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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7일 토요일

[귀로 듣는 블로그] 아파트는 어떻게 무법천지가 되는가?




1년 전 얘기다. 입대의에 최저임금인상과 관련하여 안건이 올라왔다. 난 의아했다. 아니 최저임금이 올랐으면 임금을 올려줘야지,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의결이라는 말인가?

소장과 얘기했다. "소장님 우리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아저씨들 최저임금만은 제대로 지켜주도록 합시다. 우리 동대표들.. 제대로 해줄 걸 해주면서 상전노릇이나 하면 모르겠는데.. 제대로 해줄 것도 안해주는 거 보면, 내가 아저씨들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요. 소장님이 전문가로서 최저임금이 임의규정이 아니라 강행규정이라는 걸 회의에서 못좀 박아주세요." 소장은 답했다. "그럼요 이사님. 최저임금. 그건 당연히 지켜하는 거지 말입니다."

그러나 회의장 밖에서의 소장과 회의장 안에서의 소장은 다른 사람이었다. 120만원 선에서 맞추라는 회장의 한마디에 소장은 씩씩하고 큰 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네! 가능합니다. 휴게시간을 조정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오십대 후반의 소장은 노회한 자였다. 결코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전에도 이미 휴게시간을 7시간으로 늘려잡고 있고 있던 터였다. 소장은 경비아저씨들의 휴게시간을 8시간으로 조정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관리사무소 서류 중 2014년 근로계약서를 검사하던 어제의 일이다. 나는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근로계약서 상의 휴게시간이 7시간인 채로, 임금에만 8시간의 휴게시간이 반영되어 있었다.

근로계약서대로 라면, 휴게시간을 제외한 근로시간 17시간 중 1.5배 할증이 적용되는 야간근로시간이 2시간. 총 하루 총 18시간에 대한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 2014년 최저임금의 90%는 4,689원. 하루 일당 84,402원. 1년 동안 근무일수 182일. 연봉 1540만원, 월급 128만3613원. 근로계약서에 적힌 월급은 이것보다 4만5천원이 적었다. 1년에 최저임금의 54만원을 덜 받는 셈이었다.






그 중의 한 분은 더 심각했다. 그 분은 다른 분들보다 근로계약서 상의 근로시간이 1시간 많았다. 그런데 정작 임금은 다른 분보다 더 낮게 받고 있었다. 이 분의 경우, 열여덟 시간 근무시간 중 1.5배 할증이 적용되는 야간근로시간이 세 시간. 하루 19.5시간에 대한 임금이 지급되어야 했다. 최저임금을 감안하면, 하루 91435원 연봉 1664만1261원. 월급은 1,386,771원이어야 했다. 이분의 근로계약서 상의 월급은 최저임금보다 20만원이상 적었다. 1년 동안 248만원이나 적은 연봉을 받는 셈이었다.

관리사무소에 전화했다. 임금 산출식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관리사무소 경리주임은 근로계약서 상의 휴게시간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처음 안 듯했다. 허둥대는 눈치가 보였다.

퇴근 후, 다른 동대표와 함께 관리사무소에 갔다. 소장의 말인 즉, 서류상으로만 잘못된 거란다. 아무 문제없다는 식이다. 그리고 오류를 시정했단다. 새로 작성된 근로계약서를 내민다. 소장이 있는 자리에서 경비아저씨 한 분을 불러올렸다.

"아저씨, 지금 아저씨 휴게시간을 어떻게 알고 계세요? " "점심시간 한 시간 쉬고요, 저녁시간 한 시간 쉬고요, 밤 12시부터 아침 5시까지 쉬니까, 휴게시간이 7시간입니다." 이 아저씨가 알고 있는 대로라면, 계약서에서 드러난 것보다 문제가 더 크다. 아침 5시부터 6시까지는 할증이 붙는 심야근로시간이다.

결국, 입대의의 결의에 따른 휴게시간의 변경은, 경비 아저씨들에게 고지되지도 않았던 거다. 심지어 근로계약서에서도 그대로였다. 변경된 휴게시간은 오로지 소장과 경리주임의 머리 속, 그리고 근로계약서상의 임금 란에만 반영되어 있었다.

소장이 새로 고쳐 작성한 근로계약서를 언급했다. "이거 언제 싸인하셨어요." "아까 올라와서 싸인하라고 해서 싸인했습니다. "  내가 전화로 임금산출식을 보고하라고 하자, 그제서야 근로계약서 상의 시간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된 소장과 주임. 2014년 근로계약서의 흠을 가리기 위해 2014년이 다 지나가는 지금, 2014년 1월 1일 날짜의 근로계약서를 새로 작성한 것이다. 엉터리 근로계약서다.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

관할 근로감독관에게 질의했다. 근로감독관은 사용자인 입대의 이사가 최저임금제 위반 사실을 얘기하는 게 의아하다는 식이었다. 하긴 사용자가 최저임금제 위반을 알았다면 근로감독관을 찾아갈게 아니다. 직접 시정하면 될 일이다.

우리 아파트는 자치관리다. 사용자인 입대의는 문제가 될 경우 직접 형사책임을 질 수도 있는 당사자다. 하지만, 입대의의 과실은 아니잖는가? 계약체결의 주체도 관리소장이었다. 자칫하면, 관리소장의 잘못을 입대의가 뒤집어 쓸 판이다. 미지급금을 뱉어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벌금까지도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아파트에 손해가 되는 일이었다. 책임소재를 명확히 가려놓는 게 필요했다.

마침 현 입대의와 새로 구성된 내년 입대의의 상견례 겸 업무인수인계 자리가 저녁에 있었다. 모두 있는 자리에서 현임 회장에게 보고했다. 분위기는 험악했다. 모두들 문제만 불거지지만 않는다면 문제가 없다는 투였다. 소장은 문제가 일어나면 자신이 책임지겠노라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큰 소리쳤다.

새로 구성된 입대의 이사 한 분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 경비아저씨들이 문제를 삼습디까? 왜 정 이사가 나서서 그럽니까?  정 이사는 아파트 편입니까? 경비들 편입니까?"

일류대를 나오신 전직 미술선생님. 내가 두 번을 찾아가 동대표 출마를 읍소했던 바로 그 분이었다. 다섯 명의 입대의 구성원 중 캐스팅보트를 쥔 분. 앞으로도 소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편을 만들어야만 했던 분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2년이 무서워졌다.

2014년 12월 21일 일요일

[라디오특집] 마녀사냥피해자 홍가혜를 만나다! (58분35초)


기획 : 똘레랑
인터뷰 : 똘레랑
구성 : 똘레랑
편집 : 후언니

2014 11.29 인터뷰

2014년 12월 15일 월요일

우리 아파트 관리사무소 소장 어떻게 해야 하나?


바퀴벌레와 개미에 대한 민원이 끊이질 않았다. 주민들 사이에서 우리 아파트 세대 내 소독을 관리하는 업체의 서비스에 대해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급기야, 나는 소독업체와의 재계약을 한달 유예시킬 것을 입대의에 제안하고, 직접 바퀴벌레약을 먹이집에 짜서 전세대 주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지난해 5월24일 경의 일이다.

아파트관리소장은 당시 대한민국 아파트 역사에 동대표가 나서서 이런 일은 한적이 없다는 둥 내심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다.

한달 후, 나는 소독업체 사장을 불러서 서비스품질에 대한 개선의지를 확인한 후, 두 가지 조건을 붙여 6개월간 계약을 연장하는 안을 입대의에 제안하여 의결시켰다.

첫째. 내가 바퀴벌레에 대해 방역을 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개미약을 전세대에 교부한다.
둘째, 6개월 후 주민들을 대상으로 서비스 품질 평가를 실시하여 그 결과에 따라 그 이후 계약연장여부를 결정한다.




이 조건에 따라  소독업체는 지난 7월 12일. 전세대에 개미약을 교부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지난번 바퀴벌레약에 대한 효과를 조사했다. 주민들에게 스티커를 붙이게 하는 방식이었다.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났다. 소독업체 서비스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은 여전했다. 이제 약속대로 업체에 대한 서비스 평가를 해야 할 시기다.  주민들의 불만을 수치화한 자료가 필요했다. 관리사무소 소장에게 바퀴벌레약 설문 조사 때처럼 스티커 설문조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하면 주민들의 참여가 더 많았다는 사실을 나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소장이 실시한 설문조사는 엉뚱했다. 관리소장은 스티커 평가 대신, 조사원 면전에서 답을 작성하는 방식의 서면평가를 실시했다.  더 큰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설문을 위한 소장의 질문은 평가의 목적도 몰각한 엉뚱한 것이었다. 소독업체계약연장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지난 6개월간의 소독 업체의 서비스 품질을 평가한다는 목적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정답을 결정해준채, 설문조사를 실시했네요." 설문을 위한 소장의 질문을 읽어본 우리집 파출부 아줌마의 평가였다.

소장에게 따졌다. 소장은 천연덕스러웠다. "저는요, 대표님이 뭘 바라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직접 설문지를 작성해주시든지요?"

의도가 있다면 불순한 것이고, 의도가 없이 이런 짓을 했다면 이해력이 떨어지는 거다. 둘다 문제다. 소장은 사회적으로 문제시하는 갑질을 언급하며, 마치 내가 갑질을 하려는 양 말하고 있었다. 적반하장격이었다.


도대체 소장은 왜 이러는 걸까?

이번 동대표선거를 통해, 나를 제외한 입주자대표 전원이 교체되었다. 이른바 권력 교체 시기다. 소장이 새 입대의를 좌지우지하려는 낌새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당선자 상견례 자리. 새 당선자 중 한명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소장이 옆에서 추임새를 넣는다. 자기가 다 정리해서 나눠주시겠단다. 별도로 그 당선자의 전화번호를 본인으로부터 받아냈다.

며칠 후, 그 새 당선자에게 연락할 일이 생겼다. 적어둔 전화번호를 집에 놓고 온 탓에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당선자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소장이 안내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자 "없는 국번"이라는 안내가 나왔다. 다시 한번 소장에게 전화번호를 확인해달라고 했다.

"여기는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없는 국번이라고 나오는데요?"

"여기는 그렇게 적혀 있다니까요?"  "지금까지 관리사무소에서 한번도 그 분에게 통화를 한적이 없습니까?"

"없습니다." "문자는 보냈을 거 아닙니까? 나도 후보자와 당선자로서 관리사무소로부터 여러 통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후보자와 당선자로서 받은 안내문자를 이 분은 한번도 못받았다는 겁니까?"

"보내긴 보냈는데.. 받으셨는지 못받으셨는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소장님!! 우리 일 똑바로 합시다! 만에 하나. 내가 받은 문자를 그 당선자님도 받으셨는데, 전화번호를 소장이 잘못 알려주는 거라면, 나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

소장에게 버럭 화를 냈다. 소장은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서야 소장으로부터 그 당선자의 제대로 된  전화번호를 받을 수 있었다.

소장이 나에게 처음 보낸 번호는 진짜 번호에서 숫자  세 개를 바꾼 엉뚱한 것이었다.

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박원순을 위한 변론 - 박원순은 호모포비아인가?



인권침해에 대한 가장 좋은 대응방법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법 아니겠습니까?"

"법이 인권침해의 구제수단도 될 수 있지만, 법은 인권침해의 주체가 될 수도 있어요. 지금까지 우리 국제적인 인권사회가 합의한 인권침해에 대한 가장 좋은 대응방법은 바로 폭로입니다. 폭로는 평화로울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잘못을 똑같이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복수와 구별되지요. 뿐만 아니라, 침해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드러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에, 징벌적 효과와 예방적 효과도 뛰어납니다. 그래서 국제적인 인권단체들은 주로 폭로를  인권침해에 대한 대응수단으로 채택하고 있어요. "

대학시절 박원순 변호사로부터 인권을 배웠다. 누구보다 뛰어난 인권이론가이자 활동가였던 그가 시장이 된 지금. 그를 괴롭히는 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서울시 인권헌장이다.

박원순 시장의 말에서 앞뒤 잘라내서,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 이 부분만 밝힌 다음,  동성애는 지지와 반대가 유효한 영역이 아니네 마네 운운하는 윤똑똑이들의 말은 잠시 접어두자.

박 시장은 이미 명토박은 바 있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첫 번째 국가가 되길 바란다’(<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와의 인터뷰). 이러한 박 시장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박 시장의 이후 발언에서 이 발언과 모순되는 말을 나는 찾을 수 없다.

