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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8일 수요일

우리 아파트 경비원들. 노예와 무엇이 다른가?


우리 아파트에서 경비아저씨들에게 2014년 최저임금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있던 사실을 이미 말한 적 있다.  2014년 초. 경비원들에 대해 최저임금90% 적용이 되면서 입대의에서 지시한 대로 임금을 맞추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휴게시간 변경은 아저씨들에게 제대로 고지되지도 않았다. 심지어 근로계약서상에서도 휴게시간이 변경되지 않았다. 변경된 것은 근로계약서상의 임금 뿐이었다. 최저임금법 위반이다.

문제는 그것 뿐이 아니었다. 우리 아파트는 근로자 10인 이상이 근무하는 사업장이다. 근로조건 변경시에는 취업규칙을 변경한 후에 노동부 장관에게 그 내용을 신고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전에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2011년 이후 취업규칙은 한번도 변경된 바가 없었다.

감시단속적근로자에게는 휴게시간과 휴일에 대한 특례가 주어진다. 이것은 사용자에게 특혜다. 그래서 그 특례를 적용받기 위해서는 역시 노동부로부터 감단승인을 받아야만 한다. 노동부가 감단승인신청을 받으면, 근로조건, 업무실태, 사업장실태 등을 조사한다. 그리고 그 업무가 실질적으로 감시단속직이라 할 수 있는지 판단하고 그 승인여부를 결정한다.

승인 이후에 근로조건의 변경이 이루어지면, 애초의 승인은 당연히 그 효력을 잃는다. 다시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 동안 수차례 근로조건의 변경이 있었다. 그런데 불구하고 한 번도 감단신청 갱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 아파트의 감단승인의 날짜는 2002년에 멈춰있었다.



올해부터 경비원에 대한 최저임금법 100% 적용이 실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리소장은 입대의에 총액기준의 예산안 승인안을 올려놨다. 경비원 임금인상안에 대해 7%냐 9%냐? 그것을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입대의에서 통과된 7% 임금인상안.

작년 최저임금법에도 못미치게 지급된 금액. 그것을 기준으로 7% 인상한다는 것이었다. 관리사무소가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근로조건의 파행적인 변경이 불가피했다. 근로자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결정만 하라고 하는 소장이 의아했다. 도대체 뭘 믿고 저런단 말인가? 게다가 휴게시간이 7시간으로 되어 있는 기존 근로계약서는 2015년 8월까지 유효했다. 입대의는 소장의 말만 믿고, 일사천리로 경비원임금 7% 인상을 결정했다.

난 경비아저씨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어떤 서류에도 싸인하지 말라는 것. 소장이 서류에 싸인을 요청하면 바로 응하지 말고 "생각해본 후에 싸인하겠다"는 취지로 미루라고 했다. 그리고 경비아저씨들도 수긍하는 듯 했다. 경비 아저씨들이 아무 서류에도 싸인 하지 않는다면, 입대의 결의는 소용 없었다. 입대의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의결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년 근로계약서상의 휴게시간은 올해 8월까지 유효했다.

그런데, 그제 26일. 퇴근 후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는 경비원 휴게시간 변경이 고지되었다. 휴게시간을 무려 아홉 시간 반으로 변경한 것이다. 점심시간이 무려 두 시간, 저녁시간이 무려 한 시간 반이었다. 야간 취침시간이 여섯 시간이었다.

발칙한 점은 "단지 사정을 감안하여 휴게시간에 경비실에서 쉬게 하겠다"고 공지한 점이다. 근로기준법 제54조 휴게시간 자유이용의 원칙 위반이다. 경비원은 왜 감단직 적용을 받는가? 주로 경비실에서 자리만 지키는 근무 상황을 감안하여 결정된 특례다. 그런데 휴게시간에 경비실에서 자리만 지키라고?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택배업무, 분리수거, 조경, 청소, 주차관리 등 업무가 그대로라는 점을 감안하면 근무시간의 근로 강도는 더 늘어난 셈. 당연히 감단직 특례 취소 사유다.

더 골 때리는 건, 경비아저씨들이 이 공고를 본 후 한 순간에 우르르 무너졌다는 것이다. 경비아저씨들은 공고를 보고 모든 결정이 끝난 것으로 보고 체념한 듯 하다. 소장은 공고부터 내고 근로계약서에 싸인을 받았단다. 그리고 경비아저씨들은 순순히 싸인을 하셨단다.

노예란 무엇인가? 권리가 없고 의무만 있는 사람들을 노예라 한다. 우리 아파트 경비아저씨들은 노예다. 그들은 싸인 조차 거부할 힘이 없었다. 아니다. 거부할 의지도 없었다. 자신이 노예인지도 모르는 노예다. 이들이 가진 권리는 오로지 그만두고 실업자가 될지 말지를 선택할 권리 밖에 없다. 실업자가 될 권리는 있으니 아주 큰 권리라고 여기는 자 여기 또 있는가?

이 분들을 노예라고 하지 않으려면 이들이 해고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휴게시간과 임금에 대해 관리사무소나 입대의와 협상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이 분들이 입대의의 결정을 기다리기 전에 이 분들의 의사라도 알아봐야 하는게 마땅했다.

이 노예들이 확대된 휴게시간에 따라 휴게시간 자유의 원칙을 주장하고 자유롭게 경비실을 떠날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이 혹시 있는가? 이들은 휴게시간에도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소장은 그것이 자발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별수 있겠는가? 자발적으로 일하지 않으면 잘린다고 생각할 텐데.

더 끔찍한 것은 이 노예들이 아파트 주민들의 형편을 걱정해준다는 거다. 배려는 강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약자들이 배려를 한다. 이들은 자신의 노예상태를 직시하지 못한다. 비겁함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바꾼다. 힐링의 수사학이다.

여기 노예들이 있다. 해방시켜주어야 했다. 해방시켜주고 싶었다. 해방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노예들은 해방되길 거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부한 게 아니다. 자신들이 해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못 믿는 거 같다. 이 노예들은 해방을 선언했다가 죽음을 당한 다른 노예들을 그동안 너무 많이 봐왔다.

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법이 노예의 죽음, 즉 해고를 막아주지 못했다는 것을 노예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겐 없다. 권리 위에서 잠자는 노예를 도울 방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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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7일 화요일

무려 20년 전 얘기다. 난 그 때 캐나다에서 영어 공부 중이었다.


무려 20년 전 얘기다. 난 그 때 캐나다에서 영어 공부 중이었다. 같은 반에는 일본인 학생들과 한국인 학생들이 비슷한 비중으로 대다수를 차지 했고, 그외에 홍콩이나 중국 등 여기저기서 온 학생들이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 반에는 아버지 뻘의 지긋한 나이의 학생도 한 분 계셨는데, 한국학생들은 그 분을 "아버님"이라고 불렀다.

하루는 일본인 학생 두어명과 한국인 학생 서너명이 카페테리아에 앉아서 뭔가를 먹으면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아버님"께서 다가오셨다. 한국 학생들은 일제히 벌떡 일어나서 "아버님"께 인사했다. 반갑게 인사를 드리고 다시 앉았는데, 그 중 한 형님이 앉으면서 나지막한 목소리의 한마디 한다. 한국말이다.  "이 놈의 새끼들은 어른이 와도 오는지 마는지.. "

그제서야, 옆에 앉아있던 일본인 급우들이 그대로 앉아있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문화적 차이였다. 마침 문화의 다양성 시간에 발제를 앞두고 있던 나는 이 문제를 발제하기로 했다.

내가 준비한 것은 판토마임이었다. 나와 나를 도와주는 친구가 보여주는 판토마임을 보고 과연 어떤 상황인지 맞추어보라는 것이었다. 단 한국인 학생들은 절대 답변하지 말 것을 사전에 주문했다.

강단에는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의자가 두 개 놓여있다. 테이블 위에는 생수 한병과 종이컵 두 개를 준비해두었다. 한 의자에 내가 앉아 있다가, 도와주는 친구가 등장하자 난 벌떡 일어났다. 도와주는 친구가 앉은 후에서야, 난 자리에 앉았다. 그 친구 앞에 놓인 종이컵에 두 손으로 생수를 따라주었다. 그 후에 그 친구는 생수병을 건내받아 나에게 생수를 따라준다. 내 종이컵의 높이는 친구의 것보다 낮게 한 채, 종이컵을 마주친다. 나는 종이컵을 오른 쪽으로 돌려서 생수를 마시고, 그 친구는 편안하게 생수를 마신다. 그러다가 친구가 자기 종이컵을 비우고, 그 종이컵을 나에게 건낸다. 거기에 친구가 생수를 따라주면, 난 그걸 또 고개를 돌려 마신다. 판토마임은 여기까지였다.

학생들에게 물었다. "우리 두 사람이 연출한 상황은 무슨 상황일까요?"  아무도 정답을 맞추지 못했는데, 어떤 기상천외한 답들이 나왔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나는 정답을 알려주고, 우리가 했던 판토마임 재연하며 하나하나 그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주도"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설명을 다 들은 일본 여학생 가오리가 질문했다.  "요즘도 보통 사람들이 보통 때에 그렇게 합니까?" 가오리의 질문은 나에게 충격적이었다. 내가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문화, 그 속에서 파묻혀 내가 숨쉬던 문화를 한 순간에 나로 하여금 낯설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이 나는 이렇게 들렸다. "너네들은 아직도 그러고 사냐?"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우리나라 문화가 얼마나 독특한 문화인지 그 안에서 파묻혀 있던 내가 그 때처럼 가슴으로 느낀 적이 없었다.

그때 내가 겪었던 그 문화적 충격이 Defamilarization. 즉 낯설게 하기라고 불리우는 철학적 사유의 결과라는 것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마이클 샌델은 말했다. "철학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과 직면하도록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의 관념을 뒤흔든다. 이미 너무 친숙해져서 의문을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당연시하고 잘 안다고 생각한 것들을 낯설고 이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철학은 익숙한 것에서 우리를 분리한다. 그 방법은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관점을 환기함으로써 우리를 분리한다. 여기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일단 익숙한 것이 낯선 것으로 변하고 나면 그것은 두번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

마이클 샌댈은 "자기 인식이란 순수함을 잃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샌댈의 말처럼 자기 인식은 우리에게 불안을 느끼게 하지만, 인류는 그런 생각들을 경험하면서 탐구를 지속했왔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어렵지만 재미있다. 그 이야기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Defamilarization. 즉 낯설게 하기라는 표현은 센댈을 통해 몇년 전 처음 알았다. 그러나  난 캐나다 유학 이후 그런 방식의 철학적 사유를 거듭했다. 그 동안 나의 철학적 사유는 나를 어디로 데려갔을까? 교회가 낮설어졌다. 교회와 이별했다. 지금까지 30년동안 알고 지내던 상당부분의 인적네트워크를 포기해야 하는 거사였다. 결혼이 낯설어졌다. 결국 약혼녀 앞에서 이별을 청하기 위해 무릎꿇고 울며 빌었다. 상견례를 마치고 식장을 알아보던 중이었다.

어떤 응석받이는 소시오패스라고 생각하고 어떤 주정뱅이는 사이코패스라고 주장하는 나. 이것은 낯설게 하기라는 철학적 사유가 데려온 바로 지금의 주소다. 이런 내가 싫으면 어쩔 건데? 누가 좋아해달라고 했나?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같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그거 어른 되면서 포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아직도 어리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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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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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5일 일요일

특종 그리고 고소. 그 끔찍한 기억의 편린



특종 또는 특종기사란 무엇인가? 네이버 사전에는 이렇게 나와있다. "어떤 특정한 신문사나 잡지사에서만 얻은 중요한 기사." 다시 묻는다. 얼마나 중요해야 특종이라고 할 수 있나? 그 판단은 누가 하나? 여기에 대해서 언론계에서는 나름의 기준이 있다. 나 또한 그러하다.

한 언론사가 제일 처음 단독으로 보도를 한 이후  다른 많은 언론사들이 뒤이어 관련된 기사들을 내놓을 때, 그 첫 보도를 특종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내 기준이다.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볼 때, 나에게도 특종이 없진 않았다. 15년전쯤 썼던 대학생 계약동거모임 인터넷 카페에 대한 기사는 그 중 하나다.

먼저 그 카페의 회원 자격이 재미있었다. 성별을 구분하여 이중적이었기 때문이다. 남자의 경우 까다로웠다. 서울대, 고대, 연대 남학생이어야 했다. 학부가 해당대학이 아니면서, 대학원만 스카이인 남자 또는 고대 서창캠퍼스 연대 원주캠퍼스 재학생 또한 자격이 없었다. 반면, 여자는 심플했다. "용모가 단정한자"

자신을 마담최라고 밝힌 이 모임 개설자는 "본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하여 모든 결정을 하며, 본인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존중합니다. 상대방의 의사 등을 무시하는 강압 등이 있음이 확인될 시는 형사 및 민사상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라며, 이런 방식의 계약 동거에 대한 정당성을 시사했다.

자신을 서울대생이라고 밝힌 한 남자는, 40명의 서울대생을 가입시키겠다며 이런 모임에 대한 서울대생의 반응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 모임의 게시판에는 서울대 학생증을 스캐닝해서 보내달라는 여성들의 요구를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었다.

15년 전 당시만하더라도 계약 동거는 새삼스러울 일이 없었다. 내가 느낀 문제는, 이런 계약 동거 조차, 학벌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 이 사회가 얼마나 학벌 카스트를 정점으로 계급화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반영하는 일이다. 나는 이 카페를 우리 비뚤어진 사회상의 축소판으로 봤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모임을 통해, 만나는 남녀들의 동상이몽이었다. 세칭 일류대를 다니는 남자의 경우, 자신이 싫증날 때 부담 없이 떼낼 수 있는 섹스 파트너를 구하려고 하는데 반해, 여성들은 남자 한 명 잘 낚아 신분 상승을 꿈꾸고 있는 속내가 뻔히 들여다 보였다.

기발한 아이템은 아니었다. 취재가 집요했다거나 기사의 품질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우연찮게 내 눈에 들어온 인터넷 카페였다. 문제의식을 느꼈지만, 가볍게 생각했다. 단신 기사를 하나 냈다. 소가 뒷걸음질치다 쥐를 잡은 격이랄까? 기자의 손을 떠난 기사의 반향은 기자의 눈에도 놀라웠다.

