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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0일 수요일

표창원이 야당 지지자들로부터 다구리를 당한 적이 있다...





작년 봄. 세월호 참사 직후의 일이다. 표창원이 야당 지지자들로부터 다구리를 당한 적이 있다.  "세월호 참사의 해결은 ‘박근혜를 잊을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라는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당시 지식인으로서 당연히 할수 있는 말을 한 것 같은데 그날은 하루 종일 트위터에서 다구리 당했다. 하여간, 이쪽이든 저쪽이든, 자기 생각이랑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는 용납하지 못하는 족속들이란.

오늘 MBN 인터뷰를 보고 환호하는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을 보니, 문득 그 때 생각이 난다.  명색이 심리학자다.  그런데, 지금까지 대중들을 기분 좋게 만들자고, 말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표창원 교수에게  한번도 발견해본적은 없다.  몰라서가 아닐 것이다.  어떻게 빨아줘야 대중들이 좋아할 지 어쩌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 까닭은  어쩌면,. 그렇게 하기엔 표 교수의 비위가 약하기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오늘 MBN 인터뷰를 보면서 몇 번씩 들었다.

정치인에게는 표의 등가성이 있다. 무식한 표나 똑똑한 표나 다 같은 한표다.  반면, 달리 학자는 진리를 추구한다. 표창원, 그는 곱씹어볼 수록  정치인보다는 학자가 어울리는 사람이다.

문제는 앞으로 정치인이 된 학자 표창원을 바라볼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자들이다. 이들은 너무 뜨겁다. "노무현 관장사" 라는 제목을 뽑은 한겨레 앞에서, 국회의원 후보 권은희를 검증하는 뉴스타파 앞에서 이들이 냉정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얼마나 뜨거워질 수 있었는지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지금 표창원을 뜨겁게 받아들이는 이들은.. 과연 앞으로 표창원을 어떤 온도로 바라볼까? 정치인 표창원 앞에서 다시 한번 그들의 뜨거움을 확인할 수 밖에 없는 슬픈 순간. 그 시간이  머지 않았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지금 뜨거운 마음으로 표창원 교수를 바라보는 더불어민주당지지자들은 명심하자.  같은편만 결집하는 정치지도자가 아니라 다른편을 설득하는 정치지도자가 되려면, 적에게 적용한 기준을 우리 편에게도 적용하는 공정성이 필요하다. 오늘 표창원 교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속시원함"은 바로 이러한 공정함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앞으로 표창원 교수의 기준이 우리를 향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과연 냉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일 능력이 있을까?  작년 표창원을 다구리했던 우리들의 모습을 성찰하며 미리 생각해 볼 일이다.

2015년 12월 27일 일요일

[가족간의 종교갈등] 초등학교 다니는 자식이 어느날 갑자기 교회에 나가겠다고 한다면..





아직 애인도 없는 처지다. 이런 내가 생길지도 모르는 자식 걱정을 하는 경우처럼 아직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가 있다.

혹시 나의 2세가 나와는 다른 종교적 선택을 하면 어쩌나 하는 고민을 할 때가 대표적이다. 사실 “가족 간의 종교갈등”은 호락호락한 문제가 아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 때문에 살인도 벌어지고, 무고한 사람을 살인자로 만들기도 한다. 볼테르로 하여금 “똘레랑스론”을 쓰게 한 것도 결국은 “가족 간의 종교갈등”이 바로 그 시발점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내가 열심히 성당에 다니던 시절엔 그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 때 나는 내 2세가 나와 다른 종교적 선택을 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당연히 가톨릭적인 인간으로 기르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을 줄 알았다. 나에게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당연한 진리를 그때 나는 외면하기 일쑤였다. 하물며 종교적 선택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나의 2세가 나와는 다른 종교적 선택을 하면 어쩌나? 이 고민은 내가 교회와 이별한 순간부터 벌어졌다. 그 녀석이 교회나 성당, 또는 절에 나간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지? 어느 날 갑자기 아들 녀석이 친구 따라 성당에 나가겠다고 하는 장면을 상상해보곤 했다.

그런데 이 고민을 현실로 직면하신 분이 페친 중에 계시나 보다. 철학자이시다. 이렇게 철학적인 고민을 많이 하시는 분들조차도, 자식 문제에까지 철학적인 판단을 하기엔 현실이 팍팍한 것일까? 아! 결국 부모가 된다는 건 바보가 되는 것인가?

나라면, 그래도 자녀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어떻게 자녀가 내 맘처럼 되길 바라나? 다만, 그 선택에 내가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랄 수 밖에. 그러려면 적어도 자녀와 충분한 대화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대화라는 게 생각보다 무지 귀찮고 지난한 일이다. 게다가 보통의 아빠들은 바쁘기 이를데 없다.

그래서 매우 슬프게도 결국 많은 부모들에 의해 폭력이 동원된다. 그게 다! 부모들에게 대화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바쁘시다잖는가? 한국에 사는 얘들이 민주사회의 건강한 시민으로 자라지 못하고, 결국 힘을 숭상하는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왜 진리의 힘을 불신하는가? 자유롭고 공개된 장소에서 진리가 허위를 이기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자녀 앞에서 진리의 힘을 불신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진리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진리란게 얼마나 비싸고 귀찮은 건데.. 게다가 본인 스스로가 자신이 진리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녀를 굴복시키려 하고 있다. 하긴 자녀처럼 쉽게 굴복시킬 수 있다고 여겨지는 상대 앞에서 귀찮게 대화를 동원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차라리 자녀 앞에서 솔직해지는 건 어떨까? 아버지도 (또는 어머니도) 진리와 허위를 완전히 구분하지 못하는 불완전하고 결점 많은 인간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을 부모로서 염려하는 이유를 최선을 다해 솔직하기 얘기해 주자.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교회에 나가겠다고 한다면? 그 때는 답이 없다. 가지 말란다고 해서 안 갈 얘가 아니다. 부모 몰래 교회에 나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부모자녀간의 소통의을 끈을 유지하는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확실한 것은 자신이 자녀를 마음대로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부모치고, 이런 소통의 끈을 잘 유지하고 있는 사이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언젠가 성매매 처벌을 반대하는 주장을 피다가 굉장히 도발적인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네 딸이 성매매를 하겠다고 하면 어쩔래?” 그 때 나는 진짜로 내 딸이 성매매를 하겠다고 나서는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고야 말았다. 심사숙고 끝에 내놓은 내 진심어린 대답은 이러했다.

“딸에게 성매매를 권장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매매를 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막을 방법도 나에겐 없습니다. 내가 하랜다고 하고, 하지말랜다고 하지않겠습니까? 다만, 만약 그들이 성매매와 관련해서 저에게 진로에 대한 상의를 해온다면, 난 다행스럽고 기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동안 내가 그들과 굉장히 잘 소통해왔다는 뜻일테니까요. 아빠에게 자신의 성매매에 대해 상의를 할 만큼 친밀한 딸을 저는 일찌기 본적이 없습니다.”

새해를 맞아서 영어공부를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 있지?




새해를 맞아서 영어공부를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 있지?
오늘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유용한 공짜 사이트들을 몇 개 소개시켜줄게..

lil-fingers


유아를 위한 영어교육사이트다.
'Storybooks' 코너에 들어가면
유아용 영어동화를 볼 수 있다.


starfall



어린이용 무료 동화읽기 서비스다. 총 네 단계인데.
1단계 : ABC
2단계 : Learn to READ
3단계 : It’s Fun to READ
4단계 : I’m Reading
마치 진짜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Cbeebies



BBC판 뽀뽀뽀다.
Story time을 선택하면
동화책을 읽어준다.
영국식 악센트다.


Fun Brain 



미국판 네이버 주니어.
reading을 선택하면, 책 목록이 나오는데
이 중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골라서 읽으면 된다


Story Line Online



미국배우조합에 소속된 배우들이
직접 책을 읽어주는 사이트.


Storynory 



영국의 영어동화 사이트.
영국식 영어발음을 사용한다.


andersen fairy tales 



동화작가 한스 앤더슨의 작품을 들려주는 사이트.


grimm fairy tales



그림형제의 작품을 들려주는 사이트다.


silly books



어린이들을 위한 영어교육 사이트.
'Books' 코너에 들어가면
예쁜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통해
영어동화를 들을 수 있다.
자막에 현재 읽히는 단어를 녹색으로 표시해 준다.


