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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0일 화요일

희생학생 제적 처리에 대해 슬픈 마음으로 유족분들의 이해를 구합니다



음, 얼마 전에 세월호에서 희생된 학생에게 징병검사안내서가 발송되어서, 부모님의 가슴이 아프다는 말씀을 전해듣고 같이 분노했더랬습니다. 병무청이 미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왜 그 학생에게 가슴아픈 징병검사안내가 발솟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차마 마음으로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한 부모님께서 사망신고를 안하셨던 것 같습니다.

희생 학생이 무연고자도 아니니, 관에서 직권으로 사망 신고를 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직권으로 사망신고를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부모님들의 허락 없이 사망처리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서류상 사망처리가 되지 않았으니, 병무청으로서는 징병검사안내서를 발송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병무청이 발송하기 전에 대상자의 생존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사망신고가 되지 않은 탓에 가족관계등록부가 폐쇄되지 않았으니 생존자로 보았던 것입니다. 혹시 세월호 희생자들을 따로 배려하고 싶어도 규정이 없으니 병무청 담당자로서는 도리가 없었을지도 모르고요.

퇴학, 출교, 자퇴, 전학, 졸업, 제적 조금씩 개념이 다릅니다. 흔히 제적당한다는 표현 때문에 유족 분들이 거부감이 드실수도 있지만, 제적은 그나마 어떤 평가나 가치도 포함되지 않은 중립적 표현입니다. 학적과 이별하는 것이죠.

원래 사망자는 그렇게 학적과 이별하는것이 원칙인 듯 합니다. 학교측에서는 유족분들에게 명예졸업을 제안드렸지만, 유족분들이 미수습자 생각에 받아들이시지 못한 모양입니다.

결국 생존학생들을 졸업시키자니, 학교 측에선 사망학생들을 학적에서 이탈시킬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인데, 유족분들의 참담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너그럽고 사려깊은 이해를 구할수 밖에 없는 학교측의 입장도 참 딱한 노릇입니다.

아마, 사망학생은 학적부와 이별시켜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서 담당자가 어쩔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굳이 학적부와 이별시켜야하는 상황에서 이해를 구한답시고 다시 언급하는게 유족분들 맘을 더 상하게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고요,

만약 명예졸업을 하더라도, 학적부와는 이별할수 밖에 없었을것입니다. 명예졸업과 제적은 모순없이 양립이 가능한 일이니까요. 다만 시기가 문제될텐데. 생존학생의 졸업을 위해 어쩔수 없는 일이었으니, 학교측이 지금 그 사실을 뒤늦게 아시고 노여워하시는 유족분들의 이해를 구할수 밖에 없는것이죠.

보내기 힘든 마음으로 사망 신고를 안하신 마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만약 사망 신고를 해태했다고 해서 법대로 유족들에게 과태료를 부과한다면, 저라도 화가 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망신고를 하지 않으면, 죽은 사람에게 징병검사안내서를 발송해서 유족의 화를 돋우는게 서류에 얽매인 이 사회의 현실입니다.

제적 역시 서류처리일 뿐이죠. 서류상 문제에 일일이 너무 마음을 매이기보다는, 우리가 그 학생들을 여전히 단원고학생으로 인정하고, 그렇게 알고 있다는게 중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 두 사건을 겪고, 감히 해봤습니다.

억울하게 희생된 아이와 관련해서 가슴 아픈 일이 생길 때마다 화를 내시기보다는, 그 화의 에너지를 세월호 진상 규명에 더 쏟으시는 것. 그것이 희생자들이 원하는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철없이 해봅니다. 죄송합니다.

2016년 5월 4일 수요일

"굶주린 자가 음식을 훔친 건 죄 아니라는" 이태리 판결.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한가?


법이 금지하는 행위를 자행해서, 그 행위가 범죄의 요건을 구성하더라도, 처벌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위법성의 조각”이라고 한다. 우리 형법은 위법성이 조각되는 사유로 크게 다섯가지를 정하고 있다. 정당행위(正當行爲), 정당방위(正當防衛), 긴급피난(緊急避難), 자구행위(自救行爲), 피해자의 승낙(被害者의 承諾). 이 다섯가지가 그것이다.

오늘은 그 중에서 형법 제22조가 정하고 있는, 긴급피난에 대해 알아봐야겠다. 조문부터 살펴보자.

형법 제22조 (긴급피난)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위난을 피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

긴급상태에서 자기나 타인의 법익을 보호하기 위한 긴급행위라는 점에서, 긴급피난은 정당방위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정당방위는 언제나 부당한 공격을 전제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공격을 해온 자에 대해서만 방위행위가 가능하다. 긴급피난은 다르다. 부당한 침해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부당하지 않은 침해에 대해서도 가능하다. 즉, 위난을 야기한 자 이외의 자에 대해서도 피난행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피난행위가 상당한 이유를 가지려면 그 행위가 보충성과 균형성, 그리고 피난수단의 적정성을 충족해야 한다.

보충성.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그 위난을 피할 방법이 없어야 한다는 얘기다. 균형성. 덜 중요한 법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더 중요한 법익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거다. 적정성. 그 방법이 위난을 피하는데 효과적이어야 한다.

도대체 어떤 경우를 말하는 걸까? 버스 운전자가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고장나자 승객의 안전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정차되어 있는 타인의 차를 들이받고 멈춘 경우, 손괴죄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길을 지나다 맹견이 덤벼들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모르는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간 경우, 주거침입죄를 묻지 않겠다는 거다.

지난 2일. 긴급피난의 사례로 역사에 남을만한 판례가 나왔다. 이탈리아에서다.

