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일 목요일

영화 국제시장을 둘러싼 "함의" 논란



이제서야 알았다. 허지웅의 발언에 대해 내가 가진 오해를 발견했다는 점을 고백한다.

"영화가 아니라 당신들 '정신승리'에 토가 나온다는 것." "인터뷰의 저 구절이 어떻게 '토나오는 영화'라는 말이 되죠? 읽을 줄 알면 앞뒤를 봐요. 당신같은 사람들의 정신승리가 토나온다는 거죠." 허지웅의 말이다.

티비조선을 위시한 총발기세력의 정신승리를 두고 한 말이겠다. 결국, 허지웅의 생각은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가 주인공의 입을 통해 말한 것을 직접 인용한 것으로 보여서 내가 오해하기 딱 좋았다. 내가 글을 쓸 때가 그 해명이 한참이던 이후였는데도..미처 간과하거나 제대로 해독하지 못한 내 오류도 있다.

돌아보니 영화 역시 그러하다 ."주인공 덕수는 캐릭터도 없고 심지어 이야기도 없다. 피난, 서독 베트남, 이산가족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도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허지웅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바보같았다. 보수언론들의 노림수에 말렸다. 이 글은 허지웅 발언에 대한 내 오해를 발견하기 전에 썼다는 점을 밝힌다.



언젠가 어느 게시판의 논객들과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그 중 대학에서 강의를 하신다는 한 분이 평소 나를 주목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말 끝에 나를 두고 혀를 내두르며 이렇게 말한다.  "뼛속까지 자유주의자"라나? 그렇다. 난 자유주의자다. "뼛속까지" 자유주의자다.

나는 도대체 왜 태어났는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한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그 존재여부를 믿기 힘든 창조주가 이 땅에 나를 보내신 이유도 행복하게 살라는 뜻이었을 게다. 나를 낳으신 부모님의 이유도 행복하게 살라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여기 삶의 이유가 나와는 다른 한 남자가 있다. 그는 가족을 위해 산다. 나와 다른 그의 인생관을 두고, 누가 감히 가타부타 할 수 있을까?





최근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에 대해 말들이 많다. 그래서 봤다. 나쁘지 않은 영화다. 적절한 거리두기에도 불구하고 나이 사십이 넘은 자유주의자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선입견으로 인한 무장이 해제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영화평론가인 허지웅은 이렇게 얘기했단다. "어른 세대가 공동의 반성이 없다.  영화 '명량' 수준까지만 해도 괜찮은데, 국제시장을 보면 아예 노골적이다. '이 고생을 우리 후손이 아니고 우리가 해서 다행이다'라는 식이다. 정말 토가 나온다. 정신 승리하는 사회"

그렇다. 주인공은 말한다.  "이 고생을 우리 아이들이 아니고 우리가 해서 다행"이란다. 허지웅말 대로다. 정신승리 맞다. 이른바 힐링의 수사학이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그만큼 힘들고 암울한 시대였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는가?  누군가에게는 마약 같을지언정 그런 정신승리라도 필요했다는 거다.

이런 슬픈 현실을 인정하는 것과 정신승리 대신에 다른 발전적 대안이 있었으면 하는 허지웅의 소망 사이에는 과연 어떤 모순이 있는가? 그게 왜 토 나올 일인가?

진중권에 따르면, '이해'에는 두 가지 용도가 있단다. "네가 왜 그렇게 바보짓을 했는지 그 심정 나도 이해해". 여기서 이해는 정서적 공감을 의미한다. 반면, "한국의 특정 세대들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살아온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이해는 현상의 원인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의미한다.

만약 이 영화가 정서적 공감을 추구하는 것 이상의 함의가 있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정서적 공감을 추구하는 것. 딱 거기까지다. 이런 인생을 산 사람들도 있다는 거다. 한국의 특정 세대에 대한 정서적 이해. 그 세대가 왜 그렇게 살았는지. 바보 같을지언정 그 심정 이해해달라는 거다. 그게 토 나올 일인가? 남의 인생을 두고 그렇게 말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가?

실망은 기대의 산물이다. 자신이 제멋대로 만들어놓은 기대의 잣대 속에 다른 사람을 가둬놓고, 그 잣대의 틀을 벗어난 순간  "실망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영화에 대한 기대와 실망 또한 마찬가지다.