Books should be free



“책들은 공짜여야 한”단다.
e-book과 오디오북을 동시에 제공하여
영어공부하기 좋다.


Listen and Write 



열심히 듣고 열심히 받아적는 방법으로
듣기를 연습하는 사이트다.
회원을 가입하지 않아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기록을 저장하려면 회원가입을 해야만 한다.

Full Books



인터페이스가 매우 간편하다. 검색기능도 없다.
알파벳 순서로 영어 소설 작품들이 정리되어 있다.
스마트폰으로도 접속이 가능하다.


Loudlit 



여러 종류의 영문학 작품을 오디오북 파일로 제공한다.
Novels, Poetry, Children's, Historical, Short Stories 등
장르별로 작품들이 정리되어 있다.


Lit2go 


사우스플로리다대학교에서 구축한 무료온라인서비스다.
제공하는 트랙이 5000건이 넘는다.
허클베리핀의 모험, 톰소요의 모험, 셜록홈즈, 이솝우화,
이상한나라의 엘리스, 80간의 세계일주, 죄와벌, 햄릿, 올리버트위스트 등
수많은 오디오북을 공짜로 읽으며 들을 수 있다.


Virginia.edu



버지니아대 도서관이 제공하는 E-book


Voices in the Dark



영어책 + 오디오북 세트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일반인들이 자발적으로 오디오북을 녹음하여 만들어가는 사이트다.


YBM CNN



매일 제공되는 2분 남짓 CNN뉴스 영상을 시청하면서
영어공부를 하는 곳
대본과 해석본 MP3가 모두 제공된다.


ESL video 



동영상을 시청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해도를 측정하기 위한 다양한 문제가 준비되어 있다.
Beginning, Low Intermediate, Intermediate, High Intermediate, Advanced
다섯 개 수준 중에 하나를 고르면 각 수준별로 많은 동영상이 준비되어 있다.


American Rhetoric



역사적인 명연설을 한자리에 모아둔 사이트다.
mp3도 준비되어 있다.


Project Gutenberg



프로젝트 구텐베르크(Project Gutenberg)는
인류의 자료를 모아서 전자정보로 저장하고 배포하는 프로젝트다.
1971년 미국인 마이클 하트(Michael Hart)가 시작했다.
인쇄술을 발명하여 지식의 전달을 급속도로 확장시킨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인터넷에 전자화된 문서(e-text)를 저장해 놓고
누구나 무료로 책을 받아 읽을 수 있는 가상 도서관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인터넷을 이용해 기여하여 만들어지는 프로젝트로
이미 수많은 고전의 원문이 모여 있다.
2006년 3월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발표에 따르면,
프로젝트는 18,000개 항목 이상의 전자문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매주 50여개의 새로운 전자책이 새롭게 등록되고 있다고 한다.
프로젝트에 등록된 전자책은 대부분이 서구의 문학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 시, 단편소설, 드라마 등의 문학작품 외에
요리책, 사전류, 정기간행물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일부 오디오 파일과 음악 악보 파일도 갖고 있다.
대부분은 영문 서적이지만, 다른 외국어 문서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lyrics training



팝송을 따라부르면서
받아쓰기 연습할 수 있는 곳


npr



미국공영라디오 방송이다.
듣기에 어느 정도 자신있는 이들에게 권장한다.
고급어휘가 많이 사용되고 말하는 속도도 빠르다.


Bloomberg



경제 뉴스를 제공하는 미국의 뉴스채널이다.


C-span



미국정부활동과 공공이슈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24시간 케이블채널이다.
고급영어를 공부하고자 할 때 활용하길.


CNN video 



동영상 길이가 짧다.
자투리 시간에 한편씩 보면서 공부하기 좋다.


TED


다양한 주제의 강연영상을 무료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최근에는 영어자막 뿐만 아니라 한글 자막도 지원한다


VOA Learning English


Voice of America에서 운영하는 사이트다.
세 개의 레벨로 나눠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정확한 발음으로 아주 천천히 읽어준다.
각 기사마다 Words in This Story 코너가 있어서 필요한 어휘를 잘 설명해놨다.
뉴스 읽기나 뉴스 듣기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가장 좋다.



2015년 12월 22일 화요일

"연탄색이랑 얼굴색이랑 똑같네"라는 말을 듣고 화내는 사람들이 난 더 웃겨.






"연탄색이랑 얼굴색이랑 똑같네"

한 정치인이 한 흑인과 연탄봉사를 하면서 한 말이야.
이 말을 들은 흑인은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게 어쩌면 당연한게 그 흑인은
연탄처럼 까만 자신이 자랑스러웠으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정치인의 말을 들은
다른 사람들이 분기탱천을 해..

흑인에게 까맣다고 하는 건 큰 실례라느니,
인종차별이라느니..
파리같으면 상상을 할 수 없다느니..

그런데 난 그 정치인에게 분기탱천하는 이 사람들의 말 속에서
흑인에 대한 묘한 폭력을 느껴.
자신이 까만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그 흑인에게
당신은 까만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맞다고
얘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생각해봐.
자신의 한국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한국인에게..
"부끄럽지? 그런 말을 듣고 얼마나 수치스러웠니?
감히 네가 한국인이라는것을 언급하다니..
저 사람은 참으로 몰상식한 사람일게야"라고
말하는 거랑 똑같다는 거지.
뭐가 더 큰 실례지?
 
물론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하거나 배제하거나
까맣다는 이유로 흑인을 놀린다면
문제가 달라지겠지..
 
그런데. 그것도 아닌데..
까만 사람을 까맣다고 하는데..
당사자들이 왜 그걸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지?
 
혹시 흑인들은
자신들이 까맣게 태어난 걸 저주로 생각할 거라고..
그런 이상한 단정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왜 그렇게들 호들갑이냐고?
 
아프리카에서 오신 그 분은
자신이 까만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제발 우리의 시선으로 그분들을 재단하지 말자고..
 
신경질 나는건
어쩌다 보니 내가
김무성같이 비열한 같은 새끼
역성드는 꼴처럼 되어버렸다는 거야.

물론 나도 김무성이 하는 짓
맘에 드는 것보다 안드는게 더 많아.

그렇다고 그냥 말하나하나 죄다
꼬리잡고 물고 늘어진다면..
김무성에 대해 우리가 하는 비판의 무게가
가벼워질 뿐만 아니라.

그 부메랑이 결국은 우리사회 전체에 돌아간다고...

다른 것은 다른 것일 뿐.
틀린 게 아니라는 거!!!

2015년 12월 19일 토요일

책임을 전제했을 때만 한정되는 자유의 의미






오래 전에 살다간 횽님들 중에 디오게네스라는 횽님이 계셨어. 이 양반 스타일이 무지 자유로웠대. 다들 알지?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도대체 뭐가 불만이냐?”고 물으니까.. “지금 당신이 해를 가리고 있어서 불만”이라고 했다는 바로 그 횽이야

그 횽. 철학하는 스타일이 이래. 광장에서 바지를 내리고, 자지를 까놓은 채 딸딸이를 막 치는 거야.. 모여있는 사람들이 소리 치고.. 아녀자들은 꺅꺅 대고 난리나지 않았겠어? 그럼, 딸딸이치던 손으로 배를 한번 쓱 문질러. 그리고 한마디 하는 거지.. “ 자지를 문지러서 성욕이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배를 문질러서 배고픔이 해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에 말이야, 누군가 광화문 이순신장군앞에서 이 디오게네스처럼 자유롭게 바지를 내리고, 자지를 까놓은 채 딸딸이를 치는 사람이 있다 치자. 오해하지 마. 내가 그러고 싶다는 건 절대 아냐..

이게 과연 행위자의 자유인가? 여기서 의견이 갈려. 자유라는 친구도 있고. 자유가 아니라는 친구도 있는 거지. 일단. 광화문광장에서 이 디오게네스처럼 자유롭게 바지를 내리고, 자지를 까놓은 채 딸딸이를 치는 것을 자유라고 말하는 친구를 한번 따라가 보니까. 뭐라고 하나 봤더니. “자유이긴 하지만, 책임을 져야” 한다네?