이후, 당시 거의 모든 중앙일간지가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내 것을 우라까이한 것도 있었고, 자체 취재 후에 낸 기사도 있었다. 특종이었다. 며칠 후, 마담최는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마담최는 해당 학교 중에 사립학교에 편입한 학생으로 알려졌다. 해당 카페는 폐쇄되었고, 해당 카페에 대한 안티카페가 개설되었다.

15년 전 케케묵은 이야기를 다시 꺼낸 이유는 뭔가? "내가 왕년에는" 식의 특종 자랑을 하기 위함은 아니다. 이 사건으로 인한 경험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해당 카페에 대한 안티카페가 개설된 것을 보고 나도 가입했다. 그런데 가입하고 보니, 그 카페 안에서는 논의가 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문제의 동거모임 카페보다 그것을 소개하는 언론의 문제라는 식이었다. 안티카페 운영자는 “마담최의 일탈은 별 문제가 아닌데, 언론이 소개하고 부추기는 바람에 그런 식의 학벌사회를 더 조장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난 커밍아웃했다. 내가 그 기사 제1보를 쓴 장본인이고, 그때 관련해서 쏟아지고 있는 모든 기사의 출발점이 나라는 것을 밝혔다. 논의는 더 뜨거워졌다. 자신을 신문방송학과에 재학중인 학생이라고 소개한 한 회원이  내 기사를 자신이 참여하는 수업의 주제로 발제를 했는데, 수업참가자들 모두, 그 기사나 언론의 태도에 어떤 문제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오기도 했다.

급기야, 카페 운영자는 내가 마담최의 꼬봉이라고 주장한 뒤 강퇴시켰다. 황당했다. 그 후 나는 그 카페 운영자를 명예훼손혐의로 처벌해달라는 취지로 경찰에 고소했다.

그런데 그 사건은 결국 공소권없음으로 종결되었다. 피고소인이 숨진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의 한 명문사립대 대학원에서 건축에 관련된 공부를 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 카페 운영자. 노량진의 한 고시원 자기 방에서 이상한 냄새를 호소하던 다른 원생에 의해 숨진채 발견되었다. 정확한 사인은 잘 기억 나지 않는다. 아마 뇌출혈인가 그랬다.

나를 모함한 사람. 그래서 내가 고소한 그 사람. 그 사람의 죽음. 멍했다. 그걸 접한 나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기분이 그렇게 더러울 수 없었다. 더러워진 자신의 기분을 느낀 내 스스로가 이상할 정도였다. ‘아니 내가 왜 이렇게 기분이 나빠지지?’ 한 일주일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마음에 없는 욕까지 중얼대고 있었다.  “아니 씨팔놈. 죽으려면, 벌이나 받고 죽든지”

최근 나를 모함하던 한 인터넷 신문 기자가 적반하장격으로 나를 고소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인터넷신문기자. 일베 악플러에 또박또박 대응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바로 그 기자. 그리 강력한 멘탈의 소유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고소장의 논리 속에서도 억지와 모함, 그리고 아전인수식의 상황해석이 엿보인다.

15년전 사건이 떠오른다. 그 사건의 충격이후 웬만하면 명예훼손 고소를 하지 않으려던 나다.  그런데 내가 고소를 하지 않으면 내가 꼼짝없이 명예훼손으로 엮일지도 모른다. 검찰과 사법체계에 대한 예측가능성과 신뢰가 어느 정도만 되도 단순히 무죄를 주장하고 넋 놓을 수 있겠다. 그런데 매우 슬프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진흙탕 속으로 끌려 당겨지는 느낌이다. 심란하다.

2015년 1월 24일 토요일

명예훼손으로 제소를 당함. 에효. 답변서 문장 정리중.



신청인이 귀 위원회에 제출한 분쟁조정신청서와 이미 인터넷에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마치 제가 돌연 반말을 하면서 “당신은 기자로서 부족하다”, “내 생각에 동의하느냐” “ 왜 동의하지 않느냐 기자로서 자질이 떨어진다”고 단정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말을 듣고 신청인이 스스로 그런 느낌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별론으로 하고,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전혀 없습니다. 신청인과 제가 주고 받은 말을 복사해서 저장해둔 것이 있는데, 확인해보실 수 있는 일입니다.

같은 자료를 보시면 아실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그 당시 신청인이 작성한 인터넷신문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기사 안에는 출처를 저로 밝힌 채, 제 글을 인용한 부분도 있어서, 그것은 결코 이상하다거나 사회상규에 반하는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신청인은 자신의 기사에 대한 저의 이야기를 자신에 대한 것으로 오해했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 “낙인 찍으면 저도 할 말 있고 소송하면 돼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신청인은 “일단 닥치면 생각해요 ㅜㅜ미리 생각부터 생각하는 건 복잡해요” 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인용을 허락하고, 자료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사 안에서 출처로 제시되어 인용당한 제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무책임해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제가 기사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어찌하다보니, 이야기의 초점이 기사가 아니라, 기자의 책임감 내지는 자질 문제 또는 기자론까지 이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자의 자질을 문제 삼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글의 인용을 허락하고, 자료를 제공한 사람이 그 기사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책임감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사에 대해 일말의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기자에게, 자신의 기사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라는 취지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기사에 인용을 허락하고 글을 제공한 사람으로서 부당한 강요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두고 “당신은 기자로서 부족하다”, “내 생각에 동의하느냐” “ 왜 동의하지 않느냐 기자로서 자질이 떨어진다”라는 뜻으로 단정한 채 강요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상처 입었다면, 그것은 신청인이 가지는 일종의 열등감에 기인한 착각에 불과하다 하겠습니다. 실제로, 신청인과의 대화를 살펴보면, 인용을 허락하고 자료를 제공한 저의 책임감을 신청인은 여러 차례 “잘난 척”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한편, 해당 기사는 제가 자료를 제공한지 10~20분도 되지 않아 발표되었는데, 비문 투성이인 데다가, 문장이 길고 연결도 매끄럽지 않아서 도저히 기자가 쓴 기사라고 보기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문장을 다듬어서 보내주었는데, 원래의 기사와 비교해본다면, 앞으로 기사문장을 쓸 때 신청인이 좀 더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청인은 “훨씬 낫네요. 똘님이 쓰신 글이”라고 말한 후에, 무단으로 자신의 기사에 제 첨삭지도문장을 통째로 사용하였습니다. 설마 기자가 남의 문장을 허락도 없이 통째로 그대로 자기 기사에 사용할 것이라는 것은, 제가 알고 있는 기자들의 직업적 자존심에 비추어 볼 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신청인은 이를 두고 제가 "동의 없이 편집해 문장을 다듬어서 " 보내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호의에 도대체 어떤 동의가 필요한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문장을 다듬어서 보내주었다고 해서, 신청인처럼 무단으로 그것을 자신의 기사에 사용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신청인은 그날 저와의 대화를 단절하고자 페이스북 친구를 차단하였습니다. 그것은 신청인의 권리에 속하는 영역이라고 하더라도, 기사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첨삭지도문이 무단으로 사용한 것에 대해 애써 침묵하면서까지 기사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던 호의관계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행위는 적반하장격의 몽니임에 다름 아닙니다. 이에 결국 저는 신청인이 제 첨삭지도문을 무단으로 사용한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게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글과 제가 신청인의 명예훼손에 방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쓴 글들을 두고 신청인은 자신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빌미로 포털사이트에 삭제청구를 하거나, 형사 고소를 하는 한편, 거액의 배상을 요구하며 귀 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http://mad.pe.kr

이계덕 고소건 대응페이지

2015년 1월 23일 금요일

더 큰 표현의 자유로 보복합시다.



신영복 선생은 동양사상의 핵심 개념으로 인(仁)을 꼽고, “인(仁)은 기본적으로 인(人)+인(人), 즉 이인(二人)의 의미”이며 “인간관계” 자체 또는 “관계들의 총화”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촉망받는 인권변호사인 젊은 법률가 정정훈은  이러한 신영복 선생의 설명이 인권의 개념에 대해서도 훌륭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합니다. 정정훈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인권은 항상 ‘관계의 문제’이고, 중첩적인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특히 ‘권력관계’를 포착해 드러내는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인권은 권력관계 속에 놓여 있는 약자들의 자리를 파악하는 언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가끔 인권문제가 가해자 인권과 피해자 인권이 대립하는 양상으로 진행되곤 합니다. 이에 대해 앞의 법률가 정정훈은 "관계가 일면적이지 않고 총체적이며,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해간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여성들만을 골라 살해한 연쇄살인범은 연쇄살인이라는 범죄의 맥락(가해자-피해자 관계)에서는 상대적으로 강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체포되어 형사절차로 들어온 이상, 그는 형벌권을 행사하는 국가에 대하여, 그리고 선정적 소재를 사냥하는 언론에 대하여 스스로를 보호하기 어려운 관계의 약자라는 것입니다.

정정훈은 가해자 인권’이 아니라, ‘피의자 인권’을 말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정정훈과 견해를 같이 합니다.

오늘 아침, 표현의 자유원칙이 겨냥하는 곳은 권력이라는 취지의 고명섭 논설의 한겨레 칼럼은 인권은 권력관계 속에 놓여있는 약자들의 자리를 파악하는 언어라는 정정훈의 말과 같은 얘기입니다. 그런데, 고명섭 논설처럼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을 단지, 이슬람세계와 서구 세계의 구도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위험해보입니다. 지금까지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이 단지 이슬람세계만을 겨냥해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와 교황, 당대의 정치권력들 역시 모두 샤를리 에브도에 의해 풍자되었고 조롱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종교권력과 힘 없는 만평지의 구도로 보는 것이 마땅한 이유입니다.

철학자 이상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버릇이 없으면, 결코 권력적일 수 없다.  권력 있는 사람들의 "미움 대상"이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말이 권력을 향해 촌철살인이 되어도, 결코 권력적일 수는 없다. " 권력을 향해 있었지만, 결코 권력적이지 않았던 "샤를리 에브도". 지배적 가치에 맞서 다른 견해를 표현했을 지언정, 강자의 자리에서 약자를 내려다보며 비아냥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사 권력에 맞서고 버릇없던 샤를리 에브도에게 성숙하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잠시 눈을 감는 것이 희생자에 대한 도리이고, 테러를 바라보는 성숙한 자세입니다. 민간인을 상대로한 테러를 통해서는 어떤 메시지 전달도 성공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 인류사회는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 대신 수많은 테러 앞에 직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차별을 주장하는 우익 테러에 맞서서, 우리는 더 큰 똘레랑스로 보복해야 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위협한 테러에 맞서 우리는 더 큰 표현의 자유로 보복합시다. Je suis Charlie. 나 역시 샤를리입니다.

2015년 1월 22일 목요일

기자의 칼은 펜이어야 한다.



1


계덕이는 나랑 
온라인 상에서 토론하거나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대요.

그런데 내가 계덕이에게
온라인 상에서 토론해달라거나
대화해달라고 강요한 적이 있었나요?

그런데 지금 이계덕은 마치 내가
무엇인가를 강요했던 것처럼 주장하고 있어요.

계덕이는 내가 자신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자기도 나를 언급하지 않는 걸 원한대요.

내가 계덕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을
계덕이가 강요할 순 없는 것 같잖아요?
계덕이가 나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해결하면 되는 거 아녜요?

그밖에도 한번 다들 살펴봐요
페북에서 주고 받은 대화 알죠?? 그걸 보면서 말예요.
내가 과연 계덕이한테 뭔가 강요한 게 있는지 말이죠?

2.

계덕이는 비판이 과도한 범위를 넘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데까지 이르면
그게 비방이 된대요.

비방과 비판을 구별하는
계덕이의 자의적인 기준은 알겠는데요,

계덕이식의 표현 대로 해볼까요?
그 기준에 대한 이계덕의 강요를
왜 우리가 수용해야 되는 거죠?
왜 비판과 비방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기 기준을
우리한테 강요하고 있죠?

3.

계속해서 계덕이 말인데...
'부탁'은 상대방의 거절을 예상하고,
상대방이 거절했더라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거래요..

상대방이 거절했을때 기분이 나빠서
"왜 거절하는데, 그래서 너가 안되는거야"라는
식의 반응이 나온다면
그걸 강요라고 한대요.

계덕이는 아마 국어사전을 새로 쓰고 싶은가봐요.

이 지점에서 우리가 따져봐야 할 것은..
도대체 내가 뭘 요청했고,
계덕이가 거절했다는 게 뭘까? 하는 점이에요.
누구든 알고 있는 사람 있으면 알려줄래요?

계덕이의 말인즉,
"왜 거절하는데? 그래서 너가 안되는거야!"
이런 식의 반응을 내가 보였다는 거죠? 내가? 헐..

4.

알아요 알아. 계덕이가 강요당하는 삶을 싫어한다는 거.
계덕이만 싫어하겠어요? 강요당하는 삶? 나도 싫어요.

내가 생각하는 "기자는 이래야 돼" 라는 관점에
계덕이가 맞춰야 한다는 생각도 안해요.

그런데.. 다만,  얘기할 순 있잖아요?

'계덕이는 이러이러한데,
내가 생각하는 기자는 이래야 한다.'
이게 왜  강요에요?
계덕이는 왜 내가 이 말을 못하게 강요하는 거죠?

5.

난 '애정'이라고 하지만
계덕이 자기 입장에서는
'지속적인 자존감의 상처'였대요. 빙고!

내 말 때문에
자존감의 상처 입을 수 있어요.
인정해요.

그런데 자존감의 상처라는게
과연 상대방이 헛소리를 하거나
자신의 기준을 강요할 때
형성될 수 있는 건가요?

자존감의 상처.....
만약 그런 걸 입었다면,

만약 상대방의 기자관이
자신에게 어떤 강요나 상처로 느껴졌다면...
그게 글의 힘이거든요.

그러면, 자신의 기자관을 피력하는
상대방을 문제를 삼을게 아니잖아요?
상대방의 기자관을 담은 글이
왜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
그걸 생각해봐야 하는 거 아녜요?

내가 계덕이한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었어요?


6.

계덕이가 내 말에 자신을 맞추지 않겠다고 한 것도 알아요.
난 원하지 않는 계덕이를 지도하겠다는 게 아녜요.

다만, 기사로 공적인 영역에서 영향을 미치는 한 기자와
그의 기사에 대해
누구든 이 사회에 얘기할 수 있는 거 아녜요?
계덕이는 왜 그걸 못하게 강요하지요?


7.

알아요. 알아.
계덕이는 그동안 이미 악플로 크나큰 고통을 받았어요.
그리고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글들이 온라인에서 판치는 거?
계덕이 뿐만 아니라 누구도 유쾌하게 생각하는 사람 없어요.