서울시가 확인한 문제 발언의 정확한 내용은 이러하다. "(동성애에 대해) 보편적 차별 금지 원칙에 대해서는 지지하지만 사회여건상 (종교나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라) 동성애(결혼)를 명백하게 합법화하거나 지지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다.  시.민.사.회.단.체.가 역.할.에 따라 해.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서.울.시.장.으.로.서.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긴다. 여기서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는 말이 과연 어떤 의미인가? 동성애자들의 인권에 반대하고 그들에 대한 차별에 동의한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시장과 시민사회단체의 역할분담에 관한 내용 내지는 동성애자 측들의 '안'에 대한 입장으로 보아야 하나?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이미 명시해놓았다.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 , 성적 지향, 등을 이유"를  가지고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행위를 하지 말라고.

그랬더니, 김조광수라는 자가 나타나 용춤을 췄다. 가족등록사무를 수행하는 공무원들을 졸지에 위법한 인권침해자로 몬 것이다. 동성애자 혼인을 위한 국가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게 빌미였다.

동성애자들이 결혼을 할 권리? 지금은 없는가? 김조광수가 스스로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결혼했다. 국가는 그것을 금지한바 없다.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결혼할 권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국가가 자신들의 결혼을 장부에 적어놓고 관리하고 보호해야만, 자기들이 차별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자신들의 인권이라는 것이 김조광수 일당들의 주장이다.

도대체 국가가 그들의 결혼을 관리하고 보호하지 않아서 그들이 받는 실체적 침해란 무엇인가? 상속권도 없고, 일상가사대리권이 없어서 배우자가 수술을 할 때 동의해줄 수도 없단다. 전세대출도 받을 수 없단다.

상속권이 없으면, 유언을 해주면 된다. 일상가사대리권이 없으면 수권행위를 하면된다. 전세권 대출이 안되면, 전세권대출을 해달라고 주장하면 된다. 그게 과연 국가가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관리하고 보호하지 않으면 차별적 인권침해라고 할 이유인가?

인권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권리”로 정의된다.

이 정의는 인권의 개념에 대한 사람들의 합의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할 것을 예정하고 있다. 추정이라는 것은 반증으로 뒤집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소한의 반증 이전에 가지고 있는  인간의 추정된 권리는 매우 슬프게도 문화적 습속과 감수성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시대와 사회에 따른  변화를 예정하는 것은 인권 개념에 대한 인류의 인지능력일 뿐이다. 인권이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인권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권리라는 뜻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사람 말이다. 노예해방 이전에 존재하던 흑인 노예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인권과 똑같은 인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추정력이 깨지는 과정을 통해 오늘날에서야 비로소 그것이 인권침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

과연, 국가가 자신들의 장부에 적어놓고 결혼을 관리하고 보호해야만 차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동성애자들의 권리. 그것이 과연,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권리", 즉 인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솔직해지겠다. 나도 모른다. 나중에 반증을 통해서 뒤집어질 지도 모르겠지. 그러나, 그들의 권리에 추정력을 부여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의 주장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성공하였는가?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 인권헌장 앞에서 묻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박 시장은 묻는다. "인권헌장은 뭐하러 만드냐"고.  이미 "성적 지향" 문구가 인권위원회법에 명시된 상황이다. 그런데 법률적 강제력도 없는 인권헌장이 우리 사회구성원들에게 인권적 규범을 제시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무엇인가? 다수결인가? 사회적 합의인가?  박 시장은 강조한다. "인권헌장은 표결대상이 아니"라고. 그랬더니,  "박시장, '인권헌장은 뭐하러 만드냐'" 이 한 마디만 따서 용춤을 추는 게 이른바 진보라는 언론들의 작금의 행태다.

헌법재판소 말씀이다. "헌법상 평등의 원칙은 국가가 언제 어디에서 어느 계층을 대상으로 하여 기본권에 관한 사항이나 제도의 개선을 시작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헌법상 평등의 원칙이 이럴진대, 서울시 인권헌장의 평등조항이 국가가 이성애자를 대상으로 하여 기본권에 관한 사항이나 제도의 개선을 시작하는 것을 선택하는 걸 방해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은 뭔가?

동성애자 인권운동가들에게 묻는다. 이미 성적지향이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의해 차별행위로 규정된 마당에 당신들의 서울시 인권헌장과 관련된 작금의 작태는 당신들의 권리 확대에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그대들은 박원순보다 인권에 대한 철학을 지닌 정치지도자를 본적 있는가? 그를 잃는 것이 긴 안목에서 동성애 인권을 위해 득이겠는가? 해가 되겠는가? 신망받는 지도자 한 명을 인질로 잡고, 사회적 합의에 의한 서울시인권헌장의 첫걸음을 방해하려는 자들은 스스로의 행위를 성찰하길 바란다.    

“서울 시민은 누구나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대신에 “서울시민은 성별, 종교, 장애, (중략)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 병력 등 헌법과 법률이 금지하는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라고 쓰인 인권헌장을 갖는 것. 이게 과연 신망받는 지도자 한명을 호모포비아로 몰고 사회적 합의를 갖춘 인권헌장을 포기할 만큼 중요한 문제인가?

2014년 12월 3일 수요일

[심층인터뷰] 국가적 마녀사냥 피해자 홍가혜를 만나다 1

  






















제 나이에 맞는 생각, 
제 나이에 맞는 행동. 그리고 삶.
그냥 평범하게 현명한 부모님 밑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대학 다니다가
직장 다니다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큰일 없이 그렇게 사는거?
어느 회사에 다니든, 사업을 하든
평범하게 연애하고
남들처럼 저렇게 사람들이랑 밥도 먹고
길거리도 다니고..

큰 일에 안 끼고 그냥 이렇게?
사실 내 나이에 사회적 이렇게 ..
회색 세상이라고 하죠?
이렇게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많이 없어요
정치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
나는 그렇게 살고 싶은 거예요.
내 행복. 내 삶에 신경 쓰면서...
그런데 그렇게 안 살잖아요?
오지랖이 넓어서 그래요. 잘 안돼요.
그러니까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게
내 꿈이라고. 꿈..

엄마는 아빠를 많이 사랑했다. 부산까지 아빠를 따라온 엄마가 미혼모가 되었을 때 엄마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할머니와 고모의 손에 집에 들여졌을 때, 아빠는 소리를 질렀다. “왜 데리고 왔냐고? 고아원에나 보내라고!” 다행히 고아원에 보내지진 않았다. 할머니와 고모 덕이었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친엄마가 나타났다. 미국에서 총 맞아 죽었다던 엄마였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학교를 자퇴했다. 머리가 나쁘지 않았던지, 검정고시를 통해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느 날 엄마 같던 고모가 자살을 했다. 약을 먹었다. 할머니와 열일곱 살 조카가 보는 앞에서였다. 119에 신고를 했지만, 어린 조카의 말을 믿어주질 않았다. 장난전화 취급했다. 구급차가 도착한 것은 신고한 후 40분이 지나서였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고모는 이미 숨져있었다.

엄마 같았던 고모의 죽음. 마음껏 슬퍼할 수도 없었다. 고모가 자살할 때, 조카와 싸웠다는 얘기가 돌았다. 심지어 신문에서도 확인하지 않은 사실을 써댔다. 할머니와 함께 경찰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유족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던 경찰.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 모두가 미웠다. 그래도 유족인데...

고등학교를 그만두었다. 할머니가 계시던 집을 떠났다. 독립했다. 열일곱 살이었다.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한 끼 먹는 게 급할 때도 있었다. 버터구이 오징어를 파는 알바, 피팅 모델, 일본에서 식당운영도 해봤다. 호떡도 팔았다. 삼겹살도 팔았다. 명품샵도 운영해봤다. 옷가게도 해봤다. 스스로 생각해도 직업이 참 많았다. 독하게 살았다.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유혹도 많았다. 그래도 마음속의 선은 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특히 섹스만큼은 온전히 자유로운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내가 내 몸도 되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먹는 즐거움.
사랑을 하는 즐거움.
섹스를 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그런 즐거움을
돈을 받고 팔기 싫은 거죠.
내 즐거움을 팔기 싫으니까..
그거 하나는 철저하게 지켜서..

사람은 그 때마다 나이에 걸 맞는 일이 있다. 지나보니, 어린 가혜가 스스로 안타깝고 안쓰럽다. 그 나이의 다른 아이들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모습을 보면 감정적으로 자유로워지질 않았다. 그들의 슬픔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한 고아원과도 연을 맺었다. 어쩌면, 그 고아원에서 자랄 수도 있었다.



그 날, 어쩌면 별 볼일 없을 지도 모르는 잠수경험을 믿고 팽목항으로 달려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아이들이 꼬록꼬록 잠겨가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이미 열일곱 살 때 고모가 죽어가는 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텔레비전만 보고, 인터넷에서 키보드만 두드리며 있을 순 없었다.

베테랑 잠수사는 아니다. 사람을 구조해보지 않았으니까. 다만, 깊은 수심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시야확보가 어려운 야간 다이빙 경험도 있다. 그냥 한 사람이라도 살려보자. 구해보자.

그렇게 도착한 팽목항.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대부분의 민간잠수사들도 투입될 수 없었다. 흉흉한 말들이 돌았다. 답답했다. 패닉이 왔다. 얘들은 물속에서 꼬록꼬록 죽어가고 있을 텐데, 해경이 민간 잠수사들의 투입을 거부하는 이유는 가지가지였다.

방송에서 말하는 상황은 딴 세상이었다. 550명 투입. 120대 헬기. 현장에서의 분위기는 냉소적이었다. “구라치네” “거짓말 하네..” “저봐라 저~” 사고해역의 상황은 잘 몰랐다. 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국은 바지선조차 대주질 않았다.

이미 투입되었던 민간잠수부들의 입에서 생존자 얘기가 나왔다. ‘생존자 확인했다.’ ‘신호를 주고 받았’고. 심지어 ‘대화도 했다’고 했다 . 대화? 이상했다. 잠수를 해봤기 때문에 안다. “어떻게 물속에서 대화가 가능해요? 물 밖에서 했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수면 위에 나와 있는 부분, 그 밖에서 커뮤니테이션이 되었다고 했다.

눈이 뒤집혔다. ‘아! 그런데 왜 안 되는 거야?’ ‘왜 지금 구조를 제대로 안하는 거지?’ ‘큰일 났다. 여기는 고립되어 있구나.’ 마침 MBN 뉴스제작진이 인터뷰를 요청했다.

“에어포켓에 서른 세 명 생존자 있다는 얘기들이 있다.” MBN 제작진이 문자로 보낸 예상 질문지에 담겨져 있는 내용이었다. 제작진은 확인을 부탁했다. 그 질문을 할 거라는 의미였다. 현장에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MBN이라는 뉴스에서 이런 것을 좀 알아봐달라고 하는데 어떻냐? 하나같이 손사래를 쳤다.

“인터뷰를 그렇게 하는 것은 좋은데. 나는 하기 싫다” “왜요? 지금 텔레비전에서는 종편에서는 550명 투입이다 뭐다 이렇게 하고 있는데 현장은 그게 아니라면서요, 다 뻥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안 해요? 왜 못해요?” “야! 너 그렇게 얘기하면 정부에서 발언.. 정부에서 한 게 있는데.. 너 안 돼!! 골치 아파져! 머리 아파져! 하지 마~ ”

4월 18일 새벽. 결국 직접 인터뷰에 나섰다. 인터뷰가 끝나자, 다 잘했다고 했다. 민간잠수사들과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격려했다. “이 얘기는 누군가는 했어야 했다. 잘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을 한 대가는 혹독했다.




느닷없이 전화가 빗발쳤다. 1분에 전화가 10여 통이 왔다. 모든 전화 수신거절을 설정해 놨다. 욕설 문자도 쇄도했다. 모두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문자가 하도 많이 오니, 뭘 누를 수도 없었다. 연락을 누군가에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문자를 확인할 정신도 아니었다. 인터넷은 확인할 정신도 없었다.

인터뷰 당일부터 인터넷에서는 경찰발 홍가혜 잠적설이 퍼졌다. 경찰과 연락이 되자마자, 출두를 약속했다. 출두하기로 한 전날 자진 출두했다. 102일 감옥생활의 시작이었다.

경찰조사에서 수사관이 물었다. “티아라 사촌 사칭한적 있나?” “아닌데요?” 뭐지 싶었다. 검찰조사에서 담당수사관이 물었다. “연예부기자 김용호씨를 아나?” 그때서야 김용호가 뭔가 크게 한판 했다는 걸 알았다. “해경명예훼손이라면서요, 그거랑 이거랑 내가 옛날에 이랬다 저랬다더라 하는 카더라랑 뭐가 중요하죠? 중요하면 얘기할게요.”