광장에서 자유롭게 바지를 내리고, 자지를 까놓은 채 딸딸이를 치겠다는데. 도대체 무슨 책임을 져야 물으니까. 공연음란죄의 형사처벌을 받고,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해야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매장되는 것.. 이게 바로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이라는 거야..

아! 그렇군. 바지를 내리고 자지를 까놓은 채 딸딸이를 치길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자유는 있을지 몰라도, 그 자유에 대한 댓가는 아주 혹독하게 치러야 하고. 그 혹독한 댓가가 바로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이라는 게 바로 그 사람의 주장인거야.

그런데 궁금해졌어. 이렇게 그 행위에 대한 혹독한 대가가 예정되어 있고, 그 혹독한 대가를 각오하지 않으면 실현할 수 없는 행위. 그 예정되어 있는 혹독한 대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위축되어 그러한 행동을 하길 감히 삼가는 상태. 그런 상태를 과연 그런 행위에 대해 자유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자유의 정의에 대해 한번 다시 톺아보자고.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그런데, 그 행위에 대한 혹독한 대가가 예정되어 있고, 그 혹독한 대가를 각오하지 않으면 감히 실현할 수 없는 상태가 정말 “자유”로운 거 맞냐고?

광장에서 자유롭게 바지를 내리고, 자지를 까놓은 채 딸딸이를 치는 사람이 형사처벌을 받거나 사회적으로 비난당하는 건.. 주어진 금기와 규율을 어긴 데 대한 형벌일 뿐이지. 자유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고!! 그게 자유였다면 애초부터 책임을 요구하지 않겠지. 책임을 요구한다는 건.. 애초에 그런 자유가 없다는 거랑 마찬가지인거라고.

여태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자유'의 의미를 '책임의 한 전제조건이 되는 것'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인간을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단순히 전개시키는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에 불과해. 마치 책임이 전제된 상태에서 자유를 인정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자유를 구속하는 모든 것들을 사람들로하여금 아무 비판없이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것이지.

우리 인간이 주어진 것을 단순히 전개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창조적으로 자기 형성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바지를 내리고 자지를 까놓은 채 딸딸이를 치길 원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 우리는 단지 그 법에 복종하기만 해야 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그러한 법을 스스로 만들거나 폐지하거나 무력화시킬 수 있는 존재인가?

바지를 내리고 자지를 까놓은 채 딸딸이를 치길 원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매장시키는 사회.. 우리는 단지 그러한 사회에 복종하기만 해야 하는 존재인가? 그러한 사회를 스스로 만들거나 바꿀 수 있는 존재인가?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한 마디는 이런 고민들을 모두 차단해버린다고.

물론 현대판 디오게네스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절대 아냐. 그게 법이든, 금기든, 현대판 디오게네스같은 사람들의 자유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말 외에 다른 이유가 필요하다는 거지..

디오게네스의 자유를 존중해주자면, 침해할 수 밖에 없는 다른 사람의 더 중요한 자유가 아니면, 우리는 디오게네스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거야.. 여기서 우리가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게, 많은 사람들의 “불쾌하지 않을 자유”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물론 많은 사람들이 불쾌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은 참 아름답고도 중요한 일이야. 그런데, 누군가가 불쾌하다는 이유로 다른 누군가의 자유를 부정할 수 있다면, 애초부터 자유를 말하는 게 무의미한 일이 아닐까?

아무도 불쾌하지 않게 만드는 누군가의 행동에 대해 혹시 “자유”가 문제되는 거 본 적 있어? 원래 “자유”라는 관념은 말야, 자기들이 불쾌하다는 이유로 남의 행동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고 싶어하는 인간들 때문에, 그런 억압자들에 반대하기 위해서 생겨난 거라고..

2015년 12월 17일 목요일

인권은 이성의 산물일까? 감성의 산물일까?






인권은 이성의 산물일까? 감성의 산물일까?
 
그것가지고 한 인권단체 친구들하고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나는 이 논쟁이
성악설, 성선설하고 비슷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인권이 이성의 산물이라고 여기는 것은
성악설에 가깝고.
인권이 감성의 산물이라고 여기는 것은
성선설에 가깝다는 거지..
 
그런데, 성선설을 채택하거나..
인간의 본래적 감정을 너무 신뢰하다보면..
빠질 수 있는 오류가 있어..
바로. 인간의 자격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려는 것이지..
 
그들은 인간은 원래 선하다고 믿기 때문에..
나쁜 마음을 가지거나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 같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는 거야.
 
게다가 생각보다 세상에 많아.
인간의 자격..
그것을 결정할 자격이
자기한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데  말이지..
사람이 자신이 사람이길 포기할 수 있다면..
누군가 타자가 다른사람의 행동을 들어
그 사람의 권리포기여부를 대신 결정하거나 간주할 수 있다면..
인류가 지금까지 구축해온 "인권"이라는 관념은
한 순간에 쓰레기가 되는 거야.  
 
인권이라는 관념은
인간이 가지는 어떤 권리 중에는
양도하거나 처분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확신에서 출발하기 때문이지.
     
그런데도
자신은 매우 특별해서
마치 인간의 자격을 결정할 자격이
자기한테만큼은 있다고 믿는 얘들이 있는데..
얘네들한테는 약도 없어.
   
"저 놈은 인간이길 포기한 놈이야"
비장하게 이렇게 말하면
멋있어보인다고 생각하는 걸까?
   
스스로 포기하지도 않았는데,
타자의 행동을 두고 옆 사람이 분노에 가득차서,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했네" 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권한 하에 있지 않는 것을
자의적으로 재단하려는 유아적인 발상이거나
자신만이 옳다는 병리적인 상태에서 비롯된 거거든.
한마디로 제일 빙신같은 거지..
   
물론 인간들이 하는 행동 중에서는,
인간이라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기대되는 것들이 틀림없이 있어!!
   
그러나, 곰곰히 톺아보자면,
원래 인간이 아닌 동물들은 그런 흉폭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세상에서 가장 흉폭한 행동을 할 수 있는 동물은 다름 아닌 인간이라고..
따라서 가장 분노를 불어일으키는 것도 사실은 인간이고..
어찌보면 흉폭한게 가장 인간스러운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
   
중요한 것은
나약하고 불완전하며 결점이 많은
인간의 본성과 감정을 깨닫고..
이성의 힘으로 그것을 이겨보려고 애쓰는 것..
그게 인권의 본질이 아닐까?
     
잊지 말자고.
세계인권선언은
인류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갖는 고유한 존엄과
평등하고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이성의 힘으로) 승인하지 않을 때,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만행이 초래되었다는 자각에서 출발했다는 것.
 
인권..
대개는 인간이 주체가 되는 권리라고 받아들여지는게 보통이지만.
사실은 인간에게 부여되는 의무라고 생각하는게
더 필요할 때가 있어..
     
누구도 산에 갔다가 아생동물에게 물어뜯겨 죽는것을 인권침해라고 하지 않지.
빌딩만한 쓰나미가 몰려와 많은 사람들이 죽는것을 인권침해라고 하지 않아.
인권침해라는 표현은 사람이 사람한테 한 짓에만 유효하다고.
   
그렇다면 인권은 단지 누군가의 권리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사람이기 때문에 가지는 의무라는 거..
   
인간 대우해주기 싫은 사람 앞이라고 해서
만약 우리가 그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면
바로 그 인간대우해주기 싫은 바로 그 사람하고
달라질 게 하나도 없다고.
   
흉악범이 처벌받는 이유는,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였기 때문인데..
이것은 자신의 인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를 져버렸다는 말이기도 해..
그런데도 흉악범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은,
흉악범을 존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인무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고..
   
그건 흉악범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 대한 문제가 되는 거지..
 
He who fights with monsters might take care lest he thereby become a monster.
And if you gaze  for long into an abyss, the abyss gazes also into you.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동안 들여다 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될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중에서...


2015년 10월 12일 월요일

진정성



루소가 처음 한 말 같은데..
혹시 진정성.. 그 뜻이 뭔지 아는 사람 있어?
나도 잘 몰라서 묻는거야..
그걸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람은 혹시 그 뜻을 아나 싶어서..
 