정신과 진료? 고통스러울 거에요.
1주일에 두세번 경찰서 왔다갔다 하는거 왜 안 피곤하겠어요?
대형포털을 상대로 소송하는거? 왜 안힘들겠어요?

8.

그런데, 계덕이는 기자로서
공적영역에서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삶을 선택했잖아요?

공적영역에서 기자의 삶을 선택한 사람이 자기가 힘드니까
어떤 비판이나 비평도 하지 말라는게 말이 되나요?

계덕이한테 약이냐 독이냐?
이걸 따지기 전에..

계덕이의 기사가 약이냐 독이냐?
그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정확한 정보의 전달과 올바른 의제설정을 위해
어떤 최선을 다했나?
그걸 당연히 누구든 따질 수 있는거 아냐?

그 점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얘기하는 게 고통스러우면
기자 하지 말아야지요.

9.

계덕이는 이렇게 말했어요.
"인격권침해에 해당할정도로 상대방에게 강요하고,
그 강요에 따르지 않았다 해서 보복심리로
이런식의 비방글을 이곳 저곳 커뮤니티마다 게시한 것에 대해
응당한 책임을 물을" 거래요.

이 말 자체가 나에 대한 명예훼손 아닌가요?

내가 자기한테 강요했고,
자신이 그 강요에 대해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보복심리로 내가 비방글을 썼다?

그렇게 주장하려면,
과연 강요의 내용이 뭔지 부터 나와야 하는 거 아녜요?

내가 강요한게 과연 뭘까요?
계덕이가 따르지 않은 게 뭘까요?

지금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있는 사람이 누굴까요?
나일까요? 계덕이일까요?

비평이나 비판을 하되,
자신만은 제발 언급하지 말아 달라는 계덕이의 강요.

강요에 직면하고 있는 사람은 지금 나고! 
그걸 거절하든 말든.. 그건 내 영역이라고요.


10.

지금 계덕이는 말장난으로 누군가를 고소하고..
누군가를 모함할 수 있다고 믿는가본데..
기자는 그렇게 말장난 잘한다고
할 수 있는거 아니거든요?

11.

아! 그리고 난 자폐적 환자라는 말을 한적도 없어요.
정확한 표현은 "자폐적 자기맹신에 의한 확증편향"이었을 거에요.
"확증편향 환자"라는 말을 한적은 있는데..
그런 병은 존재하지도 않고..
확증편향이야.. 그거야 뭐 계덕이 뿐만 아니라
매우 많은 사람들의 흔한 문제고요.
그런데 기자에겐 확증편향.
그거 굉장히 큰 장애에요.


12.

아마 지금부터 하는 말도 계덕이는 인정하지 않을 거에요.
자신의 기자관은 다르다고 할테니까..

그러나 내 기자관을
한번 더 얘기해줄게요.
강요하는 거 아녜요.
받아들이든 말든 그건 당사자들 몫이니까..

그냥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기자의 칼은 펜이어야 한다.
법을 칼로 쓰는 이가 기자일 순 없다.

물론 물리적 폭력 앞에서
법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있을 때도 있을 수 있다.
기자도 기자이기 이전에 사람이니까..

그러나 기자가
폭력과 침해에 대처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보통 사람과 달라야 한다.

만약 남의 글이,
남의 말이 칼처럼 느껴졌다면,
어줍잖은 법으로 방패삼아서는 안된다.
그 방패 또한 글이어야 한다.

그게 기자다.

왜냐하면 기자는
법을 방패와 보호막으로 생각하기 이전에
법의 폭력성을 직시해야 하는
비판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기자관은 나의 것에 불과하니까.
법을 칼로 쓸지 말지 그건 계덕이 몫이에요.

내가 볼 땐 기자가
사사건건 고소 운운하는 건..좀 쪽팔린 일인데..
계덕이 생각은 다를 수도 있죠 뭐.


http://mad.pe.kr

이계덕의 고소건 대응 페이지

신문고 이계덕 기자가 저를 고소했다고 하네요.




신문고 이계덕 기자가 저를 고소했다고 하네요.
무려 다섯가지 혐의입니다.
명예훼손, 모욕죄, 사이버스토킹, 강요, 공갈죄. 헐.



이계덕 기자에 의하면,
제가 인격권 침해에 해당할 정도로 자신에게 강요하고,
그 강요에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보복심리로
지속적으로 비방글을 게시했다는 것인데요.

도대체 이계덕기자가 따르지 않았다던
저의 강요의 내용이 뭔지, 저는 그것부터 모르겠습니다.
강요를 했다니까, 제가 이계덕에게 강요한 내용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게 뭘까요?

전 이계덕과 한번도 만난적이 없고,
이계덕과의 소통은 거의 모두 온라인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이계덕과의 모든 소통의 흔적은
거의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계덕이 적반하장격으로 하도 방방 뛰길래,
오해나 이계덕에게 어떤 억울함도 없게 하기 위해서
그 모든 소통 기록들을 블로그에 공개했습니다.

그랬더니 이계덕은 그 기록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면서,
포털사이트에 삭제 신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임시조치가 내려진 상황입니다.

구글블로그에서는
우리나라 포털과 달리,
피해를 주장하는 자의 일방적인 주장만으로
임시조치를 내리지 않습니다. 


아래의 링크를 따라가시면
여러분들도 보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번 판단해주시죠.
제가 이계덕에게 뭘 강요를 했는지?
그게 뭘까요? 여러분들은 혹시 아시나요?

http://19dominic74.blogspot.kr/2015/01/blog-post_99.html

<= 공개적으로 이뤄진 댓글대화내용을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담고 있는 글입니다.

http://19dominic74.blogspot.kr/2015/01/blog-post_20.html

<= 전말의 사정을
저의 1인칭 시점으로 
설명한 글이 이 글입니다.

http://19dominic74.blogspot.kr/2015/01/blog-post_22.html

<= "문제가 된 이계덕의 속옷사진. 과연 어떤 것이었나? "
라는 제목의 글인데,
이 글 역시 다른 글들과 함께
권리침해신고를 당해 임시조치가 취해졌습니다.

이 글들에 대해서
명예훼손의 혐의가 가당키나 한지..

후아. 제 첨삭지도문장을 무단으로
자기 기사 대신 끼워넣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입니다.

지금 명예훼손의 혐의가 과연 누구를 향해야 할지
이계덕기자는 잘 모르는 모양입니다.
불쌍한 친구..
    

문제가 된 이계덕의 속옷사진. 과연 어떤 것이었나?




이계덕의 속옷노출 . 보통의 속옷도 아니었다. 생식기만을 감싸는 주머니와 줄로 된 팬티를 생각해보라. 그걸 이계덕이 직접 입고 찍은 사진들.. 누가봐도 민망하고 낯 뜨거운 사진들이었다.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심지어 반드시 가려야 할 부분을 가리지 못해 스스로 모자이크 처리한 사진도 있었다. 단지 속옷 사진일 뿐이라고 말하면서도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페북에서만 공개하고, 관련 기사에서는 한 컷 올리지도 못한 이계덕.

음란이란 인간존엄 내지 인간성을 왜곡하는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성표현으로서 오로지 성적 흥미에만 호소할 뿐 전체적으로 보아 하등의 문학적, 예술적, 과학적 또는 정치적 가치를 지니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우리 법원의 견해다. 이러한 법원의 해석으로 음란물의 판단은 자의성을 배제한채 명확성의 원칙을 확보했다. 또한 이러한 법원의 해석에 비추어보아, 이계덕의 사진들은 음란물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자의적이지 않은 판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했다.

우선 음란물에 대해서 표현의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론으로 하자. 나 역시 그러한 민망한 음란물에 대해서 권장할 수는 없을 지언정, 그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주장은 주장일 뿐.  매우 슬프게도 법과 법원은 그와 같은 나의 주장에 기속되지 않는다. 법관은 오로지 법에 법에 대한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재판할 뿐이다.

그래서 물어봤다. 그 속옷입은 사진을 통해 전하고 싶은 문학적, 예술적, 과학적 또는 정치적, 사상적, 의학적, 교육적 메시지가 있었나? 그런데, 이계덕은 그것이 그냥 이뻐서 올린 거란다.  속옷이 이뻐서 속옷을 입은 자기 깊은 속살까지 같이 공개했다는 것이다. 그냥 이뻐서 올렸기 때문에, 어떤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이계덕의 주장이다.

이계덕의 말대로라면, 어떤 음란물을 올리더라도, 올린 사람이 "이뻐서 올렸다"고 주장하면 법원이 문제 삼지 않아야 할 판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음란물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처럼 견해를 같이 하지 않는 법도 있게 마련. 그러한 법이라고 해서 복종하지 않고 무시해도 좋다는 논리는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하물며 기자가 그러한 안일한 자기 중심적 태도로 법을 바라보고,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정말 위험하기 이를데 없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기사를 쓰기 전 이러한 정보를 담은 포스트를 소개해주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이계덕은 자신의 기사에서 여전히 규정의 모호함과 자의성 타령이다. 자신의 기사를 통해 음란물 규제와 페북의 조치에서 문제되는 것은 규정의 모호함과 자의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음란물 규제에 있어서 명확성의 원칙에 대한 논란은 이미 끝났다. 페북의 정책도 우리 법원에서 확립된 기준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적용의 과정에서 일관성을 갖추지 못한 점은 보이는데, 그것은 어느 집단의 법적용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계덕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오류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기사부터 질러놓고 닥치면 생각하잰다. 미리부터 생각하는건 복잡하단다.
   

2015년 1월 21일 수요일

과연 이계덕에게 나는 어떤 강요를 했나?




이계덕군이 내 주장에 대해 억울해 하는 면이 많은 것 같아서..
오해나 이계덕군의 억울함이 없도록..
저와 이계덕군의 거의 모든 대화가 그대로 담긴 내용을
아래와 같이 공개했는데요.

방금 네이버와 다음에서
그 포스트가 차단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계덕군이 권리 침해 신고를 한 모양이네요.
이계덕군 페북에서 공개적으로 주고 받은 대화였습니다
도대체 이 글의 무엇이 어떤 부분이 이계덕군의 권리를 침해했을까요?



똘 :  모든 행동이 기사가 되는 건 좋은데, 기사가 갖추어야 할 기본은 잊지 말아야 좋은 기자겠지요?

똘 : ... (첨삭지도 전문) .....

똘 :  내가 좀 첨삭을 해봤는데, 읽어보고 한번 비교해보도록 해요.

계 :  훨씬 낫네요. 똘님이 쓰신글이



그리고 이계덕은 내 첨삭지도글을 몽땅 자기 기사를 대신해 끼워 넣었다. 내 허락도 없이.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꾹 참고 다른 부분을 물었다.


똘 : 이계덕기자님에게 질문이 있어요. http://bl0g.kr/43 기자님의 속옷노출은 어떤 인문학적 의미나 가치를 가지고 있나요? 속옷노출을 통해 전하고 싶은 문학적, 예술적, 과학적 또는 정치적, 사상적, 의학적, 교육적 메시지가 있었나요?

계 : 그냥 이뻐서요' 속옷이.  '이쁜걸' '이쁘다고' 말하는것에 대해 굳이 인문학적 가치, 정치적 사상적 의학적 교육적 메시지를 포함해야 하나요?

똘 : 나도 이계덕기자님과 같은 견해인데, 법원의 견해는 달라요. 그러니까 답변을 생각해놓으시는게 좋을것 같아요

계 : 이계덕 속옷패션도 디자이너가 엄연히 존재하고, 그 패션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패션인데, 미학적인 가치가 충분하다고 보이는데요?

똘 : 잘못해서 법원에 의해 인간존엄성을 왜곡하는 노골적인 표현일뿐 아무 인문학적 가치가 없는 표현이라고 규정지어질 경우 형사처벌가능성을 배제할수 없으니까요

똘 : 그러한 미학적가치가 있다고 주장하셔서 법원이나 검열자들에게 항변하셔야 되는 상황이 오지 않길 진심으로 소망할게요

계 : 속옷 사진으로 처벌되는 시절은 이미 10여년전에 지났자나요

똘 : 그런데 법원의 기준은 성기노출이냐 속옷노출이냐 이 점이 아니라, 그 노출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는거에요. 그리고 기자님의 속옷노출은 오로지 속옷노출을 위한 노출이라고 오해받거나 낙인찍힐 위험성이 다분하죠.

계 : 이계덕 낙인찍으면 저도 할말 있고 소송하면 돼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일

똘 : 이계덕 기자님 말씀입니다. "문화나 예술 또는 정치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여부, 성적 흥미에만 호소하는지 여부. 이걸 누가 판단할 것인가? 누가 그럴 자격과 권한이 있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커뮤니티 운영자는 물론 법원까지도 뾰족한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 법원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미 준비해놨습니다. 법은 진실의 발견과 사실의 확정에 대한 전권을 법관에게 허락하였거든요. 사실이 그렇지 않더라도, 법관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보기로 법률은 이미 허락한 거에요. 특히 법관은 어떤 표현물에 대한 음란성여부를 판단할 때, 행위자의 진술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외부에 나타난 행위의 형태와 행위의 상황 등 구체적인 사정을 기초로 하여 일반인이라면 당해 행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고려하면서 표현자의 그 심리상태를 추인하도록 되어 있어요. 법원에서 낙인 찍을 경우, 이계덕 기자님은 자신도 할 말이 있고 소송을 하면 된다는 취지로 말씀하셨는데, 법원의 판결은 소송의 대상도 아닙니다. 법관은 논쟁의 상대방이 아니라, 설득의 상대방이 되어야 해요. 법관을 설득해서 이해시키지 못하면, 소송에서 지는 겁니다. 물론 기자님 말씀처럼 기자님 일은 기자님이 알아서 할 일 맞는데.. 그 전에 기자님이 뭔가 오해하고 계신 점이 있지 않나 싶어서 말씀드렸습니다.

계 :  일단 닥치면 생각해요ㅠㅠ 미리부터 생각하는건 복잡해요

똘 : 미리부터 생각하면 복잡하니까 닥치면 생각한다? 기자답지 않은 자세에요.^^

계 : '기자답지 않은 기자'이고 싶어요 저는~! 항상.ㅋ 자유주의자

똘 : 기자가 지향하는 기자답지 않은 기자가 뭔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기레기는 되지 말아야겠죠? 자기 기사에 책임감을 가지지 않는 기자는 기레기일뿐 자유주의자와 아무 관계가 없어요. 생각없음. <= 그것이 죄라고 한나아렌트는 말했어요

계 : 제 기사에 책임은 항상 져왔는데?