병든 할머니가 면회를 오셨다. 수감된 후 한 달쯤 후였다. 파킨슨병. 근육들이 파괴가 되는 병. 종국에는 밥도 혼자 못 드시고, 화장실도 혼자 못가시고 걷지도 못 하게 되는 병. 근육이 제어가 되지 않기 때문에 걸으면 스톱이 안 되기도 하신다. 특별한 치료법도 없다. 지금도 손을 떠신다. 몸이 많이 아프실 때는 움직이지를 못 해서 어디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분도 아니다. 장거리여행도 힘드신 분.

경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경찰이 물었었다. 가족들한테 알려줄 사람 있냐고. “할머니한테 알려줄까요?” “절대 알리지 마라. 집에. 다른 사람에게는 상관없지만 할머니한테는 이 일을 모르게 하라” 부탁했었다. 그런데 언론에서 하도 많이 떠들고, 이웃사람들까지 와서 한마디씩 거드니, 할머니라고 모르실 수는 없었다. 움직이지도 못하시는 분이 수감 한 달 후에 면회를 오셨다. “내 새끼 어떡하냐고.. 내 새끼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내 새끼 어떡하냐.. 내 새끼 불쌍해서 어떡하냐.. ”

아무 말도 안 나왔다. 아무 말도 못했다. 다른 변명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 미안해. 다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진실은 밝혀진다. 할머니 내 걱정하지 말고, 나 여기서 밥도 잘 먹고 잘 자고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할머니가 말했다. “잘 했다. 너 다이빙 배우러 다닌다고 하는 거 다이빙하러 다닌 거 할머니가 알고 그거 거짓말 아니라는 거 알고 네 성격상 애들을 살리려고 간 것도 안다. 가혜야, 너무 억울해 하지 마라. 억울하다 생각하지 마라. 너는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했다. 네가 아니었어도 다른 사람이 했어도 너처럼 이렇게 됐을 거다. 잘 했다.”

고마웠다. 키워주신 친할머니. 할머니는 평생 그 동네에 살면서, 다른 분들한테 피해 한번 안 끼치고 헌신적으로 사셨다. 이런 할머니에게 이웃사람들이 찾아와서 입방아들을 찌고 갔단다. “가혜가 거짓말해서 잡혀갔대.” “가혜.. 거짓말해서 감옥 갔다며?” 우리 할머니는 그게 아닌 거 아는데.. 할머니는 미치시는 노릇이셨을 게다.

미안해요. 할머니한테 제일 미안해요.
아빠 엄마보다 미안한 건 할머니..
나를 키워주셨으니까.
내가 이런 성격이 생겼고.
이렇게 살고 이렇게 예쁘게...
저는 제가 얼굴이 예쁜 게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을 항상 할 수 있고,
이렇게.. 남들 위해서 살 수 있는 이런 것들이
저희 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요?
할머니의 교육, 가르침으로..
그렇게 할머니는 나를 예쁘게 키워주셨는데,
나는 국민악녀가 되었잖아요?
그게 할머니한테 미안하죠.
그렇지만 저희 할머니는.. 고마운 게 그거에요.
이런 저를 사랑한다고 하시고.
잘했다고 해주시고.

수감된 후 한 달은 독방에 있었다. CCTV가 스물네 시간 가동되는 곳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혼거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검찰조사가 끝난 후였다. 그 안에서도 유명했다. 다들 거짓말쟁이 유언비어유포자로 알고 있었다. 이지메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무시했다. 재판에서 유리하게 이런 증언이 있었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그 말조차 믿지 않았다.  말을 막 뱉는 스타일이라 더더욱 그랬다. 사기범조차 말끝마다 “거짓말해서 들어 온 년” 운운했다. 그 안에 있으면 사람들이랑 다투기도 하는 법이다. 무슨 말을 하면 교도관들마저도 거짓말로 받아 들였다.

평생 이렇게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힌 체 살아야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도 나를 이렇게 무시하고 괄시하고 하는구나. 사실이라고 하는데도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구나. 세상에 혼자 있는 기분이었다. 사막에 나 혼자 있는 기분. 가위에 눌린 것 같은데 의식은 있는데 소리를 치는데 아무도 내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 남자친구의 존재가 큰 위로였다.

내가 네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아는데
언론에서는 그렇게 떠들어 대니까
누군가한테 내가
홍가혜 남자친구라는 말도 못 할 뿐 아니라
자기네들 술 먹으러 가는 회식자리에서도
제 얘기가 나오고 이랬데요.
화가 났대요 많이. 그래서 그렇게 얘기 했데요
남자친구도 그렇게 얘기 했데요.
참 세상 무섭다.
자기 이제 자기 위에 사람한테
그렇게 얘기 했데요
참 세상은 무서운 것 같지 않습니까?
홍가혜 사건을 보면 좀 그렇지 않냐고..
그 사람이 무슨 이득이 있어서
거기 가가지구 그렇게 했겠냐?
모든 걸 지금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데
민간잠수부 막은 것도
이렇게 사실로 들어나고 있는데
이런 거 보면 참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인 거 같다고
그냥 제삼자 얘기 하듯이
그렇게 얘기를 했더니
다들 반응이 다들 반응이 그랬데요.
쟤가 뭔 말하나.. 쟤가 뭔 말하나..
그러면서 또 개중에는 그래 억울한 거 같더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때 당시에 뭔가를 하려고 해도
이미 저는 잊힌 사람이 되었어요.
그 때 안에 들어가면서 어떻게 됐는지
사람들이 잘 모를 뿐 아니라
그렇잖아요? 기사한 건 안 났으니까
수감되고 나서는 잊힌 사람이 된 거죠.

수감된 사람들과 사이가 좋아진 건, 같이 보던 텔레비전 뉴스에 어느 날 유가족들이 불처벌 탄원서를 냈다는 게 방송된 이후다. “홍가혜씨 말에 뭐 공감을 하고 사실인 부분들이 많다.” 식의 인터뷰가 방송되자, 비로소 같은 방 사람들이 믿어주기 시작했다.




7월 30일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보석금 500만원을 공탁하는 조건이었다. 할머니가 보증보험을 끊어서 보석금을 해결해주셨다. 같은 방 재소자들이 믿어주기 시작한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때였다.

세상에 나와 인터넷을 보니 기가 막혔다. 눈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티아라 사촌 사칭, 연예부 기자 사칭, 자신을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밝힌 한 악플러까지. 안에서도 조사받을 때 얼핏얼핏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수감된 100일 동안 국민쌍년이 되어 있었다.

목을 매려고도 했다. 달리는 차에 뛰어들려고도 했다.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예전에 밝던 모습이 없어졌다. 만날 인터넷 검색하면서 힘들어하고 울고, 밥을 아예 안 먹거나 폭식을 하고, 잠도 못자고, 남자친구 말 한마디에 예민해졌다. 자주 싸우게 됐다.

남자친구가 많이 힘들어했다. 진짜 많이 힘들었을 거다. 오죽하면 울면서 그랬다. “나도 피해자라고.. 나도 세월호의 피해자다.” 남자친구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자신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옛날에 그 모습이.. 밝고 긍정적이고 그런 모습들이 없어졌으니까.

남자친구가 없을 때
제가 목을 맨 적이 있어요.
근데 남자친구가
뭔가 이상해서 들어왔었던 거죠
바로.. 그런 것도 있었고..

한번은 너무 답답해서 집에만 있었거든요 제가?
답답해서 나와 가지고 씻지도 않고 나와서
차 도로에 1시간을
가만히 앉아 있은 적이 있어요.
차 그.. 인도있는 거기.. 앉아서
그냥 .. 앉아가지고 멍 하게
너무 답답 했어요.
그 '왜'라는 단어하나가 저를
그렇게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아요.

“얼마나 힘들지 알 거 같다.” “힘내세요.” 이런 말을 들어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났다. 웃기는 소리였다. ‘지들이 뭘 얼마나 알아? 뭐? 아픔을 알아? 이렇게 지금 나오고 나서 할 게 아니라 들어 가 있을 때 좀 해 주지. 지금 와서 자기네들이 뭘 안다고. 나에 대해서 정말 뭘 안다고. 왜 마치 나를 다 안다는 식으로 얘기를 할까’ 싶었다. 그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표현할 수가 없다. 지금도 마녀사냥에 대해 떠올리고 생각하고 하면 너무 힘들다.

출구가 안 보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래도 그나마 많이 나아진 것은 이제 법정에서 다 사실로 밝혀졌으니까. 진상 규명까진 아니더라도 그 때 했던 발언이 다 사실로 밝혀졌으니까.

지금도 페이스북 메시지나 카톡으로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게 사실이냐 저게 사실이냐” 자기네들이 검색하면 지금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대답을 안 해주면 대답을 안 하는 걸 보니 너 그게 사실인가 보다 식이다. 대답 안 해주기도 곤란하다. 강요되는 폭력적 질문에 그런 기억 떠올리는 자체가 너무 고통스럽다. 사실이 아니니까.



위로가 되는 유일한 일은 세월호 유가족 분들을 만나는 일이다. 그 분들을 만나면 일단 마음이 편하다. 얘기를 나누면 공감이 된다. 서로 그 사건에 대해서 너무 잘 아니까. 그 분들도 다른 데서 얘기하지 못 하는 속 얘기들을 해주신다. 그런 걸 듣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유가족이 열분 정도. 가끔은 모르는 유가족 분들로부터도 카톡이 온다. 고맙다는 말들을 많이 하신다. 정작 드릴 말씀은 “죄송하다.”라는 말 밖에 없다.

그분들이 ‘고맙다.’
‘가혜씨가 있어서..
자기네들이 당한 일들을
정말 그대로 여과 없이 목격해 준 발언해 준
자기네들 대신에 발언 해 준 가혜씨가 있어서
우리가 숨통은 튀었다.’
그리고 미안하다. 나한테 말하는 게..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 했다. '
구속 됐다는 소리 듣고
석방하라고 강력하게 항의도 하긴 했지만
바로 구해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했다
뭐 이런 말들도 하시면서
어떤 분은 이제 얼마 전에
성호어머님이라고 언론에 나오시는 분인데
성호어머님이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가혜씨 버텨달라. 좀 더 버텨 달라.
역사에 중요한 사건의 증인이 된 걸 잊지 말고
당신은 이 사건에 있어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유일한 사람이 된 걸.. 유일한 사람이 된 걸...
유일한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이 사건에 있어서는 당신이
제일 유일한 사람이라고.. 이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이렇게 맨몸으로 뛰어 들어 그 분들을 위해 이렇게 했던 것. 어떻게 보면 그랬기 때문에 그 분들이 그렇게 표현하시는 지도 모른다. “유일한 사람” 이런 말씀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이제 지지해주는 분들이 많다. 그래도 그 분들의 달콤한 말에 일희일비하게 되진 않는다. 감사할 뿐이다.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러나 그걸 떠나서 위안을 받고 위로를 받는 곳은 유가족들뿐이다. 유가족 분들의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버틸 수 있는 버팀목이다.

이번 달에 선고공판이 있다. 유죄를 받을지, 무죄를 받을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밝혀질 부분들은 다 밝혀졌다. 유죄와 무죄. 그건 법리적인 싸움이니까. 재판부가 정치적인 눈치를 보지 않고 사실만 가지고 판결을 정의롭게 해줄 거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결과를 예단할 수는 없다.

이미 세월호가 정치적으로 많이 기울었다고들 한다. 이 사건도 어떻게 보면 세월호 사건 아닌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판결까지도 정치적으로 기울 수도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유죄가 되던 무죄가 되던 중요하지 않다.

아직도 이 나라를 법치국가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이제 국가를 신뢰할 수 없다. 검찰과 경찰. 검사가 그렇게 무리하게 기소를 했다. 취지는 왜곡되고 검사에 의해 마음대로 해석되었다. 믿고 있던 원칙들은 작동하지 않았다. 불구속수사원칙조차 지켜지지 않았다. 인격과 인권이 무너졌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보장받아할 권리. 그런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사람이 되었다.

원칙을 안 지키는 건 이미 우리나라 검찰의 현주소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사람마다 다른 법칙이 존재한다. 정미홍씨나 권은희씨나 정몽준 아들. 한명도 구속 안 되지 않았나? 힘없고 빽없으면 겪을 수 있는 일. 그래서 좀 더 많이 배워야겠다. 좀 더 내 힘을 길러야겠다. 계속 힘없고 빽없는 바보일 순 없다.