남에게 진정성 결여라는 말하는 거..
그게 바로 남의 내면에 대한 도덕재판인게다..
자신은 남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다는
자폐적인 자기 맹신과 궁예질..

도대체 어쩌라고??
하여간 병신들..
할말 없으면 진정성이 없대..

 예전에 내가 알던 뇐네 중에서.
이런 인간이 있었다.

"유시민이 그 노마.
내가 예전에 볼 때는
초심이 살아있었는데..
지금도 그런지
내가 한번 봐주겠어..“

내가 하도 기가 막혀서 물어봤다.

"형님은 유시민씨 초심이
살아있는지 안살아있는지..
어떻게 아세요?

그 뇐네 왈..
"어. 난 내가 딱 보면 알아.."

헐 그 때 난..
자폐적인 자기맹신이
얼마나 무서운지
절실히 깨달았다.

지 스스로 관심법을
할 줄 안다고 믿는 병신..
얘네들은 약도 없다.
그냥 지 느낌이 하느님이다..

"눈빛이 가까이서 보니
그렇게 선하고 착할 수가 없더마...
사람이 오십이 넘으면 눈빛을 숨길순 읍다고 나는 생각해..."

<=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미숙아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런 말은..
바로 하나의 극단적인 이분법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선하고 착한 사람과..
악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어진다는...

저런 미숙아들 사고 구조 안에서는..
악인이 선인으로 개과천선하거나
선인이 악인으로 변질될 수는 있어도..
한 사람의 내면에서
수많은 악과.. 수많은 선들이 공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

한 사람의 내면 속에는
수많은 악과 수많은 선들이 공존하고 있고..
그 사람의 철학과 의지에 따라..
떄로는 선이 악을 이기는가 하면..
때로는 악이 선을 이기기도 하는 거거든..

그런데 저런 미숙아들은
그걸 깡그리 다 무시해버리지..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쟤네들한테는
자기 느낌이 제일 중요한 거거든..
뭐에 대한 느낌?
그 사람에 대한 느낌...

"견해의 대립을 통해
이성을 눈뜨게 하지 않으면,
인간을 오류와 무지로 몰아가는
자연적 성향이
지체없이 진리를 이기게 된다."
- 바나주 드 보발 -

"병신"



몇 년 전에 형사 한명을 만났어.
그런데 그 형사님..
깡패두목 김태촌하고 굉장히 비슷하게 생기셨더라고.
눈매도 살벌하고..
그래서 살금살금 눈치보면서.. 얘기해주었지..

“형사님 김태촌이라고 아시죠? 깡패두목이요?”
안대..

“형사님 김태촌하고 닮았다는 말씀을 많이 들으시지 않나요?
정말 똑같이 생기셨어요.”
웃기만 하더라고..

그래도 형사인데 범죄자 닮았다는 얘기가
기분 나쁠지도 모르잖아?
물어봤지

“혹시 기분 나쁘신 건 아니죠? ”
아니래..

“형사님한테 범죄자 닮았다는 얘기라서
혹시 실례는 아닌가 싶어서요..”

그랬더니.. 그 형사의 다음 말은 나한테 조금 충격적이었어.

등신 같다는 말은 기분 나쁘지만..
범죄자 같다는 말은 기분 안 나쁘대..

그 형사의 말과 철학을...
한참 동안 마음 속으로 곱씹어봤지..

정의를 실현해야 할 경찰이
그 스스로 범죄와 불의의 화신처럼 보여지는 것보다
등신처럼 보여지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현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냐

가난하고 성실하게 산 사람들이
매번 지는 세상..
심지어 조롱받는 세상이잖아.

그런 세상이
약자가 되는 것을
약자처럼 보이는 것을
약자라는 걸 남에게 들키는 것을
악인이 되는 거 보다
두려워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언젠가 어떤 놈이
병신이라는 말 대신에 대체할 말이 없냐고 묻던데..

글쎄.. 병신이라는 욕이
힘을 쓰는 심리적 메카니즘을 잘 생각해봐..  

장애인비하의식 때문에..
병신이라는 욕이 힘을 쓰는 것 같아?
아니거든.  

약자가 되는 것을
약자처럼 보이는 것을
약자라는 걸 남에게 들키는 것을
악인이 되는 거 보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니까.  
병신이라는 욕이 힘을 쓰는 거야!.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면..
“병신”이라고 한마디 해봐..  

상대방이
약자라는 걸 남에게 들키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약자처럼 보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 욕은 즉빵이야!  
걔네들 눈에 장애인만한 약자는 없으니까..  

그런데, 상대방이
그런데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건 그냥 욕하는 니 바닥만 드러낼 뿐이라고..
 
듣는 상대방의 상태에 따라 효과를 발휘하는...
선택적 폭격이 가능한 욕이지.. “병신”

병신이라는 욕을 쓰지 않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장애인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질 것인가..
약자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질 것인가..
중요한 건 그거 아닐까 싶어.
 
앞으로 누가 너네들한테 ‘병신!’이라고 욕을 하면,
 ‘그래요, 난 병신이에요! . 만세!~’ 이러면 되는 거야.

 “병신” 소리좀 들으면 어때?
남들한테 장애인이나 약자처럼 받아들여지는게 그렇게 싫어?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
병신이라는 욕을 들었는데..
진짜 내가 병신같은 짓을 했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기분 더러워졌다?

그건 욕 때문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 때문에
기분 나빠진 거야..
그럼 그냥 욕먹을 짓 했구나..생각하면서..
좆잡고 반성하면 돼..    

2015년 10월 3일 토요일

자유는 권장이 아니고. 배려는 권리가 아니다.



1. 이야기 하나

얼마 전에 국제앰네스티가 오랜 고민과 토의 끝에 성매매에 대한 처벌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힌 적이 있는거 다 알지?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성매매 처벌에 대해 반대했던 몇 안되는 지식인 중에는 나도 포함이 되는 거 다들 아나? 내가 누차 얘기했으니까 아는 사람은 다 알거야?

그런데 하루는 어떤 멍청한 놈이 와서 나한테 따지는거야? “네 여동생이나 네 딸이 성매매를 한다고 하면 어쩌겠는가?” 가끔은 이렇게 성매매처벌에 대한 나의 반대를 두고, 성매매에 대한 찬성 내지는 권장으로 오해하는 멍청한 놈을 만나곤 하거든? 난 그 때 그 멍청한 놈에게 이렇게 얘기해주었어.

“딸이나 여동생에게 성매매를 권장할 순 없다. 그러나 그들이 성매매를 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막을 방법도 나에겐 없다. 내가 하랜다고 하고, 하지말랜다고 하지않겠는가? 다만, 만약 그들이 성매매와 관련해서 나에게 진로에 대한 상의를 해온다면, 난 다행스럽고 기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동안 내가 그들과 굉장히 잘 소통해왔다는 뜻일테니까. 친오빠나 아빠에게 자신의 성매매에 대해 상의를 할 만큼 친밀한 여동생이나 딸을 나는 일찌기 본적이 없다. ”

2. 이야기 둘

내가 며칠 전에 이런 얘기를 한적이 있어. “만약에 누군가의 기분 나빠지지 않을 자유를 위해서.. 다른 이의 자유를 제한한다면, 처음부터 자유를 주장하지 않는 것보다 더 웃긴 상황이 벌어진다.. 자유라는 말이 아예 무의미해진다는 것. ” 무슨 얘기인고 하니, 기분 나쁘지 않을 자유를 위해서 남의 자유를 제약할 수는 없다는 얘기야. 그런데 이 얘기를 어떤 놈들은 남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을 권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멍청한 놈들

성매매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성매매를 권장하는 것과 다르듯이, 남을 불쾌하게 할 자유를 주장하는 것도, 남을 불쾌하게 하는 것을 권장하는 게 아냐. 불쾌하게 할 자유라는 것은 불쾌하게 해도 괜찮다는 게 아냐.

그건 다른 사람들이 왈가왈부하지 못하는 행위 주체 당사자의 문제라는 거야. 그러니까. 다른 누군가의 자유가 설사 남을 불쾌하게 하더라도, 단지 그 이유만으로는 그 사람의 자유를 문제 삼을 수 없으니까. 그 사람한테 뭐라고 하지 말고.. 너나 잘하라는 뜻이야.