계 :  '틀'에 얽매이지 않는기자, 겉모습에 치중하지 않는 기자, 이론에 치중하지 않는 기자, 세상에 보도하는 사실을 그대로만 바라보지 않고 한번쯤 비틀어 의문을 제기해보는 기자, 있는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기자, 약자와 소수자의 입장에서 한번더 생각하는 기자, 내 나이또래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기자, 뭐 여러가지가 있는데요?

똘 : 나한테 답변하실 필요는 없어요. 여기서 주고받은 대화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답변해주세요. 그 후에 기자님 스스로 자신이 자신의 기사에 책임진다고 생각한다면. 그럼 된거에요

계 : '기자다움'이라는게 딱히 정해진게 없잖아요. 최소한 나는 다른 사람들이 '기자는 이래야지'라는 타인의 시각에 저를 맞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쓴 기사가 옳고 내가 쓴 기사에 내가 책임을 지면 끝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최소한 남들이랑 똑같은 기자가 될 바에는 남들이랑 다른 기자, 아니 기자가 아니라면 그냥 이계덕으로 살고 싶네요

똘 : 적어도 기자다운 기자는 "생각하면 복잡하니까 나중에 닥치면 생각하자"는 말은 하기 어려울것 같은데... 게다가 기사는 이미 나간 상황에서. 그건 도피에요


계 : 전 공부도 더 해야하고, 기본소양도 많이 부족해요. 그래서 남들같은 기자가 될래야 될수가 없어요. 그냥 내가 잘하는것, 내가 필요로 하는것, 누군가는 관심없어도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소식을 전하는 것, 그리고 내 기사를 원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 사람들을 위해서 일을 할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것이에요

계 : 지금 막 닥쳐있는 상황도 컨트롤하기 어려운 판국에 나중에 있는 일까지 지금 미리 생각하라? 그건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는 사람의 이야기죠.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재판만 54개에요. 현재 하고 있는걸 나중에 미뤄가면서 굳이 미리 생각해둘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난 님처럼 '학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류의 소양은 없거든요.

계 : 그냥 내가 옳다고 믿는 것에 올인해왔기에 앞으로도 그럴것이니까 님의 방식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도피'라고까치 표현하는것은 뭐랄까 '지식의 우월'하다는 자랑으로 밖에 들리지 않아서 그닥 탐탁치 않네요

계 : 그리고 난 님처럼 어떤 철학적인 메시지로 머리를 복잡하게 하려고 올린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생각했거든요. "팬티가 이쁘다" "입어보고 싶다" "내가 입은 것에 대해 다름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쁜 팬티를 입은 남자연예인이나 여자연예인이 멋있다" "노출은 누군가에게 허용되고 누군가에게는 금지된 것이 아니라 누구나에게 허용된 표현의 자유다" 이거에요.


그리고 얼마후 이계덕은 새 포스트를 올렸다.

똑똑한척 하고 싶은 사람들은 똑똑한척 하는 사람들끼리 놀아라. 내 스스로 모자란거 뻔히 아는데 똑똑한사람들이 '넌 모자라' '넌 모자라' 이럴수록 기분만 더 나빠진다. 그냥 세상사에 대해서 슬플때 함께 울어주고, 기쁠때 함께 웃어주는 정도,

퇴근 후 나 역시 새 포스트를 올렸다.


이계덕군이 옳다고 믿는 것에 올인하는 거? 좋아요.
그런데, 그 옳다고 믿게 될 때까지의 과정은
완전 무시하는게 이계덕군의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계덕 군이 옳다고 믿는 순간
이계덕군의 맘 속에서는 이미 게임 끝인 거에요.
이계덕군은 그 이후부터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해
의심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것은 기자로서 매우 심각한 장애에요.

공부가 부족한 거. 기본 소양이 부족한 거,
문장력이 개판이라서 페친 독자가 챙겨준 첨삭지도문를 그대로 올리는 거.
내가 볼 땐 다 괜찮아요. 차차 나아지겠죠.

그런데, 자신이 옳다고 “믿어서 기사로 쓴” 것에 대해서
전혀 의심을 품지 않거나,
독자 앞에서 “그건 생각해보지 않았고 닥치면 생각할 거고.
미리부터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처럼
무책임한 일이 어디있어요?

단지 이계덕군의 “방식”이 나와 달라서 “도피”라고 표현한 게 아니에요.
그걸 두고 “'지식의 우월'하다는 자랑”으로 몰아세우는 것도
지금 이계덕군 사고 방식에서는
매우 위험할 뿐만 아니라 건방진 거죠.

이계덕 군이 다른 기자들과는 “다른” 방식을 지향한다고 해도,
적어도 사람들은 “기자”라는 타이틀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하죠.
그 기대를 염두해두면서 이계덕 군도
“기자”라는 타이틀을 사용할 거고 말이죠.

'틀'에 얽매이지 않는 기자?
겉모습에 치중하지 않는 기자?
이론에 치중하지 않는 기자?
세상에 보도하는 사실을 그대로만 바라보지 않고
한번쯤 비틀어 의문을 제기해보는 기자?
있는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기자?
약자와 소수자의 입장에서 한번 더 생각하는 기자?
내 나이또래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기자?
누군가는 관심없어도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소식을 전하는 거?
그리고 계덕군의 기사를 원하는 독자를 위해서 일하는 거?

다 좋아요. 그런데 그걸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그것들은 가득찬 가슴과 의지만 가지고 가능할 것 같죠?
자신의 철학 없이 어떻게 한번쯤 비틀어 의문을 제기하죠?
절실한 소식을 잘 전하려면, 많은
독자들에게 신뢰를 주는 기자여야 하고..
기사에 대한 독자의 신뢰감은
기자의 뜨거운 가슴만으로 나오지 않아요.

기자로서 공부가 부족하거나
기본 소양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는데..
일반인의 기준으로 봐도 무식한 건..
좀 고민해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적어도 독자보다 무식하진 말아야 하잖아요?
독자들보다는 많은 책을 읽고
독자들보다는 많이 알아야 하잖아요?

분노해야할때 함께 분노하고,
싸워야할때 함께 싸워주고 싶으면
활동가나 정치인이 되어야지.
그게 기자가 할 일인가요?

똑똑하건 무식하건 정치인은 누구나 할수 있어요.
그런데 기자는 아니라고요.
기자가 똑똑한 척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무식해서는 참 곤란하다고요.
게다가 무식하면서
자기 생각은 어떠니 저러니
이런 말까지 기사에서 하고 있어봐요.
그게 무슨 힘이 있겠나?
똑똑한 척 하고 싶은 사람들은
똑똑한 척 하는 사람들끼리 놀라고요?
똑똑한 척하는게 아니라..
보통 사람 수준의 교양은 요구할 수 있잖아요?
적어도 기자한테는.. 안그래요?

얼마전에 어떤 메이저 신문사에서
상반기 공채가 있었는데요..
자격 조건이 이래요.
“병신이 아니거나 자신이 병신인지 알아야 한다.”
갑자기 그 생각이 나네요.

홍세화 선생이 10년 전엔가
“너희들은 무식한 대학생”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어요.
대학생에게도 무식은 자랑이 아닐진대
기자에게는 무식이 자랑이 아니라는 말은
더 말할 이유가 있나요?

이하 이 글에 대한 답글들..


계 : 잘난틀에서 바라보는 세상과 무식한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은 '다를수' 있는 법. 서울대 나와 공부만 한 사람들이 바라보는 세상과, 밑바닥에서 경험을 가진 사람은 다른법이죠. 그래도 전 최소한 다른 사람들이 못해본 '경험'이라는 것이 제 기사를 받쳐주네요. 공부는 해야겠죠. 소양도 갖춰야겠죠. 그런데 그런 지적질은 똑같은 사람들한테나 가서 하세요.

똘 :  다른 사람들이 못해본 '경험'이라는 것을 믿은 나머지, 자신의 생각에 대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 거.... 그거는 노인네들이나 가진 태도인데..

계 : 제 기사가 완벽하지 않죠. 저보다 더 나은 기사를 쓰는 분들이 많구요. 최소한 저는 남들이 쓰지 않는 기사를 가끔씩 쓰고, 남들이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현장의 기사를 쓰기도 하죠. 물론 남들보다 못한 기사를 쓰기도 하구요. 저는 모든 '당사자'가 기자를 하고, 모든 '당사자'가 정치를 하고, 모든 '당사자'가 연대해야 진짜 진실이 열린다는 생각이거든요. 저는 성소수자로써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리고 왕따 경험자로써 학교폭력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전과자로써 전과에 대한 차별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그리고 이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마녀사냥을 당해본 이로써 마녀사냥을 당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세상에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누군가에게는 절박한 목소리를 보도하기 위해 기사를 쓰고 취재를 합니다.

계 :  그 의심을 굳이 똘레랑스님께서 하실 이유도 없죠^^ 이렇게 반복적으로 남의 '기자관'을 건드리실 필요도 없는거 같구요.

똘  :  난 할 필요가 없지만, 이계덕 군 스스로는 해야죠. 자신의 생각에 대한 의심.. 피해자로서의 경험을 가지고 기사를 쓴다.. 그게 과연 경쟁력일지 장애일지는 연구해봐야겠네요.. 나도 고민을 안해봐서..

계 :  그걸 해야 된다며 강요할 권리도 님에게 없고, 그 의심이라는걸 본인 스스로부터 하셨으면 좋겠네요. 님이 하고 있는 이런식이 단지 '그냥 내가 똑똑한걸 자랑하고 싶어했던것은 아닌가' 하고요.

똘 :  의심해봤고,, 아니라는 결론을 일찌감치 냈어요..난 남들한테 자랑할만큼 똑똑하지도 못하고..

계 :  전 기자로써 최고의 기자가 되려고 기자를 하는게 아니라, 대부분의 기자들이 하지 못하는걸.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 절박한 이야기를 가장 공감할수 있는 신분에서 공감해주는 사람이 되려고 기자를 하는것이고, 항상 이야기했지만 언제라도 '로또'를 당첨되면 기자 그만둘거라고 수차례 말했어요. 나는 님들이 기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내가 기자를 하는것은 '당사자'로써 그리고 나와 같은 아픔을 겪은 '누군가'를 지지해주는 사람으로써 함께 분노하고, 함께 싸워주는 사람으로써 '미디어'를 통한 투쟁을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항상 현자에서 소개할때도 '직업'은 기자이지만 그것은 직업일뿐 실제로는 '활동가'의 마음을 가진 개인이라고 소개합니다.

똘 :  기자로써 X 기자로서 O

똘 :  지금 활동가의 삶을 살지 않고 기자의 삶을 사는 건 돈 때문이라는 말씀인가요?

계 :  맞춤법 자주 틀려요. 아니라는 결론을 일찌감치 내셨다는데 결국에는 '잘난척' 이시네요.

계 : '미디어'에 관심이 많은 것은 사실이고, 미디어를 통해 왜곡된 정보를 바로잡는 것. 그리고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를 언론을 통해 알리는 것. 앞서 이야기했던 그런 것들을 위해 기자를 한다고 말했습니다만?

똘 :  그런데 로또당첨되면 왜 기자를 그만두죠?

계 :  로또 당첨되면 기자 그만두고, 언론사 만들건데요?

똘 :  아.. 그런 뜻이었구나.. 꼭 당첨되었으면 좋겠네요. 기자로서의 자질은 별로지만 언론사사주로서의 자질은 기대할게요..

계 : 님이 생각하는 기자다움은 종이신문에서 찾으세요. 저는 제 스타일을 좋아해주고, 제 글을 좋아해주는 독자층이면 충분하니까요. 전 '내 스타일'의 기사에 대해 남한테 평가받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요 '기자로써의 자질' 이라는 것 자체가 무슨 법조인의 '리갈마인드'처럼 무언가 정답이 있는것처럼 말하네요

똘 :  기자. 누구나 할 순 있지만, 아무나 할 순 없죠.. 뜨거운 가슴 중요하지만 그게 다는 아녜요..

계 :  공감할줄 모르고 잘난척하는 기자가 어떻게 약자와 소수자의 입장이 되어볼수 있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훌륭한 기자는 '사연' 있는 기자들입니다. 이론으로만 '공부'한 기자들은 절대로 못하는....약자가 되어본 사람, 소수자가 되어본 사람, 해고를 당해본 사람, 가족을 잃어본 사람. 자영업을 통해 물건을 팔아본 사람. 그런 사람들이 가장 진솔하고 사연있는 이야기들을 할수 있지 않을까요?

똘 :  공감하고 겸손하고 진솔한 기자가 되기 위해서 굳이 무식해질 필요는 없어요. 약자의 경험 도움이 되겠지만, 장애가 될 수도 있죠.

계 : 얼마전 '홍가혜' 관련 님께서 쓰신 글을 보면서 "이건 홍가혜씨의 사건에 대해 취재한것이 아니라, 그냥 홍가혜씨에 대한 기본적인 편견을 바탕에 깔고 '여성은 이래야 해'라는 본인의 잘난척을 바탕으로 글을 쓰셨구나라는 생각이 물씬 풍겼어요. 스스로 진솔하다고 생가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공감하고 겸손한 기자는 아니신거 같네요. 잘난척하는 기자지..

똘 :  미안하지만 난 기자가 아녜요. 블로거일 뿐이지.. 왜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쓸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계 :  저도 저 나름대로 쓸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님이 원하는 기자상에 못미치고, 님이 생각할때 기자로써의 자질이 별로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내가 기자로써 쓴 기사들이 남들이 쓴 기사보다 가치가 없거나 무시당해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똘 :  당신이 기자로서 쓴 기사들이 남들이 쓴 기사보다 가치가 없거나 무시당해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기자라고 그러고 다니면서 기사 쓰겠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독자들한테 돈도 달라고 할 수 있을 테고.. 당신의 소망 잘 알고 있고. 그 소망이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어요..진심이에요..

계 :  제가 계속된 '잘난척'을 들어드리는데 제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는것 같아서요. 앞으로 제 페이스북에서 '사담'만 부탁드립니다.

똘 :  원하시는대로 해드리고 싶은데.. 그러면 원하시는 내용을 정확히 제가 알아야 하겠죠? 사담은 무엇이고, 사담과 구별되는 계덕군이 좋아하지 않는 발언은 무엇일까요? 그 변별포인트를 정확히 알려주시면, 적어도 계덕군 폐북에서 계덕군이 싫어하는 말은 안하도록 노력하죠.