저는 이번 제가 이런 큰일을 겪고 나서
제가 큰일을 겪고 나서 이제 든 생각이에요
바뀐 생각이지만..
아! 꿈이라기보다는
아 내가 이런 일을 당했으니까
앞으로 이런 일을 해야지
뭐 이런 생각이 들 거 아녜요?
근데 어.. 저는 평범.. 아까도 얘기했지만
평범하게 살고 싶고
내 나이에 맞게 살고 싶거든요?
하지만 저도 언젠가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고
이렇게 하나의 가정의 엄마가 될 거잖아요?
내 자식한테 이렇게 얘기 해 주고 싶어요.
진실과 사실과 정의를 외치면
억울하게 마녀사냥 당하지 않고
배고파지지 않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깐 썩은 사회에서는
진실과 정의를 외치면
배고파지고 왕따가 되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게 되지만
더 이상 썩은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진실과 정의를 외치면 배 안고파지고
왕따 안 되고 억울한 감옥살이 할 일 없다.
내가 할머니한테 받았던 가르침 그대로
양심을 항상 살찌우고 살아라.
그렇게 살아도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준다는 말을
해 주고 싶어요.

엉뚱한 생각이지만, 만약 무죄를 받는다면, 수사했던 경찰과 기소했던 검사를 찾아가고 싶다. 왜 그랬는지 묻고 싶다. 그러고 나서 다 이제.. 다 내려놓고 돌아가고 싶다. 예전으로..






2014년 10월 28일 화요일

법률가 박민식 의원의 천박한 법철학


1. 흉기는 들고 오셨나요?
2. 물건만 훔치러 오셨나요?
3. 그냥 도망치실 건가요?
4. 몇살이세요?
5. 혹시 어디 아픈 곳 있어요?

이를 물어보고
제압하거나 방위행위를 해야
정당방위로 인정 받는 것 아니냐?

국회 법제사법위원인
새누리당 박민식 의원의 질문이다.

문제의 집주인이 어떤 짓을 했는지
퍈결문을 통해 한번 톺아보자


서랍장을 뒤지며 절취품을 물색하던
피해자 ***을 발견하고는
“당신 누구야?”라고 말한 뒤,

피해자에게 다가가
주먹으로 피해자의 얼굴을
수 회 때려 넘어뜨리고,

피해자가 넘어진 상태에서도
계속하여 도망을 하려 하자

피해자가 팔로 감싸고 있던
뒤통수를 수 회 차고,

뒤이어 빨래 건조대를 집어들고
피해자의 등 부분을 수 회 때린 뒤,

피고인의 허리에 차고 있던 벨트를 풀어
피해자의 등 부분을 수 회 때렸다.

박민식의원 말인 즉,

흉기를 들고 왔는지 모르면,
이런 짓을 해도 된다는 거다.

물건만 훔치러 온 게 아니라
가족을 해칠지 모르면,
이런 짓을 해도 된다는 거다.

그냥 도망칠 것 예상할 수 없으면,
이런 짓을 해도 된다는 거다.

도둑이 몇살인지 모르면,
이런 짓을 해도 된다는 거다.

박민식의원은 이런 짓들이
과연 방위의 의사로 한 짓들로 보이는가?
침해의 의사의 산물로 보이는가?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 반격을 한다!"
"'이 시키 잘 걸렸다 너도 한 번 죽어봐라"

집주인의 행위가
과연 이 중 어떤 의사의 산물인가?

박민식의원 왈
 "도둑 뇌사 사건은
대한민국의 법 역사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라며
법이 누구의 편인지 알려주는 사건"이랜다.


이렇게 법이 누구의 편이어야 한다는
박민식의원의 사고 자체가 천박하고 유치하다

절취의 의사로 절취품을 물색하러 가택에 침입한 자는
어떤 잔인한 복수를 당해도 싸다는 것이
박민식 의원의 법철학인가?

그렇다. 법은 피해자의 편이어야 한다.
그러나, 가해자 피해자 관계는
일면적이지 않고 총체적이며,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해간다.

남의 집에 침입하여
절취품을 물색하는 행위에 대한 피해자?
물론 집주인이다.

그러나, 집주인이
침해의 의사 내지 복수의 의사로
사적형벌을 가한 순간부터
피해자는 침입자다.

단순히 도둑의 인권이 아니라,
피해자 인권을 말해야 하는 이유다.

법은 범법자의 행위를 처벌할 뿐
그의 인격은 처벌 불가능한 권리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법이 누구의 편 식의
얄팍한 법철학을 가지고 있는 자가
대한민국의 검사였으며, 지금 국회 법사위원이라는 것..

이거야 말로
우리 법 역사에
아주 중요한 사건 아닐까?
 

2014년 10월 25일 토요일

도둑을 때린 것이 정당방위가 아니라는 판결이 불합리하다고 볼 수 없는 이유



도둑을 때려서 뇌사상태로 빠지게 한 사람. 그에 대해 실형을 선고한 것을 두고, 어제 하루종일 시끄러웠다. 법이 잘못되었다는 사람도 있고, 판결이 잘못되었다는 사람도 있다. 도둑 무서워서 살겠냐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 도둑을 때린 죄로 실형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법과 판결을 성토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조차, 이 사건의 자세한 사건의 내막을 잘 알지는 못한다. 사건을 판단하는데 주어진 정보는 제한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둑을 때려서 실형을 살게 된 사람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것은 혹시 우리 안에 도둑은 때려도 괜찮다는 의식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나 또한 그러하다.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다. 다만, 신문기사를 통해 알수 있는 주어진 정보들을 취합해서, 여러가지 가능성들을 타진해보기로 했다.

    지난 3월8일 새벽 3시15분께다. 원주시에서 집에 귀가한 최모(21)씨. 누군가가 거실 서랍장을 뒤지는 것을 발견하고, 순간 도둑임을 직감하고 격투 끝에 몰래 집으로 들어온 김모(55)씨를 제압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 과정에서 최씨는 도둑의 머리 부위를 발로 여러차례 차고 알루미늄 빨래 건조대로 등 부분을 수차례 내리쳤다. 하지만 이로인해 도둑은 의식을 잃어 응급실로 후송돼 5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일단, 시간이 눈에 들어온다. 새벽 3시15분. 야간이다.

이 시간이 중요한 이유는 형법제21조 3항 탓이다. 이 조항은 과잉방위가 야간 기타 불안스러운 상태하에서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으로 인한 때에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야간인 것은 틀림없어서, 형법제21조3항이 적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는데, 이 사건 판결을 볼 때,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과 관계없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점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최 모씨가 수사기관에서 조서를 작성할 때가 중요하다. 최모씨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양심에 거스르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개연성이 크고, 이에 따라,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설명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모씨가 당시 자신의 심리상태를 설명하면서, 만약 자신의 상태를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과 관련없이) 침착했던 것으로 진술하거나, 침착한 상태였다고 확신케할만한 정보를 제공한 사실이 있다면? 형법 제21조3항의 적용은 물 건너 간 거다.

둘째, "도둑"이 눈에 들어온다.

강도가 아니라는 거다. 사실 절도는 순수재산범이다 그런데도, 보통의 경제범과는 심하게 다르게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피해액이 훨씬 큰 배임, 횡령, 사기에 비하자면 더더욱 그러하다. 일단 사건을 강력사건으로 분류할 뿐만 아니라, 세간의 인식도 강도와 크게 다름없이 보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강도로 발전할 위험이 크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 같은데, 강도로 발전하지 않은 이상, 도둑은 그냥 도둑이다. 게다가 이 사건 도둑은 흉기조차 소지하지 않은 순수한 도둑인 것으로 알려졌다.

    "법이 정의를 추구하는 공정함에 무게를 두기 보다는 그저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기득권층의 도구로 쓰이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법은 의외로 기득권층의 폭력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지만 피지배계층 국민들의 폭력에 대해서는 매우 엄정하다"

파워트위트리안인 김빙삼 옹께서 이 사건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나는 의심한다. 도둑을 일반적인 경제범과 다르게 취급하거나 도둑에게 지나친 공포심을 가지는 것이야 말로,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기득권층의 도구로서의 법과 관계가 깊지 않는가? 실로 공정한 사회라면, 도둑이든, 배임이든, 사기든, 똑같이 취급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셋째, 격투 끝에 몰래 집으로 들어온 도둑을 제압해 경찰에 신고하셨단다.

물론, 그 도둑? 현행범이다. 그리고, 현행범인은 누구든지 영장없이 체포할 수 있다. (형사소송법 212조) 또한 최씨처럼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리 아닌 자가 현행범인을 체포한 때에는 즉시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리에게 인도하면 된다 (형사소송법 213조) 최모씨는 수사기관에 인도할 생각으로 직접 체포를 시도한 듯 보인다.

문제는 그 체포과정에서 불필요하게 지나친 폭력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자신이나 가족의 신체의 실체적인 위협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폭력은 제압과 체포에 꼭 필요한 정도에 그쳤어야 했다. 만약 쓰러진 도둑의 머리부위를 발로 여러차례 찼거나, 불필요하게 도구를 사용하였다면, 그것은 "폭행"에 해당한다.

만약 최씨의 조서에서 최씨가 방위의사를 확인할 수 없고 체포의사만 드러냈다 치자. 만약 추후 방위의사를 드러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관적이지 않고, 변호사의 조언을 받은 이후에 말이 바뀐 것이라면, 당시 최씨에게는 방위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판사가 믿는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니다. 이래서 변호사의 조언은 처음부터 받아야 한다. 변호사가 오기 전에는 묵비권을 행사해야 할 이유다.




경찰수사단계에서의 정당방위 8가지 기준이라는게 세간의 조롱과 함께 돌아다닌다. 이 8가지 기준이라는거? 경찰 '내부' 지침이다. 수사시에 정당방위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검찰과 법원에서 판단하게 하라는 의미다. 하지만, 경찰이 체포를 할 때, 당할 수 있는 폭력을 제압할 때 준수할 지침의 성격도 강하다고 보여진다. 도망가는 범인의 등에 총을 쏘지는 말라는 거다.

법조문에서는 정당방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

(1) 현재의 부당한 침해가 있을 것,
(2) 자기와 타인의 법익을 방위하기 위한 행위일 것,
(3)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것

법이 이렇게 정당방위의 요건을 엄격하게 제한하는데는 특별한 이유와 법치주의의 철학이 담겨있다. 법치사회에서 사형(私刑, 사적형벌)이나 복수는 금지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정당방위가 자칫 사형이나 복수의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선빵을 자기 폭력의 알리바이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거다. 상대방의 선빵은 자신의 폭력범죄를 유발한 동기로서, 형량에 참작할 인자가 될 수는 있을 지언정.. 자신의 위법행위에 대한 면허가 될 순 결코 없다.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나 강도를 발견하였는가?  가능하다면 퇴로를 차단하고 지체없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최선이다. 만약 직접 체포가 필요하다면, 최소한의 폭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할 자신이 있을 때만 직접체포를 감행하여야 한다.

만약 현행범을 직접 체포한답시고, 오로지 체포와 제압을 목적으로 물불가리지 않다가는 이처럼 법의 처벌을 피할 길이 없다는 거. 이번 사건이 주는 큰 교훈이다. 현행범에 대해 우리에게 허락된건 폭행이 아니라 체포 뿐이다.


2014년 10월 24일 금요일

경비아저씨들. 결국 짤라야 하나.. 입주자대표의 고민.


내가 사는 아파트의
장기수선충당금 사정이 별로 좋지 않다.
1개동당 1억3천만원 가량 비축되어 있는데..
이 금액이 현실에 비해 턱도 없다.

내년엔 외벽의 트랙을 보수하고,
외벽과 복도 페인트칠도 새로 해야 하는데,
여기에 드는 돈이
한 동당 3500만원 (추정)

엘리베이터도 20년 정도 지나서
내구연한이 지난지 오래고,
안전문제와 보수비용을 감안하자면 교체해야 마땅한데,
이를 모두 교체하는데 드는 비용만 대당 4000만원선
한 동에 두대씩이니, 한동당 8000만원 (추정)

지금 보유한 장기수선충당금으로는
장기수선계획은 커녕..
당장 시급한 보수도 해결하지 못할 지경..

아파트 주민들 부담을 고려해서
각 세대로 부터 매달 걷는 장충금을
오랜 기간 8000원선에서 묶어놨던 게 화근이다.

올해 겨우 12,000원으로 올렸는데,
내년엔 20000원, 후년엔 30000원으로 올려야 할 판이고,
시급히 지출해야 하는 금액을 감안하자면,
이렇게 짜놓은 인상시기도 앞당겨야 할 판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입주자 부담을
어떻게 최소화하여야
할 것인지 하는 점.

결국
일반관리비와 경비비를 줄이는 것이
장충금인상으로 늘어난 입주자 부담을
최소화하는 길인데..

가슴 아픈 일은 그 과정에서
경비아저씨들이 희생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점이다.

박봉에 시달려온
우리 아파트
경비아저씨들.

내년부터는
최저임금적용유예가 끝나서
경비아저씨들에게도
최저임금이 적용된단다.

올해까지는 여느 아파트처럼
휴게시간을 제멋대로 부여하는 꼼수를 부려서..
월급을 억지로 맞춰왔던 것 같은데..