3. 이야기 셋

어제쯤 나한테 투항을 선언한 어떤 늙은 할망구가 있어. 이 할망구가 그러는데. 자기는 남들의 눈치를 많이 본대. 무서워서 그러는게 아니래. 자기 경솔함이 지가 좋아하는 사람. 지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상처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해서래. 그렇게 조화를 이루고 싶어서래.

이런 할망구의 태도는 매우 권장할만한 것이야. 아름다운 일이지. 이걸 두고 사람들은 “배려”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런 배려가 아름다운 이유가 뭔지 알아? 행위 주체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행해지기 떄문이야. 만약에 누군가 이런 배려를 강제한다고 생각을 해보라고. 얼마나 끔찍하겠냐고? 끔찍하기만 해? 배려의 값어치를 떨어뜨리는 일이겠지?

그래서.. 남으로부터 배려받는 일을 자기의 권리라고 착각하거나. 남에게 배려를 강요하는 일은.. 인류의 평화를 깨뜨리는 아주 나쁜 행동이라고. 배려는 고마운 일이지 당연한 일이 아니라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배려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알거든..? 그러지 말라고. 배려.. 좋은 거니까.. 배려 많이 하고 살되.. 남한테 지랄대지 말고 너나 잘하고 살라고. 배려를 남에게 강요함으로써 배려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무식한 짓 좀 하지 말고.

복창 한번 할까?

자유는 권장이 아니다!!
배려는 권리가 아니다!!
남 걱정은 당사자에게, 나는 내 걱정만 잘하자!

질문 있어?

2015년 9월 30일 수요일

작가 고종석에게 '성폭력 피해자 모욕' 혐의? 검찰은 도덕재판을 하려는가?



벌써 2년이 지났다. 고은태 교수 성희롱 사건 얘기다. 당시 작가 고종석이 가루가 된 사건이 있었다.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이 글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상당히 혐오스런 트윗들을 리트윗하겠다, 분위기를 상상하는 데는 도움이 될 거다, 확실한 것은 G(고 교수)가 가해자고 이 여자분이 피해자다!". 또 그는 그 직후 피해자의 트윗 8개를 한꺼번에 리트윗하기도 했다.

고은태 트윗의 내용 따른 충격 때문이었을까? 네티즌들은 정신을 못차렸다. 이미 그들의 눈에 100% 악인으로 규정당한 고은태다. 고은태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되는 말을 하는 사람은 그들에게 "성희롱범" 고은태와 다를바 없었다. 뱡향을 빗나간 분노의 화살은 고종석을 가루로 만들기 충분했다.

까불기 좋아하는 한명의 늙은 작가가 필화를 좀 독하게 겪은 사건이려나 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두고 검찰이 기소를 했다고? 오올.. 도대체 무슨 혐의? 무려. 모욕죄란다. 아니 피해자가 이미 공개한 단순한 사실의 적시에 불과한데 모욕죄라고? 명예훼손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모욕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검찰에 따르면 "고종석이 고 교수를 두둔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글을 본 사람들이 '피해자가 사실은 문란한 여자'라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오올..

이 정보를 통해 추론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이다.

첫째. 까불기 좋아하는 바보 같은 고종석이 수사기관의 조사당시 묵비권을 포기한채 자백을 한 경우다. 자신이 "고 교수를 두둔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글을 본 사람들이 '피해자가 사실은 문란한 여자'라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 이런 행동을 했다"고. 뭐 이런 경우는 뭐라 할 말이 없다. 고종석의 자업자득이다. 돈 많이 버시는 양반이니.. 뭐 알아서 하셔라..

둘째. 이 경우는 상상하기 좀 끔찍한 경우다. 검찰이 고종석의 내면을 재판하고 있는 경우다. 무슨 말이냐고? 원래 법은 구체적 행위만을 문제 삼는다. 당연히 내면세계를 자유로운 권리 공간으로 허용해야 한다. 법률로 금지하지 않는 행위는 비록 반도덕적이라고 할지라도 처벌하지 않는 것. 행위를 처벌할 뿐 행위자의 인격은 처벌 불가능한 권리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법치다.

고종석이 피해자의 트윗을 리트윗한 것이 "고은태를 두둔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글을 본 사람들이 '피해자가 사실은 문란한 여자'라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검찰. 있을 수 있는 의심이긴 하다. 그러나 자백이 없다면, 그것은 의심일 뿐이다.

의심을 근거로 남의 내면에 대해 처벌을 하려는 건. 법치가 넘볼 수 있는 선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재판이다. 이와같이 도덕 재판이 횡행하는 사회는 공포가 지배하는 폭력 사회다. 행위뿐만 아니라 내면세계도 신문의 대상으로 삼으며, 행위자의 인격까지 처벌하기 때문이다. 혹시 검찰은 이와 같은 도덕재판이 횡행하는 공포사회를 만드려는가?

벌금 200만원에 약식 기소한 검찰에 맞서 고종석은 정식재판을 청구했으며 다음달 6일 첫 재판을 앞두고 있다.

2015년 3월 7일 토요일

우리 옆에 100% 악인은 없다



"우리에게는 이처럼 ‘성숙한 시민의식’이 있지만 ‘악한 인간’을 대하는 우리 의식에는 그런 면이 부족하다. 악한 인간이 저지른 부정적 결과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악한 인간’을 대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란 무엇일까? "

"그것은 악인이 저지른 부정적 결과에 대해서는 단호한 법 집행이 필요하지만 그 결과를 일으키게 한 과정만큼은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인이 한 사회에서 갖는 ‘책임의식’도 그중 하나다."

출처 : http://weekly.donga.com/docs/magazine/weekly/2007/06/04/200706040500004/200706040500004_1.html

2015년 3월 6일 금요일

김기종씨.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을 파괴한 건 우리였습니다.



"에효.. 테러로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데 왜 진보진영마저 일베스러워지는 건지"

김기종씨 당신이 저지른 사건을 보고 제가 처음 한 말입니다. 진보인지 보수인지 당신에 대해 별다른 고민 없는 상태에서 한 말이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일베나 군복입고 다니는 할아버지들, 새누리당 같은 사람들과 비교해볼 때, 그 순간 왠지 당신은 아마도 우리와 더 가깝다고 느꼈었나 봅니다.

지금 온나라가 아니 온세계가 당신을 규탄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진보이든 보수이든, 군복할아버지든, 세월호진상에 대한 진실규명을 원하는 사람이든.. 당신을 규탄하는데 이제 구분은 없습니다. 이제 누구든, 당신이 자기 편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입니다. 군복할아버지들은 당신을 기화로 종북세력을 척결하자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제 페친 중에 한분은 당신이 극우보수민족주의자일 뿐, 진보와 전혀 관계없다고 말합니다. 그 분은 당신을 진보라 이름붙여 진보전체를 종북몰이로 몰아가는 지금의 현상이 걱정스러우신 모양입니다. 피아를 구분하도록 훈련당해온 것은 진보나 보수의 구별이 없습니다.

묻습니다. 당신은 보수인가요? 아니면 진보인가요? 물론 한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 보수나 진보 둘 중에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것만큼 부질 없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생각해봅니다. 사회학자 조희연식 분류법에 따라 보자면, 당신은 아마도 경제적으로는 자유보다 평등에 가까운 "진보"이겠지요. 사회적으로는 자유보다는 권위주의에 가까운 "보수"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새누리당과 종미에 반대하는 "진보" 아니신가요?


그리고 별다른 고민 없이 다른 사람들처럼 단순한 진영논리로 살펴본다면, 일베나 군복입고 다니는 할아버지들, 새누리당 같은 사람들과 비교해볼 때, 왠지 당신은 아마도 우리와 더 가까워보인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군요.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되었나요?

어제 당신의 사건을 접한 이후에야 당신이 스물 아홉살 때 겪은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괴한들이 사무실에 습격해서..당신의 후배를 강간하고, 다른 후배를 집단구타하고 실신시키고 달아난 사건.. 오홍근 기자 테러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도 특수조직의 치밀한 사전계획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였다는 제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결국 미제사건이 되고 말았죠.

