. 다 내려놓고 돌아가고 싶다. 예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