내년에 내가 재선하게 된다면,
내 손으로 그런 불합리를
그렇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당연히 경비비의 부담이
훨씬 늘어날수 밖에 없는데..
아! 결국 방법은
구조조정 뿐인가?

아파트의 사정과
주민들의 부담을 생각하자니
구조조정밖에 답이 없고..
경비아저씨들 생각하자니..
죄송하고 가슴이 아프다.

솔직히 이 분들께
범죄예방의 기능은
사실상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아저씨들 탓이 아니라,
우리 아파트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생긴 문제인데,
이 아저씨들의 주업무는
택배수령과 재활용품 분리작업.

만약 이 분들을 내쫓자면,
경비아저씨가 매주 담당해오던
재활용분리수거작업을
각 세대가 돌아가며 직접 해야한다.
2년에 한번꼴로 차례가 돌아온다.

무인택배수거함을 만들거나.
택배수령시스템도 다시 짜야 한다.



지금까지는
장기집권하던 기존 동대표들을 견제하느라,
이런 것을 신경쓸 틈도 없었다.

만약 내가 내년에 재선되어
한번더 봉사할 기회가 주어지고
새로운 입대의가 구성되면..
이 문제와 관련한
공청회부터 해야 할 듯하다.

과연 주민들의
선택은 무엇일까?

인상된 장충금을 포함하여
지금보다 세대당 2만원이 넘는
관리비 인상분을 감당할 것인가?

아니면, 경비아저씨가
안계시게 됨으로써
겪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것인가?

2014년 10월 20일 월요일

가정폭력의심사건 신고후기




일요일 아침, 나를 깨운 것은 어느 남자의 폭언이었다.

"씨팔뇬아" 우당탕탕~!

아래 층 쪽이었다. 놀래서 일어나 침대에 앉았는데.. 점시 멈췄던 폭언과 물건던지는 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그만하나 싶으면, 또 이어지고 그만 하나 싶으면 또 이어졌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아마도 아래층쪽에  분노조절에 애로가 계신 분이 이사온 모양이다.

내려가서 경비아저씨를 모시고 올라왔다. 바로 아랫집인 듯 했다. 현관문이 열려있었다. 건장한 체격의 중년남자가 부서진 가재도구를 복도로 내놓고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별일 아닙니다."

남자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뭔가를 더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경비아저씨를 내려보내고, 다시 집으로 올라왔다. 이제는 멈추겠지. 그런데, 잠시 후, 또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우당탕탕~! 씨팔뇬아"

다시 뛰어내려갔다. 조용하다. 그놈의 폭언소리는 내가 내려만가면 멈춰졌다. 아까 그 집이 맞긴 맞는걸까? 그 옆집 벨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동대푭니다~"

그 댁의 아주머니가 문을 열었다.

"소리나는 곳이 옆집 맞나요?"

"... 7시반부터 "

조용한 대답에는 우려와 짜증이 섞여있었다.  핸드폰시계를 보니 10시다.  집에 다시 올라왔다. 이를 어쩌나. 텔레그램 친구에게 이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다.

"뭐해? 언능 112 신고해~" "가정폭력방지법이 있으니 경찰에 집에 진입할 거야" "언능 전화해! 112"

"국가공권력 그럴 때 써먹으라고 세금내는 거야." "  빨리" "그러다가 누구하나 죽으면 어떻게 하려구"

"지금 경찰이 진입해서 그 상황을 종료시키는 게 가장 근선무"

텔레그램을 나누던 중, 또 온동네가 떠나가게 욕소리가 들렸다.

"야~ 이 씨발뇬아~"

112로 SMS 문자를 쳤다.

"저기요, 경찰이죠? 밑집에서 부부싸움을 하는데요.. 아니 부부싸움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를 잡는 것 같은데요"

"아침부터 지금까지 물건던지는 소리, 욕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답문이 왔다.

"정확한 위치를 말씀해주세요" "^%$#동 ^%$# 아파트인데요"

"저는 1234호 사는데, 소리는 1134호쯤으로 추정됩니다."

"몇 호인지는 모르시나요?" "저희 밑집 1134호 같습니다. "

"경찰관 출동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채 10분도 지나지않아, 핸드폰이 울렸다.

"경찰관입니다~ 현장에 왔는데요, 지금은 진정이 된 거죠?"

"아! 경찰관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내려갈게요."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갔다. 경찰관 두명이 문제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이 집이 맞습니까?" "네"

탕탕탕.. "경찰관입니다. 문좀 열어보세요. "

안에서는 침묵만이 흘렀다.


다른 경찰관은 복도에 내놓여있는 부서진 가재도구를 살펴보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내가 들은 소리를 경찰관에게 설명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현관문을 열고 여자가 나왔다.

"무슨 일 있습니까?"

"별일 아닙니다."

"잠시 나와보세요."

출동한 경찰관은 능숙했다. 여자는 나왔고, 현관문이 닫혔다. 밖으로 나온 여자는 생각보다 어려보였다. 연신 침착하고 차분하면서도 단호히 "별일 아니라"고 얘기하던 여자의 목소리.

별일 아니라는 말에도 경찰은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최선을 다해 상황을 파악해보려는 마음이 읽혔다.

"몇 살이에요?" "열 일곱살이요."

어휴, 고등학생이다. 예뻤다. 이 집 딸인 듯 했다. 대답이 되풀이 될 때마다 목소리는 점점 잠겨왔다. 눈가엔 울음을 참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곧 현관문을 열고 남자가 나왔다. 현관문 밖에서 경찰관이 돌아가지 않고, 딸과 오랫동안 얘기하는게 불안했었을까? 남자는 술에 취해있었다. 이마에 빨간 생채기가 나 있었다. 남자는 말했다.

"아니 성질이 나면 내 집에서 소리도 지를 수 있고 그런거지. 도대체 누가 신고를 했답니까?"

경찰관 뒤에 있던 내가 답했다. "이 아파트 동대표인데요, 내가 신고했습니다. "

남자는 이게 신고할 일이냐며 나에게 따지고 들었다. 경찰관은 나에게 올라가라고 손짓했다. 불필요한 다툼을 막으려는 듯 보였다. 집으로 올라왔다.


애써 울음을 참으며 잠긴 목소리로 "별일 아니라"고 말하는 애띤 여고생이 눈에 밟혔다. 출동한 경찰관에게 문자를 쳤다.

"경찰관님. 혹시 가내에 진입해서 내부 사람들 안전을 확인하는 건 법적으로 어려운 일인가요?"

15분쯤 후, 답문이 왔다.

"안쪽의 상황은 확인하였고, 딸도 이상없다고 하여 한번 더 주의를 주었습니다.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있을 경우 다시 한번더 신고해주세요."

"네 고맙습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

경찰관은 능숙하고 유능해보였다. 아마도, 남자와 얘기를 하다, 동의를 얻고 집에 들어가 확인을 한 듯 했다.



경찰관이 돌아간 후 30분쯤 되었을까?

또 욕설이 들린다. 이제 대놓고 베란다에서서 창 밖으로 욕설을 울부짖는다. 답이 없는 이웃이다.

"씨팔뇬 새끼.. "

도대체 저 남자의 분노는 무엇 때문인 걸까? 저렇다고 분노가 해결될 리는 없는데..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는데 애로가 있는 남자, 저 안에서 또 공포에 떨고 있을 가족들.. 욕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쓸어내려야할 우리 아파트 주민들.. 아까 출동한 경찰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지금 베란다에 서서 창밖으로 온동네가 떠나가게 '씨팔뇬' 소리지르고 있는데요..  처벌이 무겁지 않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경범죄처벌법 위반 범칙금 스티커라도 발부하시면 안되겠습니까? 소란죄나? 불안감유발 조항에 해당되지 않겠습니까? "

경찰관은 침착했다.

"가능하긴 합니다만, 신고하신 분이 동대표님인 거 저 사람이 아는데요, 이웃간에 앙심을 품을 수도 있고요, 더 큰 다툼이 생길수도 있고요. 제가 한번 다시 가서 주의를 주겠습니다."

"에효, 제가 다른 주민들이 피해보는 거 보고만 있을 순 없잖습니까? 전 괜찮고요. 하여간 여러차례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경찰관님."

잠시 후 경찰차가 한번더 다녀간 이후에야, 아래집은 조용해졌다.



오늘 회사에 있는데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여자경찰이었다. 여성계라고 했다.

"험한 소리가 이번이 처음인지, 자주 났었는지.. " 이것저것을 캐물었다. 현장출동경찰관을 통해서도 상황을 다시 파악하시겠단다. 여자경찰관이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런 일이 밑집에서 또 발생하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 때마다 신고해달라고.

가정폭력 의심사건은 현장경찰관이 상황종료하더라도, 입건여부와 무관하게 관할서 여성계에서 주시하면서 관리하는 모양이었다. 나름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있는 것 같았다. 이처럼 경찰의 대응이 믿음직한 경우가 나에겐 처음이었다.






2014년 10월 14일 화요일

자본이 시민불복종운동을? 카카오톡의 영장불응선언



다음카카오가
감청영장 불응을 선언했다.

텔레그램의 망명이 느는 가운데,
상장 예정일 직전에 이뤄진 선언.

영장집행에 불응하겠다는 건,
법질서에 대한
일종의 불복종선언이다.

네이버 사회학사전은
시민 불복종에 대해
특정한 법률의 의심스러운 비정당성이나
도덕적 정당화의 결핍에 대해
공공의 관심을 모으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고의로 법률을 위반하는 공공연한 행위라고 말한다.

처벌을 감수하고,
비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저항권과 구별된다.

간디의 불복종이 그 시초다.

군대 대신에 감옥을 택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행위 또한
불복종운동에 속한다.

법률의 비정당성이나
도덕적 정당화의 결핍이 의심되는 마당에
기업의 대표자가
법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고객의 정보를 보호하겠다는 거?

평상시라면 가상한 일이다.

그런데, 상장 직전에 이뤄진
울며겨자먹기식의 불복종선언.
여기에 과연
어떤 사명감이 숨어있을 지.

법 질서까지 불복종하게 만드는 그들의 결단이
부디 자본의 논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고객의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명감에서
출발하기 바라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인가?

부당한 법질서를 바로잡아
인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일.

시민의 저항으로는 불가능했던 그 일이..
자본의 논리로 한순간에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점은
개운치 않다.

오! 법질서 마저 무능화시킬 수 있는
위대한 자본의 힘이여!

투표로 정치인을 잘 뽑는 거보다
소비자 운동을 통해
기업과 자본을 지배하는 것.

이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어쩌면, 그게 더 현실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거.
카카오톡의 선언이 깨우친 교훈이다.


ps.

바보.
나같으면
서버를 압수수색이 불가능한 외국으로
옮기겠다고 선언하겠다.


2014년 10월 2일 목요일

서북청년단의 만행백태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 강매


당초 서청은
민간인 자격으로 제주도에 들어왔다.
처음엔 주로 엿장수를 하다가
점차 세력이 커지자
이승만의 사진과 태극기를 강매했다.
4. 3이 발발하자 서청은
경찰로 또는 군인으로 옷을 바꿔입었다.
과거에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를
사지 않았던 사람들은 총살되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말 태우기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그 위에 태워 빙빙 돌게 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뺨 때리기


또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을 때리도록 했다.
머뭇거리거나 살살 때리면
곧 무자비한 구타가 가해졌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오라리, 고은

제주도 토벌대원 셋이 한동안 심심했다
담배꽁초를 던졌다
침 뱉었다
오라리 마을
잡힌 노인 임차순 옹을 불러냈다 영감 나와
손자 임경표를 불러냈다 너 나와
할아버지 따귀 갈겨봐
손자는 불응했다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경표야 날 때려라 어서 때려라
손자가 할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세게 때려 이새끼야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세게 때렸다
영감 손자 때려봐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때렸다
영감이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다
이놈의 빨갱이 노인아
쎄게 쳐
세게 쳤다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손자
울면서
서로 따귀를 쳤다
빨갱이 할아버지가
빨갱이 손자를 치고
빨갱이 손자가
빨갱이 할아버지를 쳤다
이게 바로 빨갱이의 놀이다 봐라
그 뒤 총소리가 났다
할아버지 임차순과
손자 임경표
더 이상
서로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
총소리 뒤
제주도 가마귀들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다


총살박수치게하기


심지어는 총살에 앞서
총살자 가족들을 앞에 세워놓고
자기 부모형제가 총에 맞아 쓰러질 때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표선면 가시리 안공림 씨(58)는
여덟 살 때 총살장에서 박수를 쳤던
끔찍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너무도 끔찍해 눈을 뜰 수도 없었지만
벌벌 떨며 박수를 쳐야 했다" 고 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초토화작전


10월 5일 중앙정부는
제주도 출신으로
그간 온건책을 지향해온 경찰청장을 사퇴시키고
강성 인물을 새 경찰청장에 임명했다.
이어 경비대 총사령부는
10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병력을 증파했다.
10월 17일에는
제주도 주둔 9연대장의
포고가 발포되었다.
포고문은
해안선에서 5km 이외 지점의
통행금지를 명하면서
이를 어길 경우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주도의 지형상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지점'은
특정한 산악지역이 아니다.
해변마을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들이
이에 해당한다.
중산간에서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발포하겠다는
무시무시한 작전이 수립된 것이다.
가장 참혹한 희생은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무렵까지
약 4개월 동안에 발생했다.
이른바 '초토화작전' 이 벌어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을 덮쳐 온 가옥에 불을 지르고
80대 노인에서부터 젖먹이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토벌대는 초토화작전을 감행하기에 앞서
10월 18일 제주 해안을 봉쇄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제주도 출신 군경검 학살..