계 :  '기자의 자질'이 어떻냐는둥, 기사가 어떻냐는 둥 이런 식의 '지적질'을 받는것에 대해서 "그럼 당신이 더 좋은 기사 쓰던가"라는 말로 답변해왔듯이...저보다 좋은 기사를 쓰는 분들은 많을것이고, 저보다 좋은 기사를 써주신다면 그 만큼 정보가 다양화되고, 그것을 보는 눈의 다름도 확실히 알려지겠죠.

계 : 노래하면 같이 노래 부르고, 사진찍으면 잘생겼는지 옷은 이쁜지 패션은 이쁜지 이야기해주고, 그냥 웃을땐 웃고 울고 싶을땐 울고, 분노할땐 분노하고, 싸울땐 같이 싸우고, 응원할땐 응원하고, 힘들땐 힘들다고 하소연하고...감정표현정도면 충분할거 같은데요?

똘 :  적어도 페북을 통해서 기사첨삭지도도 해주고, 인용할 내 포스트까지 소개해줘서 기사거리까지 만들게 했는데 . 페북을 통해서 기사에 대해 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죠?

계 :  솔직히 말하면 '기사첨삭지도'라는거 자체도 기분 나빠요. 난 너보다 훨씬 뛰어나다라는걸 자랑하는 것도 안했는데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런걸 하고, 더 나아가 계속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식으로 묻는것만큼 폭력이 없죠

똘 :  그러게요, 기분 무지 나쁘셨는데. 자기 기사를 대체해서 그걸 통쨰로 채워넣으셨죠? 원치도 않으셨는데..

계 : 님이 수정한 부분들이 문맥상 깔끔하니까요.

계 : '타인의 삶과 생각, 타인의 지식의 고하를 불문하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 다양성의 원칙인데, 내가 님한테 기사첨삭지도를 원했나요? 기사에대한 평가는 해당 기사에 '댓글'로 남기시면 되는것이지요.

똘 :  그럼 된 거 아녜요? 모두가 만족했잖아요? 그리고 첨삭지도채널을 어디로 선택하든, 그게 문제인가요?

계 :  그리고 물론 그걸로 제 부족함을 다시 확인했고, 무엇이 문제인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겠죠. 그건 맞죠. 그런데 그럼 거기서 그냥 감사하다고 끝냈겠죠. 그런데 이건 원치도 않은 '스스' 만난 기분?

똘 :  '스스'가 뭐죠?

계 :  첨삭지도를 왜 꼭 님이 해야하죠?

똘 : 꼭 내가 할 필요 없었어요. 다만 난 계덕군한테 기본적으로 애정이 있었고 , 또 내 포스트가 인용된 기사였는데, 읽기에 매우 불편했죠. 그래서 해주었고, 이계덕군이 만족했죠.. 안그런가요?

계 :  "내가 원하는대로 다른 사람이 움직여주야해. 다른 사람은 틀렸어 고치고 싶어. 내가하는건 다 다른 사람 잘되라고하는 것이야" 이런 시각들이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고, 결국에 타인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일종의 정신질환의 하나죠. '이렇게 하면 좋을거 같은데 어떠세요' 정도로 한번정도의 조언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뒤부터는 무시하는 발언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죠?" "도피하시는건가요?" "기자로써..

똘 :  인간에 대한 무시는 가지고 있지 않아요. 다만 내가 논조가 좀 바뀌었다면, 그건 이계덕군의 이 말 그 후부터였죠. "일단 닥치면 생각해요ㅠㅠ 미리부터 생각하는건 복잡해요" 떄로는 뒤통수를 쳐서 정신차리게 하는 것도 애정의 한 방법일 수 있어요.

계 :  고쳐주신것에 대해 만족한것은 맞아요. 그부분은 저보다 님이 훨씬 나아요. 그런데 그뒤에 보이신 질문이나 태도들은 결국 '난 이계덕이란 인물을 가르쳐야겠어'라는 원하지도, 시키지도 않은 본인의 어떠한 '집착' 때문인지 결과적으로 계속 상대를 무시하고 비하하는 말투들을 들으면서 제가 님 역시 위와 같은 병을 가지신게 아닌가 의심이 될수밖에요

똘 :  아뇨 적어도 자기 기사에 대해서 책임감은 가지고 있을 줄 알았거든요. 설마 "일단 닥치면 생각해요ㅠㅠ 미리부터 생각하는건 복잡해요" 식일 줄 알았겠나요? 그리고요, 기사는 공적영역이에요. 사적 영역이 아니라서, 질문이나 비판이 가능하죠..

계 :  말했죠? 전 현재 54개의 재판을 하고 있다구요. 이것만민사고 개인 형사사건 하나에, 제가 고소한 사건만 600건이 넘어요. 그리고 아침에 수영하고, 저녁에 헬스하면서 일정 소화하고 있어요. 그런데 꼭 그 부분에 대해서 '나중에 제 개인이 생각해야 할걸' 꼭 님이 한 질문에 '제가 답변'을 할 이유가 있나요? 기사는 공적영역이지만 '기자'의 페이스북은 '사적공간'이죠. 이곳에 올리는 모든 게시물이 '다 공적인 글'이라고 착각하시는건 아니죠?

똘 : 기사에 대한 비판을 공적 영역에서 하기엔 내가 이계덕기자에 대한 애정이 깊었나보죠..기사에 대한 비판이나 질문을 다른 공적 영역에서 해주길 바래요? 내 블로그 같은?

계 :  엄밀히 말하면 '맞춤법이 안맞다'거나 '기사의 질이 좀 떨어진다'는 것은 내가 이미 인정하니까 굳이 재차 반복해서 하실 이유는 없구요

똘 : 재차 반복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고요..

계 :  기사에 대한 비판이 '기자'에 대한 자질문제로까지 갈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구요

똘 : 기사에 대한 기자의 태도는 중요한 비평의 영역이죠..

계 : 뭐 그동안 '기사에 대한 비판'의 범위를 벗어나 '기자 개인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동안 '소송'으로 답해왔으니까요. 기자의 태도에 대해 '자기 주관'으로만 해석해서 마음대로 쓰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내 입장에서 '나는 이렇게 살래'라고 답한바 있습니다. '애정'이 스토킹이 되는것에 대해 그닥 좋아하지 않아요

똘 :  소송의 대상이 될만한 인신공격은 저 역시 좋아하지 않습니다.

계 :  짝사랑도 싫어하구요. 내가 님의 '기자로써의 자질'에 동의하지 못하고, 니미 나의 '기자로써의 자질'에 동의하지 못하는걸로 끝낼 것을 님께서 미련을 못버리셔서 계속 이러고 있네요.

똘 : "나는 이렇게 살래"는 좋은데.. 문제는 기자가 "난 이렇게 기자질 할래" 하는 건 문제가 다르다니까요..

계 : "난 이렇게 기자질 할래"라는 것을 인정해주시는 다른 기자분들이 많으셔서 "그대로 살래요"

똘 : 계덕님의 자질에 대해 논하지 않을게요. 그 대신 하나만 부탁합시다..계덕님이 당연히 옳다고 믿고 있는 것들...그것들 옳다고 믿는 거로는 부족하잖아요? 적어도 기사쓰기 전에는 한번쯤 의심해봐야 하는거잖아요?

계 : 그냥 서로 '쌩' 까고 삽시다

똘 :  이계덕 기자의 기사가 내 눈에 안보이면 생까드릴게요..

계 :  안보이면이 아니라 '안보시면' 되는거죠

똘 :  일부러 찾아가서는 안봐요.. 누가 신문고 같은 곳을 일부러 찾아가서 보기까지 하겠어요. 트윗이나 페북에서 타임라인에 자꾸 뜨니까 보지..

계 :  기자들은 많고, 기사들도 많이 나옵니다. 안보시면 되는데 왜 굳이 보려고 하실까? 또 한명의 '스토커'가 생기는 것에 대해 그닥 비추천합니다.

계 : 신문고까지 찾아가서 직접 기사를 보는 분들이 매일 1만여명이 넘으시네요. 우리 기사를 리트윗하고, 보내주시는 독자분들이 계시구요. 그리고 고발뉴스에도 별도로 원고료받고 글 송고하고 있구요.

똘 :  훌륭하네요.. 그러니까 찾아오는 독자들에 만족하시고, 내가 다니는 게시판이나 트윗 타임라인에 안보이게 해주시는 건가요?

계 :  님 한명 안보더라도 볼 사람은 봅니다. 우리 기사가 맘에 안들면 한겨레 경향이나 다른 대안언론 기사를 보겠죠. 최소한 나는 내 '기자관'에 대해서 이번만 밝힌게 아니라 4년전 처음 기자로써 직업을 가질때부터 변하없이 이대로 살아왔어요.

계 : 님이 피해다니세요.

똘 :  ㅋㅋㅋ 그냥 기사건 기자건 비평하면 되지.. 무슨 피해다니기까지 해요..

계 :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왜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침범하십니까?

똘 :  내가 이계덕군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침해합디까?

계 : 비평과 잘난척은 구분잘하시길

똘 :  내 비평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입니까?

계 : 나보고 님이 다니는 게시판이나 타임라인에는 보여지지 않게 해달라면서요

똘 :  보이니까 비평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조중동 기사 비평하는 거랑 똑같아요..

계 :  그 비평이 '홍가혜 기사' 때처럼 '철저한 편견'위주의 1인칭 글쓰기?

똘 :  거기서 스토킹이니.. 보지 않으면 된다느니.. 그런 말이 왜 나오냐고요?

계 : 그것이 비평이지 스토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기사마다 댓글단다거나. 기사마다 맞춤법 올린다다거나

똘 :  하하하하. 공적 영역에 있는 기사가 감수해야 할 몫이죠. 창피한줄은 아나봐요..

계 : 오늘의유머 사이트에 그런 사람이 한명 있어서 '소송'해서 형사벌금 200만원 먹였어요.

계 : 공적 비판의 범위를 벗어나 개인에 대한 과도한 인격권침해

똘 : 난 자존심이 있어서 거기까지는 가지도 못해요. 염려 마요..

똘 :  하긴 이계덕군이 오랫동안 악플러들한테 시달렸었죠.? 겁 먹을만 해요..

계 : 기자는 '공적영역에 있는 자신의 기사에 대한 책임은 지지만, 기사외에 사적부분까지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똘 :  동의해요.. 다만 기사에 대한 기자의 태도는 문제가 좀 다르죠..

계 :  기자의 자질에 관해서는 내 스스로 '기자'가 아닌 '기자'라고 이야기를 한다. 스스로 소양이나 공부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고, 내가 말하는 '기자'는 '당사자'로써의 경험과 공감을 바탕으로한 진실찾기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기자가 되야 하고

계 :  나는 그런 기자가 되는것에 만족합니다

계 :  이 이야기를 몇번해야 될까요? 같은말에 반복일거 같은데

계 : 아무튼 전 이제 님을 차단하겠습니다.

똘 :  혼자서 만족하시는데 이력이 나셨으면 제 어떤 비평도 두려우실 이유가 없으실텐데요?


그리고 이계덕은 페북에서 나를 차단했다.

허락없이 내 첨삭 문장으로
자기 기사를 몽땅 대체해 버린 이계덕의 행위가 당혹스러웠지만,
문제 삼지 않으려고 했던 나다.
교육용으로 제시된 내 첨삭문장을 허락이 없이
기사에 사용한 이계덕 기자의 행위를
문제 삼기로 했다


적어도 독자한테
문장지도 받아야 하는 처지가
기자로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른채

"지적질" 운운하는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애정이렸다.
 

권리침해신고에 따른 임시조치를 당해보신 적이 있나요?



사생활 적시, 인신공격 등 표현으로 인한 권리 침해가 가지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야기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침해에 대해서는 피해자로부터 피해의 소명과 차단의 요청이 있는 경우, 그 침해 여부를 판단을 하기 전에 즉시 피해자를 위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인터넷표현의 자유와 관련하여 내가 오랫동안 주장해오던 바다.

그런데 생업에 바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나의 주장이 실현되고 있었다.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44조의2를 살펴본다.

제44조의2(정보의 삭제요청 등) ①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일반에게 공개를 목적으로 제공된 정보로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 등 타인의 권리가 침해된 경우 그 침해를 받은 자는 해당 정보를 취급한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에게 침해사실을 소명하여 그 정보의 삭제 또는 반박내용의 게재(이하 "삭제등"이라 한다)를 요청할 수 있다.
  ②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는 제1항에 따른 해당 정보의 삭제등을 요청받으면 지체 없이 삭제·임시조치 등의 필요한 조치를 하고 즉시 신청인 및 정보게재자에게 알려야 한다. 이 경우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는 필요한 조치를 한 사실을 해당 게시판에 공시하는 등의 방법으로 이용자가 알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④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는 제1항에 따른 정보의 삭제요청에도 불구하고 권리의 침해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거나 이해당사자 간에 다툼이 예상되는 경우에는 해당 정보에 대한 접근을 임시적으로 차단하는 조치(이하 "임시조치"라 한다)를 할 수 있다. 이 경우 임시조치의 기간은 30일 이내로 한다.
  ⑤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는 필요한 조치에 관한 내용·절차 등을 미리 약관에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⑥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는 자신이 운영·관리하는 정보통신망에 유통되는 정보에 대하여 제2항에 따른 필요한 조치를 하면 이로 인한 배상책임을 줄이거나 면제받을 수 있다.



이 법률에 따라 네이버, 다음 등의 포털사이트들은 권리침해신고에 대해 표준화된 대응을 하는 것 같다. 다음카카오에 따르면, 약관에 따라 임시조치된 게시물에 대해서 30일 이내에 게시자의 재게시신청(복원신청)이 없는 경우 30일이 지난 후에 게시물은 삭제 조치된다고 안내한다.

또한 게시물로 인한 피해를 주장하는 자가 임시조치를 신청한 후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또는 법원 등의 결정 기관에 해당 게시물 또는 게시자에 대한 명예훼손 여부에 대한 결정을 득하여 권리침해신고센터로 해당 결과를 알려주면 30일 이내라도, 결정에 따른 삭제 또는 복원 등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고 안내하고 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다. 피해를 주장하는 자가 권한를 남용하여 신고를 남발하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 또한 최근 네이버와 다음에 게시한 총 여섯 건의 게시물에 대해 임시조치를 당했다. 모두 피해를 주장하는 인터넷 기자 한 사람에 의한 것이었다. 정작 그 인터넷 기자는 비열하게도 임시조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다른 사이트에서 나에 대한 명예훼손을 자행하고 있는 상태라서, 이것은 단순히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만 보기 어렵다. 이 자의 경우, 다른 SNS서비스에 대해서는 음란물 게재를 이유로한 임시조치에 반발하여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해당 조치를 무산시킨 바도 있다.