눈을 감고 당신이 되어 봅니다. 억울함, 죄책감. 그리고 패배감. 당신의 고통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당신은 평생을 그 사건 속에서 해방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갔습니다. 내가 당신이라면 어땠을까요?

88년 그날. "우리" 안에 있던 당신은 백색테러분자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파괴된 당신을 외면했습니다. 이미 파괴된 당신이 너무나 불편했나 봅니다. "우리"들의 외면은 끊임없는 당신을 더욱 파괴했을 것입니다.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그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좀더 연대했더라면, 오늘의 당신은 어땠을까?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철저하게 망가진 당신의 배후에는 다름 아닌 "우리"가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로부터 당신을 떠나보내려고 합니다. 그동안 당신을 외면했던 "우리"로서, 꽤나 염치없고 슬픈 선택입니다. 진보인지 보수인지 그 분류를 통해 적과 우리를 구분하던 시대와 함께 당신을 떠나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후세에게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할 수 없기에 내릴 수 밖에 없는 슬픈 선택입니다.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 박정희처럼 되어서는 안되니까요.

우리 안에서 우리가 될 수 없었던 당신을 아프게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제 적이 된 당신을 아프게 바라봅니다.  당신이 적이 될 수 밖에 없도록 몰아간 주제에 이제 당신을 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염치 없는 "우리"의 신세를 이해해주시겠습니까?

니체는 말했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동안 들여다 본다면 그 심연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 될것이다." 당신은 너무 오랫동안 괴물의 심연을 바라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당신을 내팽겨쳐준 "우리"로서, 끝까지 함께 당신과 함께 하지 못한채 당신을 외면해서 죄송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2015년 2월 15일 일요일

문재인을 포기해? 지지하지 않기에 무심해?



문재인을 포기했다느니
지지하지 않기에 무심하기로 했다느니
초등학생 투정부리는 소리가 진짜 난무하네..
누가 저런 어리광을 부리는 지 알아?

지지하는 정치인을
지 애인인줄 아는 애들이야..

병X신 짓도 가지가지야..
알아알아.
박정희참배에 대한 문재인의 말바꾸기..
나도 무지무지 맘에 안들어..

그런데 말야. 이걸 명심해..
니들은 애인을 고르는게 아니야..

어느 신하를 쓸 것이냐..
투표할 대상을 고르는 거라고..
이 나라의 제왕인 국민의 자격으로..

여기서 잠깐 비밀의 문.
영조대왕이 하신 말씀..

“전란의 위협이 없는 이 상황에서는 홍계희와 같은 치밀한 사람이 필요하다”
“홍계희가 아무리 신흥복 사건의 주범이라고 해도 나는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완벽한 신하가 아니라 필요한 신하를 쓰는게 군왕의 정치다. "

우리도 마찬가지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완벽한 신하나 예쁜 신하가 아니야.
필요한 신하를 고르면 된다고.

그리고 그 필요한 신하라는 거.
우리한테 무지 귀해..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예쁜 신하만을 고집할 수 없다고..


철학자 박구용의 말처럼
우리는 차이에서 희망을 봐야 한다고..

http://www.hani.co.kr/arti/SERIES/56/246729.html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그 차이를 더 벌릴 수 있는 "신하"가 나오게 하기 위해서

맘에 안들어도,
끊임없이 질책하고 비판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냐?

문재인을 포기해?
지지하지 않기에 무심해?

이렇게 정치인지지를
연애하듯 하는 놈들이 있는데..
그러니까 "빠"소리나 듣고 앉아있지..
이 나라가 이모양 이꼴인 거?
바로 니들 때문야!

복창한다..

"차이가 희망이다"
"같음보다 다름을 알아야 정치의식이 성숙한다."
“완벽한 신하가 아니라 필요한 신하를 쓰는게 군왕의 정치다. "

2015년 2월 13일 금요일

"KBS 보도국에 ‘일베’ 기자 있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KBS 보도국에 ‘일베’ 기자 있다” 제하의 미디어오늘의 보도가 왠지 좀 불편하다. 저들의 사상검증과 빨갱이 사냥이 떠올라서다.

일베가 퇴행집단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런데 일베 역시 비뚤어진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KBS 보도국. 그들 역시 별나라 집단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한 부분일진대, 그 안에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게 무엇이 이상한가.

니체는 말했다. "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일베에 직면하는 미디어오늘의 방법. 이게 과연 최선인가?

철학자 박구용에 따르면, “전통사회에서 도덕 재판에 의한 처벌은 가혹한 폭력”이었다. “도덕 재판은 행위뿐만 아니라 내면세계도 신문의 대상으로 삼는다.” 뿐만 아니라 “행위자의 인격까지 처벌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행위자를 처벌한 후 공동체에서 추방할 것을 명령한다.” “도덕이 실현된 사회는 좋은 사회지만, 도덕 재판이 횡행하는 사회는 공포가 지배하는 폭력 사회다. 법치주의가 도덕 재판을 금지하는 이유다.”

혹시 일베로 확인된 KBS 기자에 대한 미디어오늘의 보도. 도덕재판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 기자의 편향된 인식이 보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잘 감시하는 한편, 기자 개인의 내면세계는 자유로운 영역으로 남겨두는 게 좋지 않았을까? 기자로서는 사적인 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게시판활동까지 추적하여 신상털이를 하거나 사상검증을 하는 것이 과연 일베에 대한 좋은 대응방법일까?

소수자에 대한 폭력적 입장과 극우편향성. 그 기자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적어도 직장과 보도를 통해 그걸 드러낼 수 없었다. 쪽 팔린 줄 아는 거다. 위선이라고? 위선이 뭐가 나쁜가? 위선은 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악의 존경심이다. 선에 대한 존경심이 전혀 없는 악보다는 선에 대해 존경심이라도 가진 악이 덜 나쁜 것 아닌가?

소수자에 대한 편향된 의식을 전파하는 일베 현상. 그것에 대한 가장 좋은 대응방법은 소수자들에 대한 더 큰 똘레랑스로 복수하는 것이다.
 
 

2015년 2월 12일 목요일

우리 안의 박정희. 문재인 안의 박정희



박정희. 공과 과를 가진 역사의 문제적 인물이다. 잔당들이 내세우는 빛나는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를 왜 긍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가? 그것은 박정희라는 역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순간. 우리는 후세에게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고 말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의 집권을 막는다는 절박한 목적을 위해 그깟 참배가 대수냐고? 박정희도 그랬다. 민생고라는 절박한 목적을 내세운 그에겐 못할 짓은 없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그깟 죽어버린 독재자들의 유골 앞에서 무릎을 꿇으면 어떻고, 눈물을 흘리면 어떤가."  문제는 그 죽어버린 독재자의 유골이 그냥 해골바가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연 그 독재자는 진정으로 죽어버렸는가? 정신차리자. 30년 전에 죽은 그 독재자가 지금의 대통령을 만드는 게 현실이다.

"국정원과 검찰, 경찰, 사법부, 언론, 재벌, 학계, 새누리당에서 10년간 성장하고 탄탄하게 그 세력을 형성한 '거악'들을 참배 하나에도 정의와 무능이라는 칼날을 드리우는 세력이 상대할 수 있냐"고? 글쎄다. 결과를 예단할 순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란 거기까지 가는 과정의 정당함 아니던가? 민주주의로는 거악들을 직면할 수 없다고 치자. 그렇게 이길 수 없다면 민주주의와 헌정질서까지 포기할 셈인가?

"대한민국에게 필요한 것은 한 쪽의 야만에 '야만'으로 대항할 수 있는 강한 힘"이라고?  그렇다면, 우리가 박정희와 무엇이 다른가?

30대의 네티즌 “모비딕”은 민주화 운동 기간에 성장한 4-50대의 사고방식들이 싫단다. 나또한 그들이 싫다. 그런데 이유는 모비딕과 정반대다.  내가 그들이 싫은 이유는 그들의 사고방식이 바로 모비딕과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비딕처럼 초인을 요구한다. 그들은 모비딕처럼 괴물에 맞서는 방법으로 괴물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유연성? 좋은 얘기다. 그러나 유연성에도 분별력은 있어야 한다. 유연성에 대해 가지는 분별력을 구 시대의 방식 치부하는 건, 유연성이 아니라 어리광이다.