서청의 위세는 너무도 커서
제주 출신은 경찰조차 꼼짝 못했다.
중문면 상예리의 강기주는
당시 제주경찰청 고위 간부인
강기천 총경의 동생이었다.
초토화작전이 막 시작되던
1948년 11월 중순께 서청이
상예리에 들이닥쳤다.
모두 죽을 위험에 놓였을 때 강기주는
"나는 강기천 총경의 동생입니다. 무고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청은
"경찰 간부면 다냐. 이 새끼는 더 악질이다"
라며 그 자리에서 먼저 총살했다.

1948년 10월 말부터 11월 초순 사이에
9연대 장병 1백여 명이
군사재판도 거치지 않고
불법적으로 처형되었다.
희생된 군인들은 주로 제주 출신이었다.
같은 시기인 11월 1일 제주도 경찰당국은
경찰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 프락치를 색출했다고 발표했다.
무장대에 동조한 혐의를 받은 군인과 경찰들은
바닷물 속에 수장되었다는 풍문만 전해질 뿐,
대부분 시신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이로써 초토화작전의 걸림돌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주읍내에서는 제주도청 공무원을 비롯해
교육계와 언론계 등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9연대 본부로 끌려가 감금당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중학교 교장, 제주도 총무국장,
재산관리처와 신한공사 직원들이 학살되었다.
심지어 제주지검 검사를 포함해
법조계 인사들까지 끌려가 죽었다.
읍내 사정이 이 정도이고
지방 주민들의 처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언론인 학살


열세살 소년을 고문해서 죽게 만든 사건이
48년 9월15일자 중앙신문들에 보도되자,
언론마저 토벌대의 토벌대상이 되었다.
48년 10월 경향신문 제주지사장 현인하와
서울신문 제주지사장 이상희가
끌려가 처형당했다.
지역언론사인 제주신보
사장과 전무가 끌려갔고,
편집국장은 총살되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겁간 학살하기


야수로 돌변한 토벌대에 의해
여성들의 수난도 컸다.
성산면 시흥리의
박태수 할머니(당시 60대 중반)에게는
스무 살 가량의 손녀가 있었다.
주변에 소문난 미인이었다.
서북청년단원이 그녀를 탐했지만
할머니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화가 난 토벌대는
할머니를 대낮에 길가로 끌어내어 총살했다.
안덕면 감산리의 강매옥(당시 19세)은
군인들의 겁탈을 죽음으로 막았다.
강매옥의 언니 감경옥 씨(78)는
지금도 학살자의 성씨와 얼굴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친정집에는
군인 3~4명이 임시주둔했는데
그 중에서 '최상사'라는 놈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동생은 참 예뻤지요.
그놈들은 처음에 처녀들을 몇 명 집합시켰다가
동생이 제일 곱다고 생각했는지 덮쳤습니다.
그러나 맘대로 되지 않자 총을 쏜 겁니다.
동생은 배꼽 부근에 총을 맞아
창자가 다 나올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숨졌습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1948년 12월 14일 밤
표선면 토산리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주민들을 향사에 집결시킨 후
1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를 따로 세웠다.
또 "달을 쳐다보라"고 한 후
달빛에 비춰가며 젊은 여자들을 불러냈다.
불려나온 150명이
군인들에게 끌려갈 때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그 이유를 몰랐다.
이들은 18일과 19일 이틀 동안 총살당했다.
한 유족은 "만일 사상문제를 구실 삼는다면
18세부터 40세까지만 사상이 있으며,
유독 젊고 예쁜 여자들만
사상에 연루되었겠느냐"고 항변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4.3 발발 이듬해 봄으로 기억되는데,
금덕리에서 소개온 한 처녀가
하귀지서에 끌려와 매일 전기고문을 받았어요.
사라진 오라버니를 찾아내라는게 빌미였지요,
그녀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몰래 도망쳐 바닷가에 숨었지만
며칠 후 경찰에 붙잡혔지요.
경찰들은 하귀국교 동녘밭에
남녀 대한청년단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녀를 끌고 왔습니다.
그 땐 너나 할 것없이
대한청년단원이 돼야만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앞에 끌려왔을 떄
그녀는 이미 초주검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를 홀딱 벗긴 후
'여자니까 대한청년단 여자대원들이 나서서
철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린 기겁을 했지요.
누가 나서서 찌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단장인 한 여자가 나서서 먼저 찔렀어요.
경찰은 모두들 한번씩 지르라고 했습니다.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내 차례가 되기 전에
그 처녀는 이미 죽었습니다.
경찰은 시신을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죽음을 확인하고는
남자들에게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토하고 밥도 못먹고 난리가 났어요.
또 그 일로 몹시 앓았습니다.
사촌언니는 그 떄 찔렀다면서
그 후 막 아파서 죽다 살아났다는 겁니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 앓는 것이 당연하지요.
내가 죽어서야 잊혀질 일입니다.
그런데 경찰들은 그녀에게 몹쓸짓을 하려다
안되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친구는
"몸을 줬으면 살수도 있었을텐데...'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김계순, 당시 열덟살, 제주4.23사건진상규명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진상조사보고서.)

그들은 또 여맹이 뭣하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촌 처녀들을 붙잡아다가
공연히 여맹에 가입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발가벗겨놓고 눈요기를 일삼았다. ...
지서에 붙들어다놓고
남편의 행방을 대라는 닦달 끝에
옷을 벗겼다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그건 간밤에
남편이 왔다갔는지 알아본다는 핑계였는데,
남편이 왔다갔으면 분명 그짓을 했을 것이고,
아직 거기엔 분명 그 흔적이 남아있을테니
들여다보자는 것이었다.

(현기영, 순이삼촌, 창작과비평사, 1979)

사살 연습

우리 마을 북촌리에
대학살이 벌어지던 그날,
아침부터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군인들이 마을 동쪽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설이 있으니
학교 운동장으로 집합하라 했습니다.
군인들은 우선
경찰가족, 군인가족을 따로 분리시키더군요
낌새가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은
사돈의 팔촌이라도 경찰이 있으면
경찰가족쪽으로 줄을 섰습니다.
군인은 우선 민보단 간부를 불러내
바로 총살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사람이 죽었씁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엎혀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김석보, 1998, 63세, 조천읍, 북촌리)



강요배, 젖먹이



강제 성행위


미친 짓거리는 점점 심해져 갔다.
연행자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남녀 모두 옷을 벗긴 후
강제로 성행위를 시키다
총살한 일도 있었다.
4. 19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국회에 양민학살 진상규명 특위가
구성되었을 때
한 증언자는 제주도를 찾은 국회의원들에게
"군인과 서북청년단들이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서
정조를 맺게 하고 총살시켰다" 고 폭로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함정토벌

토벌대는 무장대처럼 낡은 옷으로 변장해
민가에 들어가 "산에서 왔다"며
식량을 요구하거나 숨겨줄 것을 애원했다.
측은하게 여겨 밥을 주는 사람은
곧바로 본색을 드러낸 토벌대에게 총살되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대살

토벌대는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 이라며 수시로 학살했다.
48년 12월 13일
대정면 상모리와 하모리 주민 48명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1948년 12월 22일 표선리로 소개한
가시면 주민 76명이
속칭 '버들못'에서 집단학살되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호적을 일일히 대조했다.
그 결과 젊은이가 사라진 경우엔
"폭도로 산에 오른 게 분명하다"며 총살했다.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총살극을 구경시켰다 하여
"관광총살'이라고도 부른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자수사건

또한 여기저기서 소위 '자수강연'이 열렸다.
토벌대는 주민들에게
"과거에 조금이라도
산에 협조한 사실이 있으면
자수해 편히 살라"고 했다.
이미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거나
자수하지 않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협박이 뒤따랐다.
사태 초기 무장대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을 때
주민들 중 어느 누구도
무장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옷가지를 올렸고
쌀 한 되 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나 둘 자수자가 나오자
토벌대는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렇게 하여 1948년 12월 13일
대정면 하모리에서 48명이 희생되었다.
주민들은 이를 '자수사건'이라 부른다.
조천면에서는 '자수'한 150명 가량이
1948년 12월 21일 제주읍내
속칭 '박성내'로 끌려나와 총살되었다.
토벌대는
몇몇 사람이 총에 맞은 채 꿈틀대자
시신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박성내의 학살극은
총에 맞고도 탈출에 성공한
유일한 생존자 김태준 씨(작고)에 의해
가족들에게 알려졌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이름 빼앗기지 마라"

무장대 협조자의 명단이 발각되었다며
집단총살하는 것도 비일비재했다.
토벌대의 고문이 워낙 가혹해
일단 취조를 받으면 허위로라도 자백해야 했다.
남원면 신례리 양경수 씨(78)는
당시 "이름 빼앗기지 마라"는
유행어가 있었다고 말했다.
우연히 토벌대에게 끌려가는 사람의
앞에 가거나 근처에 있다가 그의 기억 속에
자신의 존재를 남기지 말라는 뜻이다.
"매에는 장사가 없어 고문을 받으면
아무 이름이나 튀어나오는 법"이라고 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참수

초토화작전 기간 중에서도
1948년 12월 중순부터
약 열흘간은 집단학살이 가장 극심했다.
이 무렵 토벌대는
입산한 사람들을 총살한 후
목을 잘라오기도 했다.
그래야 전과(戰果)를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다.
한 서청 출신 증언자는
"목을 잘라오면 승진을 시켜주었다"고 말했다.
1948년 12월 25일
서귀면 주둔 토벌대는
작전을 마치고 내려올 때
길목인 서홍리에 들렀다.
서홍리 주민들은 토벌대의 손에 들린
끔찍한 모습을 목격했다.
한 할머니는 "어떤 여인에게는
자기 아들의 목을 들고 내려오도록 했다" 고
증언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30만 제주도민 중 빨갱이로 몰려
학살된 희생자가 최소한 3만.

2001년 5월
제주 4.3사건 지원사업소가 접수한
희생자 신고에 의한 피해자
1만 3천여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학살 희생자중 여성이 21.1%
10세이하 어린이가 5.6%,
61세이상노인이 6.2%

 

2014년 9월 30일 화요일

서북청년단.. 그들은 누구인가?



“그 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55-56쪽)


서북청년단.. 그들은 누구인가?

해방 이후에, 이북지역에 소련이 진주하고 나서.
빈몸으로 월남한 지주의 아들들이 많았는데..
이들의 주 출신지역이 서북지역이었다나봐.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하는 거야..

월남의 배경이 이렇다보니,
얘네들.. 빨갱이라고 하면,
눈이 뒤집히는 얘들이야..

종교적으로는 개신교가 주류야.
서북청년단의 85프로가 개신교 신자였다지?

백령도 쪽에서는
빨갱이라는 의심을 당해서
서청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고
서북청년단 계열의 교회에
다녔다는 사람들도 많았대.

서북청년단은 한기총의 뿌리로 보면
별로 틀리지 않아.

피 끓는 얘들이 원한만 가지고
빈몸뚱이 무리지어 내려왔으니..
한마디로 시한폭탄같은 얘들인데..

이승만정권이 정권유지를 위해서
얘네들을 많이 활용했던 모양이야..

자기 손에는 피뭍이기 싫고..
서북청년단얘들이 대신해주면 좋고..
뭐 그런 거겠지?

특히 제주도 4.3 항쟁과 서북청년단은
뗄레야 뗼수가 없어.

3.1절 기념행사에서 촉발된
시위 발포사건이 빌미가 되었는데,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이
그 사건을 폭동으로 규정짓고,
다른 지방의 응원경찰을 대거 투입하여
물리력으로 무질서한 제주의 치안을
바로잡겠다는 뜻을 담은 포고문을 발표했거든?




<강요배-서청입도(西靑入島)>




그런데, 그 때 서북청년단원들은
경찰들과 함께 제주도에 들어왔어..