허지웅은 해명했다.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이야기한 것”이라고. 이데올로기를 떠난 영화에서 이데올로기적 함의 씩이나 찾아내려고 용 썼다. 모든 영화에 대해 어른 세대의 공동의 반성을 요구하거나 자신이 바라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기대하는 것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어떻게든 정서적 공감과 논리적 설명을 뒤섞어 이 영화에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부여하려는 우익매체들의 용춤에 왜 놀아나려고 하는가?

물론 진중권의 말처럼 이 영화에 이른바 "우익의 성감대"가 자극될 만한 요소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재단할 순 없다. 영화를 제 멋대로 해석해서 정치적 함의를 부여하려는 우익의 태도를 바라보는 시각과 이 영화에 대한 평은 분리되어야 한다. 우익의 노림수에서 벗어나 좀더 먼발치에서 이 영화를 바라볼 순 없는가?

토가 나올 정도라기에, 나는 무비판적 가족주의에 찌든 한국판 아이히만과 악의 평범성을 상상했었다. 악의 평범성은 쥐뿔.  그냥, 이렇게 살아온 세대들을 심정적으로 이해해달라는 거다. 정서적 공감과 논리적 설명을 구분한다면, 이 영화와 이 영화 속의 세대를  "이해"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결국, 김용호까지 나섰다. 기레기라 이름붙여 마땅한 자다. 홍가혜에 대한 소설적 모함으로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그 자에게 어떤 다른 설명이 필요할까?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한 그 자의 글에서만큼은 딱히 꼬집을 말이 없다. 허지웅이 오바하다 결국 우익들이 놓은 덫에 걸려든 꼴이다.

나훈아가 최고냐? 남진이 최고냐? 주인공이 부인과 싸우는 영화 속 한 장면. 이 영화를 두고 진보논객들과 보수언론들의 싸우는 모양새가 떠올랐다. 영화 국제시장을 얘기하는 자리에서 도대체 왜 영화 변호인이 끌려나와야 하나?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밥벌이의 숭고함. 그것을 탓할 순 없다. 아이히만과 이근안처럼 넘지 말아야 할 선만 넘지 않는다면, 숭고한 목적을 내세워 수단을 정당화시키지만 않는다면, 가족을 향한 그 숭고한 마음을 누가 뭐라 탓할 수 있겠는가?

구토감을 유발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족에 대한 유별난 책임감과 희생정신을 가진 한 인간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다. 박정희와 같이 숭고한 목적을 내세워 수단을 정당화시킨 독재자를 미화하기 위해. 이땅의 수많은 아이히만을 미화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부패를 합리화하기 위해 이 영화를 이용하는 사람들..

부부싸움 하다가도 애국가가 들리니까 국민의례를 하는 장면. 이 장면을 언급하며 애국심을 강요하려는 독특한 사고구조의 독재자가 있다면 그 독재자의 문제다. 그게 왜 이 영화의 문제인가?

오히려 난 이 영화를 통해 진보의 감성과 애국주의에 매몰되지 않은 인류애를 본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폭력을 보고  분노하는 주인공을 보지 않았는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민간인들을 탈출시키는 모습에서, 인류애적 연대감을 느낄 수 없는가?

어버이연합의 폭력적 난동과 계급을 배반하는 어르신들의 어이없는 투표성향. 그 원인을 혹시 이 영화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이 영화에 대한 논란을 지켜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박정희를 독재자로 규정짓는 것과 미국과 월남전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는 것.  그것은 가족을 위해 박정희 개발독재시대를 묵묵히 견뎌온 세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아무 모순이 없다.

그 점을 그 세대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한, 박정희 시대와 자신의 인생을 동일시하며 어처구니없이 박정희의 잔당이 되어버린 그 분들의 비합리적인 감성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겠는가?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해온 세대들. 그들의 자부심과 추억이 방향을 잃은 채 박정희 향수로 이어지게 만든 연결고리.  독재자에 대한 향수에 힘입어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된 비극은 그 연결고리를  차단하지 못한 우리의 업보일지도 모른다.

그 세대 어른들이 단체로 손잡고 돌아가실 날만을 기다리는 예의 없고 비겁한 무기력함 외에 다른 방법은 과연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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