그런 면에서 단지 물리적인 나이 때문에 모비딕에 의해 물뚝심송이 다른 4~50대와 동일시되는 건 부당하다. 물뚝심송이 얼마나 철이 없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40대의 물뚝심송과 30대의 모비딕. 민주화 운동 기간에 성장한 4-50대의 사고방식과 누가 더 가까운가? 물리적인 나이가 아니라 사고를 따지자. 당연히 모비딕이다.

그러한 모비딕이 물리적인 나이를 내세워 물뚝심송의 사고를 민주화 운동 기간에 성장한 4-50대의 사고방식과 동일시한다. 과정을 중시하는게 구시대의 방식이고, 결과를 중시하는 자신이 신세대라는 거다.

니체는 말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노무현이 실패했다고? 글쎄다. 내가 볼 때 노무현같이 성공한 지도자는 없었다. 물론 그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다. 부족한 점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괴물과 싸우면서 그 싸움 속에서 괴물이 되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큰 성공인지 왜 평가할 수 없는가?

노무현같이 성공한 지도자를 좀더 많이 만드는 거. 그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그것만이 과정의 성공을 결과의 성공으로 이끄는 유일한 방법이다.  초인 한명으로 첫술에 배부르리라는 망상부터 집어치워야 한다. 그런 망상이 바로 박정희와 그 잔당들의 방식이다. 김일성을 내세워 자신을 정당화한 박정희를 어쩌면 그토록 닮아가는가?

"저도 박정희 대통령 묘역에 언제든지 참배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가해자측의 과거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통합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 2012년 9월 18일 문재인의 말이다. 반성은 없었다, 꼼수 만으로 통합이 가능하지 않은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2015년 2월 10일 화요일

한국인은 착하다. 그러나 부패했다.



한국인은 대체로 착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부패했다. 자신이 부패했다는 걸 느씨지 못할 정도로 '부패의 생활화'가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이루어져왔다. 그래서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촌지'에서부터 연고와 정실에 의한 봐주시를 '사람 사는 인정' 쯤으로 가볍게 생각한다.

한국인의 부패는 한국인의 인성인가? 아니다. 그건 처절한 '생존술'이었다. 집권세력이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다 썩어 있다면 보통 사람들이 무슨 수로 생존을 꾀할 수 있을 것인가?

부정부패는 정권안보의 대들보

독재권력은 권력 유지와 강화를 위해 민중을 부패시키며 민중의 부패는 새로운 민주권력의 성공을 어렵게 만든다. 일단 부패가 시작되면 가장 좋은 제도도 쓸모가 없으며, 자유롭고 공개된 토론은 민중에게 덕성이 있을 때엔 귀중하지만 그들이 부패했을 때에는 위험하다. 또 독재 체제에서 혜택을 누렸던 사람들은 정직하고 명시적인 기준에 의해서만 존경과 보상이 주어지는 자유로운 사회에 분개하기 때문에 새로운 민주주의 지도자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마키아벨리로부터 배우는 지도력』이라는 책에 소개된 마키아벨리의 주장이다. 마키아벨리의 말이라고 해서 폄하할 필요 없다. 정치인들만 마키아벨리의 후예들이 아니다. 한국적 삶은 대부분의 평범한 아저씨와 아줌마들을 마키아벨리로 만들었다. 한국에서 필요 이상으로 마키아벨리를 욕하는 이상 풍조는 역으로 해석해야 옳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너무 싫어서 괜히 더 욕하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 국민의 약 80%는 한국 사회의 부패가 심각하다고 보고 있으며 20대와 30대의 절반이 '이민을 갈 수만 있다면 떠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최근의 한 조사 결과(『한국일보』4월 24일)을 읽으면서 마키아벨리의 위와 같은 주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인은 대체로 착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부패했다. 자신이 부패했다는 걸 느씨지 못할 정도로 '부패의 생활화'가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이루어져왔다. 그래서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촌지'에서부터 연고와 정실에 의한 봐주시를 '사람 사는 인정' 쯤으로 가볍게 생각한다.

한국인의 부패는 한국인의 인성인가? 아니다. 그건 처절한 '생존술'이었다. 집권세력이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다 썩어 있다면 보통 사람들이 무슨 수로 생존을 꾀할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조선조 말기 이래로 몇 세 개에 걸쳐 민중은 공권력과 공적(公的) 영역을 신뢰할 수 없었다. 정부로부터 과도한 수탈만 당하지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건 오직 사적(私的) 영역 뿐이었다. 당연히 사적 영역은 연고와 정실 위주로 움직였고 한국인들은 그 네트워크를 근간으로 하여 생존을 도모하였다. 억울하면 개인적으로 출세할 일이었지, 공적 영역에 그 어떤 해결책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는 이미 1970년대사를 통해 박정희 18년 체제가 '정권 안보'를 위해 부정 부패의 전 사회적 창궐을 획책했거나 방임해왔다는 걸 잘 살펴보았다.

전두환 체제 7년은 그러한 총체적 부패구조의 성숙기 또는 완성기였으며, 부정부패는 '정권안보'의 대들보로 우뚝 섰다. 5공이 내세운 '정의 사회 구현'은 실제론 '부패 사회 구현'이었으며, '정의'라는 말은 길거리 쓰레기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극우 독재체제와 부정부패가 손에 손을 맞잡고 같이 가는 동반자라는 건 이미 전 세계적으로 충분히 입증된 사실이다. 이는 국제투명성기구의 2002년 '국가별 부패지수'를 살펴보더라도 잘 드러난다. 10점을 가장 투명하고 공평한 무(無) 부패의 사회, 그리고 1점을 가장 부정부패가 심한 사회로 했을 때, 각 나라별로 순위와 지수를 매겨보면 다음과 같다.

1위 핀란드(9.7), 2위 덴마크(9.5), 4위 아이슬란드(9.4), 6위 스웨덴(9.3), 10위 영국 (8.7), 12위 노르웨이(8.5) 16위 미국(7.7), 18위 독일(7.8), 40위 한국 (4.5), 44위 그리스(4.2), 59위 중국(3.5), 71위 러시아(2.7), 96위 인도네시아(1.9)

이러한 결과에 대해 박노자는 최근 저서 『나를 배반한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북유럽의 사민주의 국가들(핀란드, 덴마크, 스웨덴 등)에게서 부패정도가 가장 적게 나타난 점이다. 이와 반대로, 극우들이 오랫동안 파쇼적 독재를 해왔던 남유럽(이탈리아, 그리스 등)은 한국과 비교될 정도로 상대적으로 부정부패가 심하다. 마키아벨리의 조국 이탈리아에서도 무솔리니(1883∼1945) 정권이 20년 동안 국정을 휘어잡는 동안 부정 부패가 거의 제도화되었다. 지금도 금전 거래가 수반되지 않은 인사청탁은 비도덕적 행위나 범죄로 보지 않을 정도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극우주의와 봉건적 잔재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다. "

copyright 2003 강준만

출처 : 강준만, <머리말>,『한국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권』, (인물과 사상, 2003) 14 ∼16쪽

2015년 2월 8일 일요일

"쿨병걸린 병신"?




이성친구와 헤어질 때 유독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헤어지려는 그 친구와 있을 때의 시간이 아쉬울 정도로 꽤 행복했었나 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에게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준 그 친구에게 감사해할 일인데, 불완전한 사람종족들은 대개 그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슬픔과 아쉬움은 그 감사한 시간을 망각하는 수준을 넘어서고,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어느덧 감사는 슬픔으로, 슬픔은 원망으로, 원망은 복수로 변신하곤 하죠.
 
"쿨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는데, 저는 이 말을 "기대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성친구와의 실연이 원망과 복수심으로 변모하는 까닭은 그 내 옆에서의 그 친구의 존재가 어느것 너무나 당연해졌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나 함께 하리라는 부질없는 기대 속에 그 동안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었던 이성친구와의 시간들에 대한 감사한 자세가 개입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당연하지 않은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기대했으니까요. 그런 행복이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는 "기대" "기대" "기대".
 
기대는 어느덧 상처를 만듭니다. 상처에 "비뚤어진 자존심"이라는 몹쓸 놈까지 끼어들면 "자기합리화"에 까지 이릅니다. 여기에 자신의 문제를 상대방의 문제로 치환시키는 병리적 태도까지 겹쳐지면,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하고 이상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끔찍한 형태로 발전하게 되는 법입니다. 여기서 "찌질함"이라는 말이 생겨납니다. "쿨함"의 반대말입니다.
 