경찰들 중에서도 서청단원출신들이
적지 않았다고 하니까..
그 위세가 등등했나봐..

그 위세를 가지고
못할 짓을 참 많이 했다지?

주민들을 모아놓고 서로 뺨떄리기를 시켰는데..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도 그걸 강요했대..
세게 때리지 않으면, 죽도록 팼대..
돈을 모아가거나 소를 끌고 가야
그 짓이 끝냈대..

부녀자를 겁탈하고 고구마를 쑤셔대며
킬킬대는게 일쑤였대.

서청이 빨갱이라고 낙인찍으면,
그 동네 사람들 보는 앞에서
사위와 장모를 성교하게 한 후, 살해했대
(김관후, 제주의 소리)



<강요배-겁간>


제주도 서청단장 김재능이는
그 중에서도 제일 포악한 놈으로 꼽혔는데..
복수가 두려워 죽을 때까지 숨어지냈대.

이러한 서청의 횡포에 반발하기 위한 항쟁이
바로 제주 4.3항쟁이었어.

이 때 일 때문에
아직도 제주도 사람들 중에
육지 사람..  특히 개신교 소리만 나와도
이를 북북 가는 사람들이 많아..
서청을 떠올리기 때문이지..

이런 서청단원들이
4.3 항쟁이 인정받기 전까지만 해도..
국가유공자 대접을 받았다지?




서북청년단 재건위라는 놈들이 나온 모양인데..
자신들은 이 정권의 유지를 위해
테러도 불사하겠다..
뭐 이런 생각 가지고,
그런 짓들을 하는 모양인데..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나
난 도무지 이해할 도리가 없어..

지금 이 시점에서
서북청년단과 그 포악함을 떠올리게 한다면,
제 정신인 사람들은
당연히 4.3항쟁이나 4.19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거 아냐?

그 놈들.. 테러가 아니면 유지되기 힘든
정권의 위기의식을 공유하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정말 갈 데까지 가지 않고서야..
어떻게 대명천지에
서북청년단 재건을 입에 올릴 수 있지?

서북청년단재건위대변인이라는 자 왈,
서북청년단이 없었으면 벌써 적화되었거라나?

서청들한테 당하는게 적화보다 낫다고 판단하는
사고구조야말로 연구대상. 후안무치
 

2014년 9월 25일 목요일

에효.. 오늘.. 큰 일을 하나 막았다.



2년전.
장기집권하던 동대표5명에 맞서서,
입주민 한분과 의기투합하여
기존 동대표 한명을 낙선시키고..
입주자대표회의에 진입했다.

4:2 구도.

소수로서,
큰 변화는 일궈내지 못했지만,
오로지 선명성만을 무기로
견제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중임제한규정 때문에 차기에는
6년씩 장기집권해오던 4명의 동대표 중
어느 누구도 재출마할 수 없는 상황..

이들이 임기를 석달여 남겨놓고
무더기 똥을 싸고 나가려던 찰나다.

우리 아파트 관리방법을
자치관리에서 위탁관리로 바꾸겠다는 것.

지난주 입대의회의에서 4명이 똘똘 뭉처..
주민투표 발의안 표결강행을 시도하기에..
바락바락 우겨서 1주일 시간을 벌었다.

동대표를 대상으로 위탁관리 설명회를 가진 후
표결하는 것으로 겨우 만들었는데.
그게 오늘이다..

오늘을 위해 지난 주말
경로당이며, 아파트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사안의 심각성을 설명하느라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결과는?

방금전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오늘 설명회에 대거 참석한 주민 십여분한테
욕만 실컷 처먹고
백기를 들었다.

자치관리든, 위탁관리든,
장단점이 있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사안은
6개월 이상 주민들과 함께
충분한 검토와 찬반토론을 거친 후,
주민투표에 붙여져야 한다.

이번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주민투표로 위탁관리가 확정되고 나면,

차기 입주자대표회의에서는
위탁관리업체 입찰을 하더라도,
위탁관리업체끼리의 담합을 배제할 방법이 없다.

배후에 업체의 농간이 있지 않은지 의심됐다.

현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유력한 차기 회장후보인
나를 견제하기 위해..
이런 무리수를 뒀다는 중론도 있었다.

아니 위탁관리가 그렇게 좋은 제도면,
왜 지들은 6년씩이나 자치관리제도를
놔두었던가?

어쨌든 오늘..
큰 일을 하나 막았다.

2014년 9월 16일 화요일

부선이누나. 또 사고치셨다. 난방비 비리와 정당방위


하루는 전기주임님이
초인종을 누르더니 묻는다.

"이사님. 혹시 난방 안 쓰십니까?"

"아뇨. 난방 사용하고 있습니다."

"난방 계량기가 돌아가지 않고 있어서 말이죠. "

"네.. 계량기가 고장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머 지난달에도
난방비가 평균값 부과된 것 같더군요. "

"네. 그런데요, 이사님처럼 혼자 사시고,
또, 낮에는 집을 비워두시는 댁에서
그런식으로 난방비를 내시면, 손해를 보시게 됩니다. "

난방 계량기가 고장났다.
고쳐야지 고쳐야지 하다가
시간이 꽤 오래 지나가버렸다.

건전지만 갈면 된다는 설도 있고..
계량기를 통째로 갈아야 한다는 설도 있고..
설이 분분하여 머뭇거리다가
이 지경이 되어 버렸다.

건전지를 새 걸로 갈아끼워보면
확인할 수 있을게다.
설상가상으로
그 계량기에 들어가는 건전지라는게
흔한 규격이 아니다.
어느날 거기에 맞는 건전지를
찾아헤매다가 흐지부지.
하여간 게으름의 핑계는 차고 넘친다.

이처럼 난방계량기가
돌아가지 않는 것을 확인하면,
관리사무소는
돌아가지 않는 난방계량기의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난방을 아예 사용을 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장시간 집을 비운 건지.
그도 아니면 난방계량기가 고장난 건지.

난방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면
난방계량기가 정상인 거다.
난방비를 부과하지 않으면 된다.

난방계량기가 고장난 거라면,
세대에 계량기 고장 사실을 알려주고
교체하도록 안내한다.
그리고 각 세대에 부과되는 난방비의
평균치를 부과한다. 관례다.

떄로는 괜한 오해가 벌어지기도 한다.
집을 비워놓고 해외에 나갔다 온 어느 세대에서
평균치가 부과된 난방비 내역을 놓고
항의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관리사무소가 계량기 고장으로 오해한 탓이다.

이걸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난방을 펑펑 틀면서도
평균치의 난방비만 내기 위해서
일부러 난방계량기를
고장내기도 하는 모양이다.

어떤 아파트의 입주민 공고판에는
그런 세대를 적발하면
민형사상의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대의 명의의 엄포가 써붙어있기도 하다.

배우 김부선이 사는 아파트가 말썽인가보다.

그냥 계량기를 고장내거나
방치하는 선을 넘어서서..
아예 그 지역 입대의나 부녀회 관계자들에게
난방비가 0원 부과되었댄다. 무려 17년동안 .

동대표들과 관리사무소가 결탁하지 않는한,
일어나기 어려운 사건이다.
난방을 이용하는걸 뻔히 알면서도..
계량기 고장을 고장으로 보지 않고,
난방 미사용처리를 해준 거다.

그러면 그만큼 덜내는 난방비는
고스라니 다른 세대들의 부담이 된다.

의협심 강하고 성격 화끈하신
우리 부선이 누나.
이런 불의를 못참고 문제 삼은 끝에
진상을 밝혀내신 것까지는 좋았다.
핸드폰을 던지고 대책회의를 방해하는
사람들을 폭행하신 모양이다.






에효.. 이 누나는 언제나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성질머리가 문제다.

2년씩이나 뛰어다녀서
최근 시정명령도 받아내셨댄다.
아마도 동대표들 탄핵이나
손해배상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회의 중이셨던 모양인지?
이 얼마나 흐믓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여기에 난입해서 깽판 놓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경찰을 불러서 폭행과 업무방해를 따질 일이지..
그런 포악한 무리들을
사적으로 응징하려 하셨다니.
과연 부선이 누나다.

부선이 누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한다.
상대방이 폭행을 먼저 했다면,
후발폭행은 선행폭행에 대한 정당방위라고.

정당방위?

부선이누나 주장처럼
먼저 맞았다고 무조건 성립하는게 아니다.

싸움의 수준을 넘어서
상대방이 자신을 폭행하고 있다 치자.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황일 때,
본인의 신체를 지키기 위하여
최소한의 수준으로 대항하는 경우에
예외적으로 성립하는게 정당방위다.

물론 상대방이 먼저 도발했다는 점?

그것은 부선이누나 범행의
참작할만한 동기는 될 수 있을 거다.

이 누나. 사건의 본질이 폭행이 아니고
난방비 비리라고 주장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난방비 비리는 난방비 비리고
폭행은 폭행이다.

난방비 비리를 해결하시는 와중에
폭행을 당한 것을 참지 못하고..
폭행을 가하셨다는 것.

<= 이것이 상대방의 주장은 들어보지도 않은채
부선이누나의 주장만 들어보고
내가 파악한 사건 내용되겠다.

내가 이 얘기를 장황하게 쓰는 이유?
부선이 누나가
자신의 폭행혐의를
부인하고 계신것 같아서다.

매우 슬프게도
부선이 누나가
기소유예를 면하지 못하고 기소가 된다면,
부선이 누나는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하시겠지.

그리고 법원이
그 무죄주장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부선이 누나는 억울하실 거고.
억울함은 또 부선이 누나를 병들게 할 거다.
안봐도 비디오다.

부선이 누나!
제 말씀 똑똑히 잘 들어요!

난방비 비리는요 법원에서
누나의 범행을 정당화시켜주지 못해요!

그러니까 인정하기 싫어도 혐의 인정하시고.
변론은 이런 식으로 하셔야 되요.

"상대방을 폭행한 점에 대해서
제가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먼저 저를 폭행하고,
폭력을 유발한 점.
17년간 자행되어온 고질적인 아파트 비리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
등을 참작하셔서
선처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당연히 상대방에 대해서도
따로 고소하셔야 한다.
그냥 경찰에서 진술하는게 아니라, "고소" ..

주민들로부터 탄원서까지 받아서 제출하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이런 쌍방 폭행 사건의 경우
검사가 쌍방에게 합의를 종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합의 종용에
응하지 않고 버티는 사람만 기소하는
이상한 검사도 있다는 것

이런 검사는
최악의 경우를 만들수도 있다.
정확히 현실을 인식하셔서
대처해야 해야 하는 이유다.



많은 부분 주민들의 무관심에 기인하는
아파트 비리의 특성을 보자.
김부선의 행동은
누가 보더라도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나, 작금의 아파트현실에서
김부선 식의 투쟁을 난 권장할 수 없다.

아파트비리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권장하는
제일 현실적인 방법은
동대표에 출마해서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소수면 소수인대로
감시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다수면 다수인대로
아파트비리를 개혁할 수 있다.

만약 새 입주자대표회장이 된다면
전임 입주자대표회장의 비리를 파헤쳐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고,
고소하기도 더 좋다.

소송수행을 관리소장에게 맡길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변호사비용을
아파트비용에서 지출하게 할 수도 있다.

입주자대표회장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존재는.
아직 뽑히지 않은 후임 입주자대표회장라는 것.

이것은 동대표를 하는 입장에서
내가 절실하게 깨달은 점이다.

2014년 9월 13일 토요일

홍가혜를 마녀로 만들어 100일 넘게 감옥에 가둔 문제의 인터뷰, 과연 어떤 내용?


교육을 받은 적은 있고
수심 50m까지 잠수한 경험이 있어
자신이 뭔가 도움이 될 것 같아
자발적으로 진도를 찾았다는 홍가혜씨.

홍가혜씨가 초보이긴 하지만
초보용 오픈워터 잠수자격증을 가진 것은
틀림이 없다. 

2014. 10. 1 홍가혜씨는
자신이  레저용인 오픈워터 잠수자격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며,
7~8년전
전문잠수사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 50일 중
30일 정도를 마쳤다는 것이
정확한 사실에 부합한다고 밝혀왔습니다.
또한 상당수의 베테랑 전문잠수사들이
자격증을 따로 가지고 있지 않다고 알려왔습니다.

또한 홍은 전문잠수사를 사칭할
의도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본인도  "방송사에 민간잠수사라고
말한 사실이 없다"고 확인하고 있다.

한겨레에 따르면
인터뷰 당일 홍씨와 접촉했던
엠비엔 김아무개(29) 작가는
지난 1일 광주지법 목포지원 재판정에 출석해
“홍씨가 인터뷰를 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고 밝혔다고 한다.