2015년 1월 20일 화요일

기자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가? 이계덕을 통해 생각한다.



19일 오전 페북 타임라인에 눈에 띄는 글이 올라왔다. 이계덕의 것이었다. 얘기인즉, 페북이 자신의 계정을 차단했는데, 페북코리아 본사에 찾아가서 고소하겠다고 으르고 나니 계정이 풀렸다는 얘기였다. 페북코리아 본사까지 찾아갔다고? 대단한 자다. 페북 한국본사가 어디있길래? 역삼동에 있단다. 역삼동이라. 불현듯 12년 그 일이 떠올랐다.
 
그렇다. 12년 전. 네이버에 의해 내 블로그가 차단되었더랬다. 이유도 밝히지 않은채 내 블로그를 통째로 차단한 네이버의 답변은 국가보안법이었다. 현대사학자인 한홍구 교수의 김일성 관련 글을 스크랩한 게 화근이었다. 내 블로그를 차단하게 한 문제의 그 글은 네이버뉴스에서도 서비스되던 것이었다. 그 때, 몇몇 언론사에서 내 블로그 차단소식을 전하는 한편, 나 역시 이계덕처럼 그 본사에 항의방문을 했던 터였다. 그 때 네이버 본사 역시 역삼동에 있었다. 그 때 일로 내 블로그는 한홍구교수의 역사책에 출연함으로써 졸지에 역사적 블로그의 반열에 올랐었지.

내가 12년 전에 겪던 일을, 12년 전의 내 나이랑 비슷한 나이의 후배가 지금 겪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묘한 동지의식이 느껴졌다. 또 페북이 그러면, 페북 본사에서 속옷 시위를 할 거란다. 국가인권위 진정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국가인권위에 진정할 수 있는 내용이 뭔지 잘 모르는 친구인 것 같았다.


선배 언론학도로서, 표현의 자유에 대해 먼저 고민해온 선학으로서 , 몇 가지 팁을 주고 싶었다. 내 블로그에서 음란물 표현의 자유에 관한 포스트 몇 개를 소개했다. 곧 답이 왔다. "좋은 자료"란다. 우라까이해도 되냐고 묻는다. 무슨 우라까이 씩이나. 출처나 밝히면 된다고 했다.

10분 쯤이나 지났을까? 바로 우라까이의 결과물이 올라왔다. 후우 정말 날림 기사다. 읽기 힘들었다. 첫째 문장이 너무 길었고, 연결도 자연스럽지 못했다. 둘째, 내 글에 대한 인용에서 본질을 제대로 잡지도 못했다. 내 포스트에서 김경신 교수의 사례를 쓰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 사례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서, 굳이 내 포스트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신문기사들이 널려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계덕 기자의 결론을 보니, 내 포스트를 제대로 읽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계덕은 자기가 고소를 하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 것처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는 자신만만했다.
    
곧이어, 이계덕은 자신의 페북에서 “생활의 기사화” 운운하며, 자신의 기사에 대해 얘기했다. 생활의 기사화 같은 소리 한다. 신문기사가 무슨 낙서장인가? 생활을 기사화하려면, 좀 제대로 쓰든지..
  
먼저 이계덕의 기사를 복사해서 대충 고쳤다. 고치면서 보니 이 친구가 정녕 4년차 기자 맞을까 싶었다. 지난 달 한 중학생의 습작기사를 첨삭지도해주었던 기억이 났다. 고쳐진 글을 이계덕에게 보냈다. 자기 글과 비교해본다면, 알겠지. 어떤 글이 더 낫고, 자신의 문장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부끄러움을 안다면, 이계덕이 발전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곧 답이 왔다. 내 글이 훨씬 더 매끄럽다는 것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난 이계덕이 기자의 자존심과 부끄러움을 아는 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다음에 있었다. 이계덕은 한마디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내 첨삭지도문을 통째로 자신의 기사를 대체해 올려놨다. 오오 하느님. 침착해져야 한다. 침착해져야 한다.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이계덕에게 물었다. 몇 가지 우려되거나, 이계덕이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점들이었다. 그런데 이계덕은 자신이 쓴 날림 기사의 오류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가 철썩같이 믿고 있는 사실은 오로지 하나였다. 속옷사진으로 처벌하거나 계정이 차단당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 이계덕은 오로지 그 점을 전가의 보도처럼 여기고 있는 듯 했다. 내 질문과 염려에 대해 이계덕은 이렇게 답했다.

“낙인찍으면 저도 할말 있고 소송하면 돼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일”

그래! 네가 할 일인 줄 몰라서 이러냐? 기사에서 헛소리나  적어놓지 말든지. 이계덕의 기사는 음란물 제한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한 것이었다. 적어도 음란물 정의에 대한 모호성이나 음란물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려고 한다면, 검열자들이 어떤 논리를 가지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았어야 한다. 이계덕은 이미 오래전 검열자들에 의해 반박된 주장을 자신의 기사에서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소송은 왜 이렇게 맹신하는지? 법원을 자신의 편이라고 철썩같이 확신하는 이계덕의 근거가 난 무척 궁금했다. 좀더 자세히 설명했다.

이계덕 기자님 말씀입니다. ‘문화나 예술 또는 정치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여부, 성적 흥미에만 호소하는지 여부. 이걸 누가 판단할 것인가? 누가 그럴 자격과 권한이 있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커뮤니티 운영자는 물론 법원까지도 뾰족한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 법원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미 준비해놨습니다. 법은 진실의 발견과 사실의 확정에 대한 전권을 법관에게 허락하였거든요. 사실이 그렇지 않더라도, 법관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보기로 법률은 이미 허락한 거에요. 특히 법관은 어떤 표현물에 대한 음란성여부를 판단할 때, 행위자의 진술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외부에 나타난 행위의 형태와 행위의 상황 등 구체적인 사정을 기초로 하여 일반인이라면 당해 행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고려하면서 표현자의 그 심리상태를 추인하도록 되어 있어요. 법원에서 낙인 찍을 경우, 이계덕 기자님은 자신도 할 말이 있고 소송을 하면 된다는 취지로 말씀하셨는데, 법원의 판결은 소송의 대상도 아닙니다. 법관은 논쟁의 상대방이 아니라, 설득의 상대방이 되어야 해요. 법관을 설득해서 이해시키지 못하면, 소송에서 지는 겁니다. 물론 기자님 말씀처럼 기자님 일은 기자님이 알아서 할 일 맞는데.. 그 전에 기자님이 뭔가 오해하고 계신 점이 있지 않나 싶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다음 이계덕의 답변은 압권이었다. “ 일단 닥치면 생각해요ㅠㅠ 미리부터 생각하는건 복잡해요” 기사가 나간 후엔 그 기사에 대해 더 고민할 필요가 이계덕에겐 없는 듯했다. 그는 기레기였다.

한편으로 내 질문과 멘트가 좀 불편했는지, 이계덕은 트윗과 페북에서 나를 의식한 쪽글들을 하루종일 쏟아냈다.

“전 공부도 더 해야하고, 기본소양도 많이 부족해요. 그래서 남들같은 기자가 될래야 될수가 없어요. 그냥 내가 잘하는것, 내가 필요로 하는것, 누군가는 관심없어도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소식을 전하는 것, 그리고 내 기사를 원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 사람들을 위해서 일을 할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것이에요”

“지금 막 닥쳐있는 상황도 컨트롤하기 어려운 판국에 나중에 있는 일까지 지금 미리 생각하라? 그건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는 사람의 이야기죠.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재판만 54개에요. 현재 하고 있는걸 나중에 미뤄가면서 굳이 미리 생각해둘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난 님처럼 '학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류의 소양은 없거든요.”

“그냥 내가 옳다고 믿는 것에 올인해왔기에 앞으로도 그럴것이니까 님의 방식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도피'라고까치 표현하는것은 뭐랄까 '지식의 우월'하다는 자랑으로 밖에 들리지 않아서 그닥 탐탁치 않네요”

“그리고 난 님처럼 어떤 철학적인 메시지로 머리를 복잡하게 하려고 올린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생각했거든요. "팬티가 이쁘다" "입어보고 싶다" "내가 입은 것에 대해 다름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쁜 팬티를 입은 남자연예인이나 여자연예인이 멋있다" "노출은 누군가에게 허용되고 누군가에게는 금지된 것이 아니라 누구나에게 허용된 표현의 자유다" 이거에요.”

심지어 나를 똑똑한척 잘난척하는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글도 보였다.
“똑똑한척 하고 싶은 사람들은 똑똑한척 하는 사람들끼리 놀아라. 내 스스로 모자란거 뻔히 아는데 똑똑한사람들이 '넌 모자라' '넌 모자라' 이럴수록 기분만 더 나빠진다. 그냥 세상사에 대해서 슬플때 함께 울어주고, 기쁠때 함께 웃어주는 정도, ”


지금 쥐뿔도 모르면서 똑똑한 척 잘난척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러지 말라고 이러는 사람을 몰아가는 방식도 기레기다웠다. 그는 비열했다.

이계덕의 말처럼 옳다고 믿는 것에 올인하는 거? 좋다. 그런데, 이계덕의 문제는 그 옳다고 믿게 될 때까지의 과정은 완전 무시한다는 거다. 그래서 이계덕 군이 옳다고 믿는 순간, 이계덕의 맘 속에서는 이미 게임이 끝난 거다. 이계덕은 그 이후부터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해 의심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좋게 말하면 자존심이고 자신감인데, 나쁘게 말하면 기사에 똥 쌀 수밖에 없는 비극이 여기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기자로서 매우 심각한 장애다.

공부가 부족한 거? 기본 소양이 부족한 거? 문장력이 중2수준인거? 그럴 수도 있다. 내가 볼 땐 다 괜찮다. 차차 나아지겠지. 그런데, 자신이 옳다고 “믿어서 기사로 쓴” 것에 대해서 전혀 의심을 품지 않는 건 다르다. 독자 앞에서 “그건 생각해보지 않았고 닥치면 생각할 거고. 미리부터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기자로서 무책임한 일이다.

이계덕이 자신의 말처럼, 다른 기자들과는 “다른” 방식을 지향한다고 해도, 적어도 사람들은 “기자”라는 직함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한다. 그 기대를 염두해두면서 이계덕도 “기자”라는 직함을 사용할 것이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기자? 겉모습에 치중하지 않는 기자? 이론에 치중하지 않는 기자? 세상에 보도하는 사실을 그대로만 바라보지 않고 한번쯤 비틀어 의문을 제기해보는 기자? 있는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기자? 약자와 소수자의 입장에서 한번 더 생각하는 기자? 내 나이또래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기자? 누군가는 관심없어도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소식을 전하는 거? 그리고 자신의 기사를 원하는 독자를 위해서 일하는 거?

다 좋다. 그런데, 그걸 하려면, 불타는 가슴과 의지만으로 불가능하다. 자신의 철학과 고민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한번쯤 비틀어 의문을 제기하나? 절실한 소식을 잘 전하려면, 많은 독자들에게 신뢰를 주는 기자여야 한다. 그리고 기사에 대한 독자의 신뢰감은 기자의 뜨거운 가슴만으로 나오지 않는다. 차가운 머리가 필요한 이유다.

다른 기자들에 비해 공부가 부족하거나 기본 소양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기자가 일반인의 기준으로 봐도 무식한 건, 좀 고민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기자라면, 적어도 독자보다 무식하진 않아야 한다. 적어도 독자들보다는 많은 책을 읽고, 독자들보다는 많이 알아야 한다. 특히 자신이 기사를 통해 말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분노해야 할때 함께 분노하고, 싸워야할 때 함께 싸워주고 싶으면 활동가나 정치인이 되어야한다. 그건, 기자가 할 일이 아니다. 똑똑하건 무식하건 정치인은 누구나 할수 있다. 그런데 기자는 아니다.

기자가 똑똑한 척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무식해서는 곤란하다. 게다가 무식하면서 자기 생각은 어떠니 저러니 이런 말까지 기사에서 하고 있다. 그게 무슨 힘이 있겠나? 똑똑한 척 하고 싶은 사람들은 똑똑한 척 하는 사람들끼리 놀라고? 내가 똑똑한 척하는게 아니다. 똑똑한 척하는 기자에게 보통 사람 수준의 교양을 요구하는 거다. 적어도 기자한테는 그래도 된다.

얼마 전에 어떤 메이저 신문사에서 상반기 공채가 있었다. 자격 조건이 이렇다. “병X신이 아니거나 자신이 병X신인지 알아야 한다.” 홍세화 선생이 10년 전엔가 “너희들은 무식한 대학생”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대학생에게도 무식은 자랑이 아닐진대, 기자에게는 무식이 자랑이 아니라는 말은 더 말할 이유가 있는가?

“무릇 비평이란 반갑게 마련이다. 가령 소설을 냈을 때 비평이 따르는 게 소설가에게 행복이듯이, 칼럼도 마찬가지다. 기자가 쓴 칼럼에 쓴소리는 달게 들어 마땅하다. 새삼 말할 나위 없지만, 사실을 바탕으로 한 비평은 우리 사회에 빈곤한 토론의 활성화를 위해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 비평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을 때는 전혀 다가오지 않는다. 정반대로 사실을 왜곡해 내놓은 비난과 마주할 때는 무시하는 게 옳다.” 손석춘의 말이다. 그런데 이계덕에게는 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게다.

손석춘의 말처럼 비평을 감사하게 여기기에, 자기 자신에 대한 자폐적 맹신주의에서 비롯한 확증편향은 이계덕에게 너무나 강고하다. 사실에 근거하든 허위에 근거하든, 이계덕에게 비평은 불편하다. 이계덕이 자신에게 애정을 가지고 페북대화를 통해 비평해주려는 페친을 스토커 내지는 잘난척 종자로 몰아붙이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에게 내 멘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답변하자니 그것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자기 자신을 견디기 힘들었지. 결국 자기 페북에서의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던 그의 선택은 나에 대한 차단이었다. 하긴 그의 페북은 그의 개인 영역이니까..

그렇게 자폐적 자기 맹신에 빠진 확증편향 환자에게 동지적 연대감을 가지고 공개적인 비평을 자제하고 인내심을 발휘했던 나의 노력은 모두 허공으로 날라가 버렸다. 무엇보다도 무단으로 내 첨삭지도문을 자신의 기사를 대신에 올려놓은 무례함에 침묵하면서까지 연대감을 발휘했던 나에게 그의 졸렬함은 참으로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퉤.
 