이탈리아 북부 제노바에 살던 우크라이나 국적의 남성, 로만 오스트리아코프는 약 5,300원 어치의 치즈와 소시지를 훔치다 현행범으로 체포되었고, 6개월 징역과 100유로의 벌금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잡힌 순간에 가게를 떠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리고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긴급피난을 인정한 것이다.

이탈리아 대법원은 “피고가 가게에서 상품을 점유한 상황과 조건을 살펴볼 때 그가 급박하고 필수적인 영양상의 욕구에 의해서 이를 취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긴급사태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이탈리아 언론 스탐파 신문의 사설은 수석 판사의 발언을 인용하며 '생존의 욕구는 소유에 우선한다'고 역설했다.

이렇게 “굶주린 자가 음식을 훔친 건 죄 아니”라는 판결은 이탈리아에서 이뤄졌다. 2016년 5월 2일의 일이다. 자본주의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다.

오늘 아침 켈시라는 미국 꼴통 얘기를 읽고, 생각이 많아졌다.


미국 식약청에 켈시라는 박사급 꼴통이 하나 있었단다. 이 사람이 신입사원으로 식약청에 들어가서 처음 맡은 업무는 신약신청서평가업무. 그의 책상위에 놓인 첫 신청서는 독일의 제약사 그루넨탈이 개발한 진정제 탈리도마이드였다.

이미 3년전부터 유럽에서 널리 팔리고 있던 약이었다. 심지어, 임신부의 입덧 방지제로도 처방될만큼 안전하다고 알려져있었다. 그런만큼 식약청 허가는 미국시판을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신입꼴통 켈시는 쉽게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단다. 약품의 독성과 효과 등에 대한 추가 정보를 요구했단다. 회사 측이 제출한 자료가 부족하는 이유였다. 추가자료요구는 한번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 시판사인 머렐은 똥줄이 탔다. 허가는 떼어놓은 당상으로 여기고 이미 창고에 탈리도마이드를 가득 비축해뒀기 때문이다. 전방위 로비를 펼치며 신입꼴통 켈시를 압박했다. 식약청 고위층에게 켈시가  "까다롭고, 고집 많고, 비합리적인 관료"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꼴통 켈시가 이러한 압박을 견디는 어느날이었다. 영국의학저널에 탈리도마이드가 팔, 다리 마비를 일으킬 수 있다는 글이 실렸다. 6개월 후 유럽에서 탈리도마이드가 기형아 출산을 유발한다는 충격적인 연구 결과가 나왔다.

약품은 곧바로 전량 회수됐다. 그러나 그때까지 임신부의 탈리도마이드 복용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팔, 다리가 없거나 눈과 귀가 변형된 채로 태어난 기형아는 1만2천 명에 달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탈리도마이드 베이비'는 17명에 그쳤다. 모두 머렐 사가 허가 이전에 1천 명의 미국 의사들한테 연구 목적으로 나눠준 샘플로 인한 피해 뿐이었다. 꼴통 켈시가 쉽게 시판 허가를 내주지 않은 덕이었다.

탈리도마이드 사건이 전 세계를 뒤흔든 후 곧바로 워싱턴포스트는 꼴통 켈시를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켈시는 소신을 지킨 강직한 공무원의 표상으로 부상했다. 곧 미국 전역의 스타가 되었다. 대통령은 "신약의 안전성에 대한 켈시 박사의 탁.월.한. 판.단.력.으로 미국내 기형아 탄생이라는 큰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며 공무원에게 주는 최고 상을 수여했다. 얼마전 켈시가 101세의 나이로 숨지자, 미국 언론은 켈시를 ‘20세기 미국 여성 영웅’로 추켜세우며 대대적으로 애도했다.

이 얘기를 읽고 난 의문이 들었다. 켈시는 영웅이 되었다. 수많은 목숨을 구했다는 결과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과연 백악관의 말처럼 켈시의 탁월한 판단력 때문이었을까? 만약 켈시가 꼴통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까다롭지 않고 유연하며, 합리적인 신입사원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니다. 여전히 까다롭다고 하더라도, 만약 제약회사의 전방위로비를 버텨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수많은 아기들의 희생 후에, 혹시 만고의 역적이 되지는 않았을까?

도대체 대중들이란? 그들에게 중간은 없다. 영웅이 아니면 역적이다. 결과만 보일 뿐, 과정은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켈시의 업적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가 칭송을 받아야 한다면, 수많은 목숨을 구한 결과 때문이 아니다. 로비에 맞서 힘겹게 원칙을 지켜냈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원칙을 지킨다는 게 이처럼 개인적으로는 괴롭고, 험난하며 고통스러울 수 있다. 더구나 원칙을 지킨다고 해서 켈시처럼 로또를 맞으란 법도 없다. 오히려 꼴통으로 찍히고, "까다롭고, 고집 많고, 비합리적인 관료"로 술자리 안줏감으로 씹히며 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눈물겨운 수많은 희생이 있은 후에, 책임자를 찾아 처벌하는 거?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희생의 책임이 아니라, 꼴통으로 찍히기 싫어서 원칙을 포기한 책임이어야 한다.
 
평소에는 원칙을 지킨다고 꼴통 취급하다가, 만에 하나 희생이 생기면 역적 취급하는 사회. 이런 비합리적인 사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선택은 각자의 몫이고, 그 선택에 따른 책임도 각자의 몫이다. 결국 폭탄을 피하고, 켈시가 맞은 것 같은 행운을 기원하는 수밖에 과연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 해법이 뭐냐고?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