현장 상황에 대해 알려 달라는 요청을 했고
홍씨가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

홍가혜를
국민공적으로 만든 사실은
홍가혜가 전문 잠수사가 아님에도
전문 잠수사를 사칭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고도 남을 거짓말쟁이라는 것.

그러나 홍가혜가
전문 잠수사를 사칭했다는 주장의 근거는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다.

홍가혜가 기소된 것은
자격을 사칭한 것과 관련된 혐의가 아니라
해경에 대한 명예훼손죄였다.

그른데 엉뚱하게
홍가혜에 대한 혐의의 근거와
도주우려의 판단근거는
인터뷰 내용이 아니었다.

홍가혜가 전문 잠수사를 사칭한
상습거짓말쟁이라는 
국민들의 확신편향과
그를 부추긴 김용호의 기사였다.




앵커(男)

어제 도착했다고 말씀 들었는데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홍가혜(민간 잠수부)

되게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고,
저는9시경 도착했는데
지금 언론 보도와
현재 실제 상황과 많이
상이하고 있습니다

앵커(男)

어떤 점이 많이 다른겁니까?
홍가혜(민간 잠수부)
해양경찰청에서
경찰청장이 지원해준다고 했던
장비며 인력이며 배며
지금 다 장비 지원은
전혀 안 되고 있었구요.
지금 속속들이 (안들려요)
속속히 sns에나 다른 부분에서
생존자 확인됐다는 부분들로
허위사실이라고
많이 타 방송사에서 방송 내보내고 있는데요
실제 통화된 분도 있고
잠수부 중에 배 안에서 배의 갑판 벽 하나 두고
대화 시도해서 대화가 된 잠수부도 있습니다

앵커(女)

그러면 sns 전해지는 이야기가
실제로 가능하다고 보시는거네요

홍가혜(민간 잠수부)

지금 제가 추측, 추측하는게 아니라요.
진짜 실제 상황이
지금 그런 것과 아닌 것과 섞여서
sns상에서 나돌고 있고
또 보도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앵커(男)

지금 현장 지금 대응상황이
미흡하다고 보시는거 같습니다.
구조장비나 물품 같은 것들이
전혀 지원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인겁니까?

홍가혜(민간 잠수부)

네 지금 전혀 지원 안 돼있고,
개인 장비를 가지고 오신 분들이 있는데요.
개인 장비를 가지고 오신 분들이 있지만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고
잠수부분들도 민간 잠수부 지원 봉사자 분들도
지금 그냥 현장대기하고 있는데
지원이 전혀 안 되고 있어 곤란하고,
또 4시에 야간 작업이 된다고 안 된다고 해서
4시부터 다시 투입될 가능성이 높다고
해양청장께서 해양청장이 말을 했는데
지금 전혀.

앵커(男)

네네, 그러면 홍가혜 대원님은 그러면

홍가혜(민간 잠수부)

전혀

앵커(男)

그러면 바다에 들어갈 수 없었던 상황입니까?
가셔서 어떤 작업들을 하셨어요?

홍가혜(민간 잠수부)

지금 와서요.
투입되려고 바로 바다에 들어갈 수 있게
스킨스쿠버 장비라든지 이런거 다 준비하고
다 알아보고 지금 바로 투입되려고 있었는데요
지금 해양경찰청인지 어디서 정부쪽에선지
지금 저희들 민간 작업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앵커(男)

그.. 다른 잠수부 분들도
거기 민간에 자원해서 나서신
다른 잠수부들도 사정이 마찬가지인겁니까?

홍가혜(민간 잠수부)

네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어제 작업하고 들어오신 분들은
조금 쉬고 계시는데요.
지금 다 격분해가지고
다 들고일어서나야된다고
지금 감정적으로 지금 많이
호소하고 있습니다.

앵커(女)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서
위험할 수 있다는 상황 때문에
막는게 아니냐고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그 점은 어떻게 보세요

홍가혜(민간 잠수부)

시야 확보는.. 이삼..
들어가신 분들의 증.. 말에 따르면요.
이삼십 센치 정도 시..
언론과 조금 상이하게
이삼십 정도 이삼십 센치 정도의
시야 확보되고 있구요.
수심도 조류도
지금 약해지는 상황도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투입해달라고
강력히 항의도 했지만
투입시켜주지 않았습니다.

앵커(男)

그러면 대원님이 보시기에는
지금 거기에 있는 상황을 관리하는 당국이
제대로 구조작업에 있어 파악을 못 하고 있다.
제대로 지시를 못 내리고 있다.
이렇게 보시는 겁니까?

홍가혜(민간 잠수부)

그런 부분도 어느 정도 있구요.
저희 민간과 해양과 같이 협력하여
지금 수색을 벌인다 어쩐다
지금 언론에 다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런 부분들이 지금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앵커(女)

민간 잠수부들을 모집을 했지만
실제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혹시 생존 가능성이 있다라고 나온
언론의 이야기에 대해서
실제로 직접 들으신거, 확인하신거는 아니죠?

홍가혜(민간 잠수부)

확인 자체를 못 하게끔 지금 들여..
투입을 시켜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들어가서 확인했다는
민간 잠수부분들의 말들도
지금 다 똑같습니다.
우왕좌왕하는게 아니라
다 똑같이 확인했다 라고
뭔가 이제 사람 소리와 대화도 시도했고,
갑판 하나 사이를
배, 그,  벽 하나 사이를 두고
신호도 확인했고, 
대화도 했고 지금 증언들이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언론만 다릅니다.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겁니다.

앵커(男)

그 부분에 대해서 그 곳에 나와 계시는
어떤 정부 당국의 대표자들이나
이런 분들께 말씀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홍가혜(민간 잠수부)


앵커(男)

그렇다면 어떤

홍가혜(민간 잠수부)

네 경찰-

앵커(男)

말이 나오던가요?

홍가혜(민간 잠수부)

청, 경찰서, 파출소, 진도 파출소에서도
연락 와가지고
그 쪽에도 저희가 나가가지고
경찰서장과 경찰직원분들이랑도
다 얘기도 했구요.
지금 여기 오신 해양.. 해양 경찰청장이라든지
여기 고위 관계 경찰 관계자들과도
대화 시도 여러번 했는데
다 똑같은 대답만 나오고,
지금 제일 중요한거는
사람이 살았냐 죽었냐
생존여부를 알려달라고 하는데
거기 부분에서는 지금
묵비권 행사하고 있습니다.


앵커(男)

지금까지 선내 진입이 어쨌든 실패했다.
이런 보도들이 많이 나오고 있고,
현장 상황도 여의치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 부분을 해결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이라고 판단하고 계십니가?

홍가혜(민간 잠수부)

지금 장비와 배, 민간 다이버들이 나갈 수 있는
다 지금 배와 어선 이런 것도 상관없습니다.
고기 잡는 어선도 상관없고, 바지선도 상관없고
지금 그런 배들도 필요하구요.
그리고 지금 슼 장비들 다이버 다이버 분들이
지금 그냥 다이버가 아니라
마스터 자격증 있는 분들도 있지만
그 것보다 더 중요한 테크니컬 자격증 있으시고,
경력 오래되신 분들도 있으세요.
그런 부분들, 그런 분들도 지금 급하게 오느라
장비 다 안 챙겨 오신 분들도 되게 많으시거든요
그리고 지금 정부가 약속해준
장비 지원과 그리고 배 그리고 인력 총동원
그리고 해양과 민간
같이 협력해서 한다는 부분 말로 하신 부분
그거 약속 지켜주시길 바라고 있는 부분입니다.
저희 모두 다

앵커(男)

네 그런데 이제 정부 측에서는 잠수부들,
민간 잠수부들의 안전 역시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뭐 일종의 통제라든지
이런 상황들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논리를 펴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신다면요

홍가혜(민간 잠수부)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한도 끝도 없고요

앵커(女)

네.. 네 지금 많이 화가 나 계신 것 같은데
직접 잠수해본 바로는
위험하지 않다. 할 수 있다. 라고
생각을 하시는 거죠?

홍가혜(민간 잠수부)

위험합니다.
일반 민간 다이버들 한테는 굉장히 위험하지만
생존자들 확인되어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넋놓고 있을 수도 없고
그리고 또 지금 테크니컬 다이버들이라고
굉장히 해양 수색하시는 분들보다
더 경력 많으신 분들도 많이 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지원자 분들도
많이 대기 중에 있습니다.

앵커(男)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지금 상황이 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
뭔가 제안을 하고 싶으시다면
어떤 제안을 하고 싶으신지 말씀 여쭙습니다

홍가혜(민간 잠수부)

민간 다이버들 다 불러 놓고
그리고 해양청장이든
해양 진짜 고위 관계자들 와 가지고
우리하고 몇시에 어떻게
지금 시간이 1시간이라도 더 빨리 급하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다 와가지고 배 스케쥴 조정하고
어떻게 들어갈건지 어떻게 투입될건지
그리고 도면이라든지
이런 기본적인거 다 주시구요.
그리고 또 장비 배 선척 인력 지원,
인력 모든 지금 동원 sns포함해가지고
저도 하고 있고 다른 분들도 하고 있어요
그래 가지고 지금 대기자분들 많으시니까
인력걱정하지 마시고
배와 그리고 장비 그리고 다른 해양 해
지금 중요한거는
배에 저 쪽에 현장 나가있는
배에 계시는 해양 경찰 경찰들도 마찬가지고,
여기 경찰들 지원자들
여기 정부에 관련된 모든 기관들
사람들이랑 저희들이랑 아예 대화를 거부하고,
대화도 거부하고 있고,
나가있던 사람들한테 한다는 소리가
시간만 대충 때우고 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임무중지하고 공항가서 대기하라" "구조하는 사람 놔두고 어떻게?" http://sound.pe.kr 해경 녹취 공개


앵커(男)

아 진짜 그 정도로 심각하게 발언을 했다고
본인이 직접 들으셨습니까?

홍가혜(민간 잠수부)

같이, 거, 그거는 바다에 나가 있는 사람한테
해양 경찰 바다에 해양 경찰이 나가 있는 사람이
직접 얘기해온거구요.
유가족 대표, 유가족 대표도
지금 격분해서 인터뷰 장소에 안 온건데요.
유가족 대표한테 한다는 말이
구조, 구조대원이라고
어 지금 대원하고 있는 놈들이 지금 하는 말이
어? 뭐? 여기는 희망도 기적도 없다?
그딴 말 쳐 하고 있었다구요

앵커(女)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하면
정말 화가 나실만 한데

앵커(男)

이 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이고,
시급히 조치를 해야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현재 그럼 계속해서 대기를
몇시간째 하신거고,
물에 못 들어가시고
수색 작업에 배제된 상황
어느 정도 되신 겁니까?
되신 분들이 몇 분이나 계신겁니까?

홍가혜(민간 잠수부)

지금 저희 팀 하고 제가 모은 팀하고
다른 팀하고 합쳐서
약 80명 정도 있는 걸로 알고 있구요.
저희 팀에서는 저희 팀만 40명 정도 있고
다른 팀에서도 또 40명 정도해서 80여명 있는데
더 아침부터 계속 속속 도찰할 예정이고
지금 또 저희가 못 들어가고,
구조에 아예 배제된 상황은
지금 열 몇시간이야.. 지금 15시간이..

앵커(女)

네 어제 오후 9시부터

앵커(男)


앵커(女)

있었으니까 그 정도 시간 계셨는데

앵커(男)

선체에 접근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이신겁니까?

홍가혜(민간 잠수부)

정확한 현장상황은
제가 발언하기 곤란한 것 같습니다.
가셨던 분들은 선체에 접근, 접근을 해서
뭐 유리창을 깬다거나
그거는 당연히 기본지식으로
들어갈 수 없는 부분이구요
지금 에어 포켓이라든지 다른 부분,
지금 생존자 확인해서 최대한
지금 뭐 트레일러 뭐 컨트렐런가 트레일런가
뭔가 온다해가지고 다 기다리고 있었고,
그거 하나 믿고 있었는데
그거 조차도 도착 안 해있고,
지금 엉망이지 않습니까
지금 모든게 다 엉망입니다. 여기는

앵커(女)

오늘 다행히 날씨가 기상상황이
좋아지고 있다고 하구요.
민간합동을 해서 빠르게 수색작업이
진행되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
오늘 어려운 말씀 전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홍가혜(민간 잠수부)

민간과 해양 같이요.  저기요.

앵커(男)

예예. 네 말씀해주십시오

홍가혜(민간 잠수부)

민간과 해양 같이 협력하신다고
언론 보도 하셨고, 발표하셨으니까
그 부분 확실히 약속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목숨 버릴 각오 다 하고 왔습니다.

앵커(女)


앵커(男)

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