2015년 1월 18일 일요일

왜 결혼을 안했냐고 물으신다면...




어떤 분이 물었습니다.

"혹시 독신으로 사시는 분 계시면
어떤 이유로 독신으로 사시는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단지 결혼으로 인한 구속적인 삶보단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결혼할 여자를 못 찾으셔서인지...
아니면 그 외의 이유때문인지...
결혼한 삶과 독신의 삶의 차이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글쎄요.
저는 결혼하신 분들에게 다시 질문합니다.
"왜 결혼하셨습니까?"

이유는 결혼한 사람들이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이
왜 혼자 사는지 밝힐 이유는 없지요.

결혼?

어떤 사람을 사랑한 나머지.
그 사람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데..
그 사람과 평생 함께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매우 슬프게도 결혼 밖에 없을 때..
결혼은 그럴 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고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안할 도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하신 여러분들은 그렇게 결혼하셨습니까?
아니면 그냥 일정한 나이가 되면.
당연히 추진해야 하는 제도로서의 결혼을
그냥 통과의례처럼 치르신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어떤 이유로 결혼하셨나요?
제가 더 궁금합니다.

나는 도대체 왜 태어났는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그 존재여부를 믿기 힘든 창조주가
이 땅에 나를 보내신 이유도
행복하게 살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나를 낳으신 부모님의 이유도
행복하게 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꼭 해야 행복해질 것 같다믄
뭐 해야죠!  결혼..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걸
잘 파악하셔야 합니다.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은게
결혼인지.. 아니면 사랑인지..
그것도 아니면 자신을 부양해줄 사람인지..

자기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헷갈려서..
결혼한 사람들 중에
좆된 사람 여럿 봤습니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당연히 추진해야 하는
제도로서의 결혼은
이미 저에게 낯설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대답이 잘 되었나요?

제가 결혼 안한 이유?
굳이 결혼할 이유를 못찾아서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든 그 이유를 찾아주시면,
저 또한 다시 한번 심사숙고해보겠습니다.

아! 사랑해서 결혼한다고요?
난 좀 웃깁니다.

그렇게 정말 사랑하면,
그냥 평생 살면서 사랑하면서 아이 낳고 살면되지.
왜 굳이 결혼을 하지요?

결혼은요,
사랑해서 한다기 보다는
불안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냥 그걸 맨입으로 믿고
사랑하기엔 불안한겁니다.

그래서 도장 꽝꽝 찍고
많은 사람들 증인으로 세워놓고..
식올리고, 사진 박고 그렇게 하는 거지요..

변할 수 밖에 없는 사랑이 두려워서
평생 못박고 싶어서
결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사랑 변하면,
배신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결혼의 보장성이
점점 더 흔들리고 있습니다.

20~30년 전만 해도, 이혼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한번 쳐다봤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혼하신 분들이 너무 많아서
이혼이 별일도 아닙니다.
이제는 결혼의 보장성?
웃긴 얘기입니다.

결혼의 보장성이 짧은 시간동안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죽을 때쯤의 결혼의 모습은
지금과 또 많이 달라져 있을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땐 아마 결혼하고 사는 사람들이
좀 특별하고 이상한 사람처럼
되어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긴 지금 우리가 믿어마지 않는 결혼.
이것도 굉장히 오래된 얘기같지만,
불과 100년도 안되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어디 감히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을 합니까? 망칙하게..
부모의 필요에 의해서
부모가 정해준 사람하고 결혼해온 것이
인류의 역사와 같이 합니다.

1950년대만 해도요.
자유연애라고 하면, 할아버지들이 펄쩍 뛰었습니다.
쌍것들이나 하는 걸로 알았습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
자신을 부양해줄 사람이 필요해서
또는 남의 시각 떄문에 결혼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결혼? 그건 인간이 만든 제도에 불과합니다.
제도의 덪이나 남의 시각에 갇혀 허비하기엔..
하나씪 밖에 없는 우리 인생이 너무 아깝습니다.
결혼을 통해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좀더 다르고 명확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2015년 1월 17일 토요일

사랑하는 교황님! 여기 이의 있습니다!

 
"폭력적인 대응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제 좋은 친구인 가스파리 박사가 저희 어머니를 욕한다면, 저한테 한대 맞을 각오를 해야 할 겁니다. 정상적인 거라고요. 도발하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을 모욕하면 안됩니다. 다른 종교를 조롱거리로 삼으면 안됩니다. 정말 많은 사람이 종교나 남의 종교에 대해 나쁘게 말하고, 조롱하며 놀립니다. 그들은 도발자들입니다. 모든 종교는 그 자체로 존엄합니다. 모든 종교는 삶과 인간을 존중합니다. "

사랑하는 교황님의 화술과 비유는 정말 지혜롭다. 그리고 놀랍다. 모두 옳은 말씀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교황님의 이 말씀은 실로 모든 사람들에게 권장할 만한 하다. 여기까지는 그러하다.  그러나, 교황님의 이 말씀과 이어지는 다음 말씀과의 인과관계를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종교와 관련한 표현의 자유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근본적인 권리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타인의 신앙을 모욕할 때는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어야 합니다."

당황스럽다. 올바른 삶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아름다운 도덕적 의무규범을 말씀하시다가 느닷없이 법과 인권에 대한 문제에 이르셨다. 남을 욕했다고 해서 법적으로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남을 욕했을 때 한대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가르침 사이에는 전혀 모순이 없다.  매우 슬프게도 사랑하는 교황님께서 도덕과 법, 종교와 인권을 구분하지 못하시는 게 아닌지 의심된다.

자유론과 아레오파지티카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 볼 때, 사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의는 종교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무엇이 우리를 진리로 이끌 것인가에 대한 역사의 해답이 바로 표현의 자유인 것이다. 옳든 그르든 자유롭게 떠들게 하는 것만이 우리를 진리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사랑스러운 교황님께서는 이 논의를 한순간에 200년 전으로 돌려놓으셨다. 오오오 하느님. 교황님을 돌보소서.

계속해서 교황님의 말씀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살인을 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살인하는 것은 부조리한 일입니다."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 역시 자기 종교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한다. 부조리하든 조리하든 매우 슬프게도 종교의 이름으로 살인을 하라고 가르치는 종교도 있기 때문이다.

조리와 부조리를 따지는 것은 원래부터 종교와 어울리지 않는다. 이미 교회 역시 이성의 영역을 떠나 종교의 영역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확증편향에 따라 이 영역을 공고히 해왔다. 그것은 그냥 어떤 사람들의 신념체계일 뿐이다. 종교 역시 옳고 그른 영역이 아니다.

이슬람 종교인들의 선택을 그들의 종교에 비추어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하다는 식으로 폄하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이 왜 그렇게 바보짓을 하는지 교황님도 그 심정 이해하시지 않는가? 이번 사건처럼 그들이 우리들의 인권을 위협하는 한도가 아니라면, 나 역시 이해 못할 일이 아니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가톨릭교회 역시 종교와 교리의 이름으로 살인을 자행했던 가장 지독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종교 중에 하나라는 것을 이제 와서, 그것을 혼자 반성하고, 이제와서 자신 종교의 잣대로 다른 종교를 평가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가? 이제 와서 어줍잖은 종교적 양시양비론은 얼마나 더  위험한가?

여기서 난 한국의  철학자 박구용의 말을 들려드리고 싶다. "도덕이 의무를 강조한다면, 법은 권리를 중시한다. 법은 구체적 행위만을 문제시함으로써 내면세계를 자유로운 권리 공간으로 허용하며, 법률로 금지하지 않는 행위는 비록 반도덕적이라고 할지라도 처벌하지 않으며, 범법자의 행위를 처벌할 뿐 그의 인격은 처벌 불가능한 권리로 인정한다. 법적 처벌은 범법자를 공동체로부터 유폐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가진 구성원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 때문에 다원성을 존중하는 현대사회에서 법은 도덕보다 약하지만 유일한 사회통합의 원천인 것이다."

인권도 그러하다. 인권은 침해자를 인류사회에서 유폐시키는 것이 아니다. 인격을 가진 인류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한다. 이 때문에 다원성을 존중하는 현대사회에서 법과 인권은 도덕과 종교보다 약하지만 유일한 인류사회 통합의 원천이다.

도덕 재판으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서 법 공동체 구성원들이 합의할 경우 도덕적 규범은 법 규범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러나 인권은 다르다. 인권은 누군가의 합의 여부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종교와 같은 남의 체계텍스트를 욕했다고 해서 법적으로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표현의 자유는 치열한 논의 속에서 역사적으로 확립된 인권에 속한다. 단순히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한순간에 몰각할 수 없는 법이다.

사랑하는 교황님께서는 지난 방한 직후 이렇게 말씀하신바 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니 떼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해서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답했습니다. 내 위로의 말이 죽은 이들에게 새 생명을 줄 순 없지만,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면서 우리는 연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서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

그리고 지금 얻어맞을 각오를 하고, 자신의 자유를 실현한 언론인 12명이 사망했다. 11명은 중상을 입었는데, 이 중 4명은 심각한 상태다. 그들의 종교는 "자유"였다. 그들의 종교 역시 그 자체로 존엄하다. 그들의 종교 역시 삶과 인간을 존중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라는 자신의 신앙 때문에 순교했다. 지금 그들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선언하며 양시양비론을 펼치는 교황님께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

"종교와 관련한 표현의 자유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근본적인 권리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타인의 신앙을 모욕할 때는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어야 합니다" 교황님의 이 말씀을 교황님께 다시 돌려드린다. 그리고 나의 신앙을 고백한다. Je suis Charlie. 나 역시 샤를리다,

내가 교황님이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차라리 니체의 말을 인용하시는 편이 나았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2015년 1월 16일 금요일

구치소는 교도소가 아니다! 조현아, 황선, 홍가혜의 구속을 바라보는 우리가 잊고 있는 점


'땅콩 리턴'으로 구속된 조현아 부사장의 구치소 생활을 두고 세간의 관심이 많다. 워낙 국민적 공분을 샀던 사건인 탓이다. 한편으로는 구치소 신세를 지게 된 '공주님'의 모습을 통쾌하게 여긴다. 다른 한편으로는 보통 사람과 다를 지도 모를 '공주님'의 구치소생활을 의심한다. '공주님'의 감옥살이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은 복잡하다.

그러나, 통쾌함이나 법의 공평함을 잠시 접어두자. 그리고 구치소라는 곳에 대해 한번 바라보자. 구치소는 어떤 곳인가? 물론 법적으로는 교도소와 같다. "교정시설"로 구분된다. 그런데 구치소는 과연 정말 "교정시설"일까? "수용자들의 권익보호와 교정교육, 직업훈련 등 사회적응 능력의 배양을 통하여 건전한 사회복귀를 도모하고자 설치 운영하는 시설" 구치소가 과연 그러한 곳인가?

"구치소가 교정시설"이라는 말 속에는 미결수에 대한 무죄추정원칙을 무시한 전제가 내포되어 있다. 유죄가 확정되지도 않은 사람에게 무슨 교정교육을 하나? 구치소는 벌을 주는 곳이 아니다. 범죄를 저질렀다고 의심되는 사람을 재판 전에 구속하여 가둬두는 곳일 뿐이다. 단지 도주와 증거인멸을 막기 위한 것이다.


사진은 천안개방교도소. 우리 구치소를 이 수준으로 만들지는 못할까? 


그렇다면, 구치소는 오로지 이 목적을 위해서만 최소한으로 인권을 침해할 수 있게 설계되어야 한다. 구속수감의 목적을 넘어선 불필요한 침해가 있다면 방지하고 개선해야 한다. 미결수로서 무죄추정을 받은 시민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품위를 지켜주어야 한다.


사진은 천안개방교도소. 우리 구치소를 이 수준으로 만들지는 못할까?


만약 수용자가 비용을 추가로 지불한다면, 구치소를 호텔처럼 만들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구금되었던 자가 무죄선고를 받을 때의 형사보상이나, 유죄선고시의 구금일수 산입 등에 대해도 정교한 고민이 필요하다.

잘 안다. 갑중의 갑. 갑질 공주의 구치소행이 우리들을 얼마나 통쾌하게 하는지. 그러나 갑질 공주 한 사람을 구치소에서 보냈다고 해서, 그 공평함에 안도할 바보도 있는가? 훨씬 더 많은 을들이 구치소에 갇혀 정말로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점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엊그제 수감된 황선을 생각한다. 국가에 의해 누명을 쓰고 100일 동안 수감되었던 홍가혜를 생각한다. 갑질공주님 구치소생활을 통쾌하게 생각하게 전에, 갑질 공주의 구치소행을 모든 미결수들의 침해받는 권익에 대한 개선을 모색해는데 이용할 방법은 없나 고민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제도 자체에 대한 고민을 접어둔채, 오로지 공평함에만 집착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전국민 징병제나 구치소가 다를바 없다.

물론 그 전에 우리 마음 속에 명토받아 구별해야 할 점은 이 것이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구금은 구치소에서 형벌은 교도소에서! 구치소는 형벌의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2015년 1월 14일 수요일

성매매 처벌에 대해 위헌이 의심되는 이유.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을 생각하시는 어떤 분들 중에는
성을 파는 여성을 처벌하지 않고
성을 사는 남성만 처벌하는 건 어떠냐고
주장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아마 성을 사는 남성은
믿을만한 중계자를 통해
더 안전한 성구매를 모색할 겁니다.

그렇다면, 성매매녀들은
지금보다 더 심한 인권침해에
시달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최선은
성을 파는 일과 성을 사는 일을 비범죄화하고
광고자, 알선자, 장소임대자를 처벌하는 것입니다.

남자들끼리 술자리 후에 몰려서 가곤하는
한국의 성매매 문화에서는
이게 성매매 억제를 위해
더 유효하고 적절한 방법입니다.

우리나라 남성들이 집단적으로 성매수를 하는 건
어떤 일탈을 공유함으로써
인간관계를 더 공고히 해보자는
비뚤어진 사회성도 한몫하거든요?

그런데, 상상해보세요.
알선자가 없어진다면,
접대나 단합용 성매매를 하기 위해

누군가가 직접 성매매녀를
한 사람 한 사람 섭외한 후에
한 자리에 모아야 한다는 얘기인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중계자만 처벌하는 상황에서는
성을 파는 여성이
인권침해상황에 놓인 것을 발견했을 때
성을 사는 남성이

침묵의 카르텔 안에 갇히지 않고..
당당히 신고해서

피해자를 구조하기 좋은 상황이라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논리는 마약에도 비슷하게 적용됩니다.
투약자나 사는 사람은 처벌하지 않고

중계하는 사람만 처벌한다면,
마약근절에 더 도움이 되지요.