상처? 기대를 하지 않으면 상처받지 않습니다. 실망? 기대를 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대를 버리세요. 뜻밖의 감사한 일들이 삶에서 튀어나와 인생을 풍요롭게 해줄지도 모릅니다.

이런 저도 때로는 기대를 합니다. 다만 제가 품는 그 기대가, 부질없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것이길 바랄 뿐입니다. 제 개성이 위협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기대. 타인의 자유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과 많이 만났으면 하는 기대...

어제 저에게 댓글을 통해 “쿨병 걸린 병신”이라고 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이런 분들을 악플러라고 하나요? 쿨한게 병신인지, 찌질한게 병신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찌질병 걸린 병신 대신에 쿨병 걸린 병신을 선택할 것 같습니다. 쿨한 건 찌질한 병신이 되기 거부하는 이성의 산물입니다.

꼬다리.

압니다. 저처럼 정떨어지게 쿨한 사람도 드물다는 거.
사실은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쿨하지는 않았답니다.
기대 많이 하고 상처 많이 받고.. 찌질하고..
내가 어렸을 때 여자친구와의 실연앞에서
얼마나 찌질했었는지 들으신다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저도 그 때 생각만 하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찌질함에서 쿨함으로 조금씩 더 가까워지는 과정.
저는 이것을 스스로 '성장'이라고 평가합니다.
  

2015년 2월 4일 수요일

"을 지키는 길" 을지로위원회라고요?



을지로위원회라고요?
많이는 들어봤는데요,
그 뜻이 "을 지키는 법"이라는 것은
이번에 을이네님 덕분에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뭐 멤버를 보아하니..
참여연대 김기식 형도 보이고
우리 지역 국회의원인
김현미 의원도 보이는군요.
좋은 분들이 좋은 일 하시는 건 알겠습니다.

제가 사실은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
입주자대표회의 보드멤버 중에 한명인데요.
우리 아파트의 을이라고 할 수 있는
경비아저씨들 권리를 지켜드리는데..
애로가 아주 많습니다.

자세한 전후사정은
링크를 달아 설명해놓겠습니다.

http://BL0G.kr/209
http://BL0G.kr/224
http://BL0G.kr/239

한번 살펴보시고..
을지로위원회에서
혹시 도와주실 부분이 없는지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제가 우리 아파트 경비아저씨와 관련하여
바라는 것은 간단합니다.

첫째. 최저임금법에 비추어볼 때
이분들의 급여가 2014년에
최저임금 90%보다 못미쳐 지급되었는데..
못미쳐 지급된 부분을
이분들이 지금이라도
모두 지급받으셨으면 좋겠고..

둘째, 2015년 8월까지 유효한
경비아저씨들의 근로계약서에 따르면
이분들이 휴게시간은 7시간인데요,
관리사무소장이 경비아저씨들의 동의 없이
휴게시간 변경공지부터 낸 후에
경비아저씨들 모두 불러모아서..
9시간 반으로 된 근로계약서에 서명하게 했습니다.
그것도 1월 말에 이루어진 일인데..
정작 아저씨들이 서명한 근로계약서 날짜는
1월1일부터로 되어 있다는군요.
이걸 8월까지 유효한 원래 근로계약서대로
만들어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 좀 어떻게 해결할 수 없겠습니까?

뭐 주민부담이 늘어나는 건 사실이겠지만,
그거야 휴게시간만 늘리면 된다고 하며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큰 소리치고
예산안 의결 받아낸 관리소장이 책임지겠지요.

을지로위원회 의원님들이
우리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오셔서
드러누우셔도 좋고..

고양시청이나 노동부 고양지청에서
우리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대해
행정지도를 할 수 있도록
로비를 해주셔도 좋습니다.

이거 어떻게 을지로로 해결 안되겠습니까?
저는 해볼만큼 해봤는데..
제 힘으로는 역부족입니다.

제가 도메인주소를 수집하는데요.
마침 수집해놓은 도메인주소 중에는
http://을지로.kr 과 http://을지로.net
도 있습니다.

만약 을지로위원회에서
이것만 해결해주신다면..
화끈하게 이 도메인주소를
을지로위원회에 헌정하도록 하겠습니다.

2015년 2월 3일 화요일

이토렌트 게시판 운영자.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동일성유지권이라는 게 있다, 공표권, 성명표시권과 함께 저작인격권을 구성하는 중요한 권리다. 동일성유지권이란 "저작자가 자신이 작성한 저작물이 어떠한 형태로 이용되더라도 처음에 작성한 대로 유지되도록 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즉, 저작자의 의사에 관계없이 이용자로부터 저작물의 내용을 변경 당하지 않을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이토렌트라는 게시판이 있다. 이토방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용자가 많아 글을 올리면 꽤 많은 사람들이 읽곤 했다. 그런데 오늘 누군가 내 글에 침입해서 마음대로 수정해놨다. 내 글의 문장 끝마다 마구 "뇨"와 "요"를 붙여놨다.

난 내 글에 대한 변경을 누구에게도 허락한 적도 없다. 게시판 관리자가 가진 변경권에 대한 고지도 받은 바 없다. 만약 관리자가 이랬다면, 이건 폭거다. 차라리 게재를 허가하지 않는게 낫다.

도대체 내 글을 제멋대로 수정한 사람은 누구이고, 어떤 권리로 내 글을 수정했는지, 어떤 절차가 이루어졌는지, 밝혀주길 바란다는 내용의 게시물을 올렸다.

누군가 나의 자작극이란다. 환장하겠다. 마침 이토렌트에서는 댓글이 스무개 이상 올라가면 자기 글이라도 수정이 되지 않는 시스템이 가동 중이었다. 수정을 시도한 후 수정이 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메시지를 캡춰해서 올렸다. 나의 자작극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러니까 곧 관련된 글들이 모두 삭제되었다. 제재한단다. 어그로 글을 쓴 죄란다. 2월6일까지 글쓰기 금지 댓글 금지.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아무리 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어도, 이러면 의미가 없다. 탈퇴하기 전, 내 글을 다 지우려고 했다. 그랬더니, 댓글이 많이 달려서 지울 수도 없단다. 제기랄. 퉤.

그동안 내 글에 댓글을 단 50여명에게 쪽지를 보냈다. 더 이상은 스팸으로 봐서 허용하지 않는단다.



저는 똘레랑입니다.
"똘.net"라는 그림을
프로필사진으로 사용하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토렌트! 이 운영자놈들!!
남의 글 지마음대로 고쳐놓고
그걸 밝히고 문제삼으니까
자작극으로 몹니다.
제가 이토 시스템상
그런 자작극이 불가능하다는 걸 밝히니까
그 글을 어그로 글로 몰아
관련글들을 모두 삭제하고 제재합니다.
2월6일까지 글쓰기 금지 댓글 금지라는 군요.
여기에 더 미련없습니다. 저는 갑니다.
혹시 감사하게도
제 글을 계속 보고 싶으신 분이 계시다면
http://tolerance.pe.k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토렌트 운영자! 이 놈들아!
내 글 다 지워놔라!!
퉤!!


누군가로부터 답장이 한통 왔다.


4년 전부터 그랬어요
어제 오늘일 아닙니다
쪽지도 감시하고 열어봅니다
더한일도 많이 하고있습니다
계급도 돈받고 올려줍니다 등등등
어쩌겠습니까
지가 사장이라 지 맘대로 하겠다는데
ㅠㅠ;


이토렌트와 이토방. 그 곳에서도 내가 믿는 원칙은 작동하지 않았다. 아! 나 올해 왜 이러냐? 아파트관리소장, 나한테 소송한다는 후배기자놈. 이제는 이토렌트까지.. 도처에 지뢰들이다.

"잘못을 추궁할 때 조심해야 할 게 있어."


"잘못을 추궁할 때 조심해야 할 게 있어. 사람을 미워하면 안돼. 잘못이 가려지니까. 
잘못을 보려면 인간을 치워버려. 그래야 추궁하고 솔직한 답을 얻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