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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7일 화요일

무려 20년 전 얘기다. 난 그 때 캐나다에서 영어 공부 중이었다.


무려 20년 전 얘기다. 난 그 때 캐나다에서 영어 공부 중이었다. 같은 반에는 일본인 학생들과 한국인 학생들이 비슷한 비중으로 대다수를 차지 했고, 그외에 홍콩이나 중국 등 여기저기서 온 학생들이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 반에는 아버지 뻘의 지긋한 나이의 학생도 한 분 계셨는데, 한국학생들은 그 분을 "아버님"이라고 불렀다.

하루는 일본인 학생 두어명과 한국인 학생 서너명이 카페테리아에 앉아서 뭔가를 먹으면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아버님"께서 다가오셨다. 한국 학생들은 일제히 벌떡 일어나서 "아버님"께 인사했다. 반갑게 인사를 드리고 다시 앉았는데, 그 중 한 형님이 앉으면서 나지막한 목소리의 한마디 한다. 한국말이다.  "이 놈의 새끼들은 어른이 와도 오는지 마는지.. "

그제서야, 옆에 앉아있던 일본인 급우들이 그대로 앉아있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문화적 차이였다. 마침 문화의 다양성 시간에 발제를 앞두고 있던 나는 이 문제를 발제하기로 했다.

내가 준비한 것은 판토마임이었다. 나와 나를 도와주는 친구가 보여주는 판토마임을 보고 과연 어떤 상황인지 맞추어보라는 것이었다. 단 한국인 학생들은 절대 답변하지 말 것을 사전에 주문했다.

강단에는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의자가 두 개 놓여있다. 테이블 위에는 생수 한병과 종이컵 두 개를 준비해두었다. 한 의자에 내가 앉아 있다가, 도와주는 친구가 등장하자 난 벌떡 일어났다. 도와주는 친구가 앉은 후에서야, 난 자리에 앉았다. 그 친구 앞에 놓인 종이컵에 두 손으로 생수를 따라주었다. 그 후에 그 친구는 생수병을 건내받아 나에게 생수를 따라준다. 내 종이컵의 높이는 친구의 것보다 낮게 한 채, 종이컵을 마주친다. 나는 종이컵을 오른 쪽으로 돌려서 생수를 마시고, 그 친구는 편안하게 생수를 마신다. 그러다가 친구가 자기 종이컵을 비우고, 그 종이컵을 나에게 건낸다. 거기에 친구가 생수를 따라주면, 난 그걸 또 고개를 돌려 마신다. 판토마임은 여기까지였다.

학생들에게 물었다. "우리 두 사람이 연출한 상황은 무슨 상황일까요?"  아무도 정답을 맞추지 못했는데, 어떤 기상천외한 답들이 나왔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나는 정답을 알려주고, 우리가 했던 판토마임 재연하며 하나하나 그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주도"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설명을 다 들은 일본 여학생 가오리가 질문했다.  "요즘도 보통 사람들이 보통 때에 그렇게 합니까?" 가오리의 질문은 나에게 충격적이었다. 내가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문화, 그 속에서 파묻혀 내가 숨쉬던 문화를 한 순간에 나로 하여금 낯설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이 나는 이렇게 들렸다. "너네들은 아직도 그러고 사냐?"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우리나라 문화가 얼마나 독특한 문화인지 그 안에서 파묻혀 있던 내가 그 때처럼 가슴으로 느낀 적이 없었다.

그때 내가 겪었던 그 문화적 충격이 Defamilarization. 즉 낯설게 하기라고 불리우는 철학적 사유의 결과라는 것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마이클 샌델은 말했다. "철학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과 직면하도록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의 관념을 뒤흔든다. 이미 너무 친숙해져서 의문을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당연시하고 잘 안다고 생각한 것들을 낯설고 이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철학은 익숙한 것에서 우리를 분리한다. 그 방법은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관점을 환기함으로써 우리를 분리한다. 여기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일단 익숙한 것이 낯선 것으로 변하고 나면 그것은 두번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

마이클 샌댈은 "자기 인식이란 순수함을 잃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샌댈의 말처럼 자기 인식은 우리에게 불안을 느끼게 하지만, 인류는 그런 생각들을 경험하면서 탐구를 지속했왔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어렵지만 재미있다. 그 이야기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Defamilarization. 즉 낯설게 하기라는 표현은 센댈을 통해 몇년 전 처음 알았다. 그러나  난 캐나다 유학 이후 그런 방식의 철학적 사유를 거듭했다. 그 동안 나의 철학적 사유는 나를 어디로 데려갔을까? 교회가 낮설어졌다. 교회와 이별했다. 지금까지 30년동안 알고 지내던 상당부분의 인적네트워크를 포기해야 하는 거사였다. 결혼이 낯설어졌다. 결국 약혼녀 앞에서 이별을 청하기 위해 무릎꿇고 울며 빌었다. 상견례를 마치고 식장을 알아보던 중이었다.

어떤 응석받이는 소시오패스라고 생각하고 어떤 주정뱅이는 사이코패스라고 주장하는 나. 이것은 낯설게 하기라는 철학적 사유가 데려온 바로 지금의 주소다. 이런 내가 싫으면 어쩔 건데? 누가 좋아해달라고 했나?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같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그거 어른 되면서 포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아직도 어리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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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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