범죄조직은 지금도 엄청나게 엄벌하고 있습니다.
수괴는 아마 사형까지도 가능할걸요?
엄벌이 없어서 범죄조직이 생기는 게 아니라,
이익이 있으니까 범죄조직이 생기는 겁니다.

금주시대에 밀주산업이
범죄조직을 양산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주세요.

무분별한 법적 금지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죠.
당연히 범죄조직이 그 일에
눈독을 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이익을 없앤다면 어떨까요?
네덜란드처럼 치료를 조건으로 마약환자들에게
국가가 마약을 공급해준다고 칩시다.
마약값이 떨어지겠죠?
그렇다면 굳이 범죄조직이
마약유통에 손을 댈 이유가
없어지는 겁니다.

성매매에 대해
범죄조직이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요,
성매매가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불법인 성매매를 행하는 여성에게는
경찰이 아닌 사적인 보호자가 필요한 법이고..
범죄조직이 이것을 지나칠 리 없습니다.
자신들의 역할이 필요한데다가
돈이 되니까요.




무엇보다도
매도자, 매수자, 중계인을
모두 처벌하는 현행법은
당사자들을 침묵의 카르텔 속에
가둬넣기 때문에..
단속을 어렵게 하고..
성매매를 근절하고자 하는 자신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위헌적 요소가 있습니다.

국가가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서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매매의 경우, 처벌로는
그 처벌의 목적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매매를 근절하는데 처벌이 도움이 안되니까요.

목적을 이루는데 도움이 안되는 처벌이라면
불필요한 처벌입니다.
성매매처벌에 대해
위헌이 의심되는 이유입니다.



요즘은 성매매 합법화라는 말 대신에
성매매 비범죄화 decriminalisation 라는 말이
대안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매매 합법화라는 말은
성매매에 대해
마치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 같은
오해를 야기하죠.

반면, 성매매비범죄화라는 표현은
성매매에 대한 평가나 판단을 유보하되,
다만,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것을
오해없이 전달하는데
더 도움이 됩니다.

 

2015년 1월 11일 일요일

입주자대표회의.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수 있을까?





회의중 동대표가 다른 동대표에게
자신이 나이를 언급하며,
삶의 태도에 대해서 훈계질을 하고,

의장은 나에게 발언기회를
가급적 주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의장의 허락을 얻어 발언을 하면
기어코 끼어들어서
발언을 끝까지 못마치게 방해하고..
그러한 말도 안되는
폭력적인 회의 분위기에서,,

결국 소장 해임안은 부결..
확정되지도 않은 예산안은
소장 마음대로 가결되었다.

경비원 임금 미지급분을 지급하고
소장에게 구상권을 청구하자는 안은
가결 직전까지 갔다.

회의 중 퇴장한 무책임한
소장 비호 동대표들 덕분이었다.

그러나 가결 직전 소장이 회장에게
회의종료를 선포하라고 종용하는 가운데,

회장이 딸랑딸랑 그 말을
충실히 따르면서 역시 가결 무산.

상정한 나머지 나의 두 안건은
논의와 표결도 해보지 못한 채, 무산

폭력으로 얼룩진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사태가 떠올랐다.

소장이 조정하는 회장에 의해
규약이 동대표에게 허락한
소중한 의안 상정권도
형해화된 개판이었다.

나를 입대의에 보내주신 54세대의 뜻이
과연 소장의 무능과 부패에 침묵하여
사이좋게 지내라는 뜻이었을까?

나를 입대의에 보내주신 54세대 앞에
입주자대표회의 이사로서의 책임을 지키는 것이
매우 버겁다. 절망적인 밤이었다.

 

2015년 1월 10일 토요일

무죄판결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홍가혜 마녀사냥. 무죄선고 보도가 점입가경, 아전인수



홍가혜는 범죄의 내용이 소명되었다고 판단되어 법원이 구속시킨 피의자였다. 그 결과 100일 동안이나 구속수사를 받아야만 했다. 그런 그녀가 무죄를 받았다. 홍가혜의 1심 무죄선고가 중요한 뉴스인 이유다.

그렇다면, 그녀가 애초부터 왜 구속상태에서 재판을 받아야만 했는지, 구속의 상당성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게 제대로된 언론의 자세다.

그런데, 어제 무죄선고를 받은 홍가혜에 대한 언론보도를 살펴보자. 가관이다. 홍가혜에 대한 구속기소의 상당성을 의심하기 보다는 “홍씨의 행동을 정당화 하거나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적절치 못한 측면이 많았고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의 태도는 위험했다”면서 자중을 당부한 법원의 권고를 강조했다. 심지어 이러한 법원의 권고를 제목으로 뽑기 까지 했다.

압권은 홍가혜에 대한 소설적 모함으로 마녀사냥을 주도했던 스포츠월드. 스포츠월드는 "홍가혜 무죄선고 소식에 누리꾼 반응 '각양각색'"이라는 제목 하에 "세월호 참사현장에서 민간잠수사로 논란을 일으켰던 홍가혜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자 누리꾼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며, 홍가혜의 무죄선고에 대해 황당하다거나 의아하다는 반응만을 소개하는 아전인수격의 뻔뻔한 작태를 보이고 있다.  다른 언론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한편 홍에 대한 마녀사냥의 빌미가 되었던 모함을 아직도 되풀이하는 용감한 언론도 보인다. 한국일보계열의 언론사들이다.  데일리 한국은 "홍가혜 무죄 선고, 기자라고 속이고 아이돌과 사진을? 황당"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홍가혜가 무죄를 선고받은 가운데 과거 기자를 사칭한 사건이 눈길을 끌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런가 하면, 스포츠한국은 "홍가혜, 과거 행적 화제 … 누구냐 넌"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또한 과거 '걸그룹 티아라의 전 멤버 화영의 친척이다', '유명 야구 선수들과 만남을 가졌다', '모 선수의 아이를 임신했다' 등 수많은 거짓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는 둥, 이미 법정에서 관계자들에 의해 거짓임이 밝혀진 내용을 되풀이 하고 있다. 이 정도면, 명예훼손의 혐의를 피하기 힘들 듯 보인다.

지난 8월 B1a4의 소속사 WM엔터테인먼트에서 실장으로 근무하는 박모씨는 "홍가혜가 아는 지인의 일행으로 부산에서 열린 B1A4콘서트에 초대되어 공연을 보러 왔으며, B1A4멤버들과 사진을 찍게 된 것은 연예부 기자를 사칭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멤버들과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한 것에 따른 것"이라는 내용의 사실확인서를 법원에 제출한 바 있다.







헤럴드팝 : 홍가혜 무죄 선고, 과거 방송 출연 모습 보니…
http://pop.heraldcorp.com/view.php?ud=201501092332534114546_1

헤럴드팝 : 홍가혜 무죄 선고, '법원 해경 명예훼손 어렵지만...'
http://pop.heraldcorp.com/view.php?ud=201501092359094427058_1

헤럴드팝 : 홍가혜 무죄 선고, ‘면죄부는 아니야…’
http://pop.heraldcorp.com/view.php?ud=201501100015224658917_1

헤럴드팝 : 홍가혜 무죄 선고, 판결문 보니…
http://pop.heraldcorp.com/view.php?ud=201501100022164697317_1

헤럴드팝 : 홍가혜 무죄 선고, '명예훼손급은 아냐'
http://pop.heraldcorp.com/view.php?ud=201501100247025421227_1

헤럴드팝 : 홍가혜 무죄 선고 "'허위사실+명예훼손' 판단 어려워..."
http://pop.heraldcorp.com/view.php?ud=201501100927156836527_1


스포츠월드 : '단원고 눈물의 졸업식' 홍가혜 무죄 선고… 과거 유족 불구속 탄원서 제출한 이유는?
http://www.sportsworldi.com/content/html/2015/01/10/20150110000018.html

스포츠월드 : 홍가혜 무죄 선고… 法 "피고인 태도 위험했다"
http://www.sportsworldi.com/content/html/2015/01/09/20150109004042.html

스포츠월드 : 홍가혜 무죄 선고… "구조작업 적극적 임해야 한다는 취지"
http://www.sportsworldi.com/content/html/2015/01/09/20150109004056.html

스포츠월드 : 홍가혜, 무죄 선고 '해경 명예 훼손했다' 보기 어려워
http://www.sportsworldi.com/content/html/2015/01/10/20150110000014.html

스포츠월드 : 홍가혜 무죄선고 소식에 누리꾼 반응 '각양각색'
http://www.sportsworldi.com/content/html/2015/01/10/20150110000086.html


MBN : 홍가혜 무죄 선고, 재판부 “이번 판결 피고인 행동에 면죄부 주는 것 아냐”
http://star.mbn.co.kr/view.php?no=30040&year=2015

MBN : 홍가혜 무죄 선고, 재판부 “해경 명예 훼손했다고 보기 어려워”
http://star.mbn.co.kr/view.php?no=30110&year=2015

MBN : 홍가혜 무죄 선고, 재판부 “구조작업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취지…허위사실 인식 어렵다”
http://star.mbn.co.kr/view.php?no=30350&year=2015

한국경제TV : 홍가혜 무죄 선고, 재판부 "허위사실 및 명예 훼손했다고 보기 어렵다"
http://reviewstar.wowtv.co.kr/Article/ArticleView.php?WEB_GSNO=10231301

한국경제TV : 홍가혜 무죄 선고 "구조작업을 적극적으로 임하라는 취지"
http://reviewstar.wowtv.co.kr/Article/ArticleView.php?WEB_GSNO=10231317

한국경제TV : 홍가혜 무죄 선고 하루전 SNS에 "그땐 참 호기로웠는데..."
http://sports.wowtv.co.kr/news/view.asp?newsid=WS00000012498

서울경제 : 홍가혜 무죄 선고, "구조작업의 실체적 모습 알리려"라면서 "행동에 면죄부 준 거 아냐"
http://economy.hankooki.com/lpage/society/201501/e2015010923593193780.htm

파이낸셜뉴스  : 홍가혜 무죄, 명예훼손 혐의에 재판부 “허위사실 인식 어렵다”
http://www.fnnews.com/news/201501100711034839

파이낸셜뉴스  : 홍가혜 무죄, 재판부“판결이 피고인의 행동 정당화는 아니다”
http://www.fnnews.com/news/201501100828088297

파이낸셜뉴스  : 홍가혜 무죄, 명예훼손 혐의 기소 무죄 ‘판결 이유는?’
http://www.fnnews.com/news/201501100926452474

에너지경제 : '세월호 거짓 인터뷰' 홍가혜 무죄 선고, 왜?
http://www.ekn.kr/news/article.html?no=117430

아시아경제 : 홍가혜, 거짓방송·해경 명예훼손에도 '무죄' 선고받은 이유 알아보니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5010921405793544

중앙일보 : 홍가혜 무죄 선고…그러나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냐"
http://joongang.joins.com/article/aid/2015/01/10/16466684.html

한국경제  : 홍가혜 무죄 선고, 목포지원 "해경 명예훼손 볼 수 없다"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5011041087

아시아투데이 : 홍가혜 무죄 선고 앞서 심경 고백 "실패는 원래 다시 하는거랬어"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110000548279

경제투데이 : 홍가혜 무죄 선고, “카카오스토리 내용은 구조작업에 대한 의지”
http://www.eto.co.kr/news/outview.asp?Code=20150110090302267&ts=94814

스포츠투데이 : '거짓 인터뷰' 홍가혜 무죄 선고, 명예훼손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는?
http://stoo.asiae.co.kr/news/naver_view.htm?idxno=2015011007321565011

스포츠조선 : '세월호 잠수부 사칭' 홍가혜, 무죄 선고…"구조 적극적으로 임해야한다는 취지일 뿐"
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501110100112850006675&servicedate=20150110

데일리한국  : 홍가혜 무죄 선고, 기자라고 속이고 아이돌과 사진을? 황당
http://daily.hankooki.com/lpage/society/201501/dh20150110093251137780.htm

스포츠한국  : 홍가혜, 과거 행적 화제 … 누구냐 넌
http://sports.hankooki.com/lpage/sisa/201501/sp20150109175355137080.htm

2015년 1월 9일 금요일

홍가혜 무죄 선고 기념으로



홍가혜 무죄 선고 기념으로 그 동안 제가 직접 인터뷰하고 만났던 홍가혜에 대한 저의 글들을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http://BL0G.kr/184   
2014/09/09 연극성 인격장애, 허언증 환자로 알려진 홍가혜의 실체. (7)

http://BL0G.kr/185   
2014/09/10 내가 김용호의 정체를 공개한 이유 (6)

http://BL0G.kr/186   
2014/09/10 기레기 김용호의 취재원비닉권과 저널리스트의 언론윤리

http://BL0G.kr/188   
2014/09/12 홍가혜를 마녀로 만들어 100일 넘게 감옥에 가둔 문제의 인터뷰. 과연 어떤 내용? (1)

http://BL0G.kr/201   
2014/12/03 [심층인터뷰] 국가적 마녀사냥 피해자 홍가혜를 만나다 1 (24)

http://BL0G.kr/204   
2014/12/16 [라디오특집] 홍가혜를 만나다. 3분16초짜리 예고편 (3)

http://BL0G.kr/206   
2014/12/20 [홍가혜인터뷰후기]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관계 (5)

http://youtu.be/giG6YsZmH-E
2014/12/22 [라디오특집] 마녀사냥피해자 홍가혜를 만나다! (58분35초) (1)

http://BL0G.kr/210   
2014/12/28 똘레랑의 홍가혜 인터뷰글. vs 한겨레 허재현 기자의 홍가혜 기사 (3)

http://BL0G.kr/213   
2014/12/31 진중권에 대한 홍가혜의 분노의 용춤 (3)

http://BL0G.kr/214   
2015/01/01 드라마 피노키오 "동네 개 이야기"

  

2015년 1월 6일 화요일

세월호 그 날 이후, 여덟달 째 매일 같은 내용이 적혀있는 아파트 작업일보



아파트의 기계실점검일지와 작업일보를 검사했다. 그러다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매일 똑같은 내용이 적혀있는 것이었다. "벤츄레라 교체요망", "지하저수조 점검구 잠금장치 파손" 무려 여덟달 동안,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벤츄레라가 뭘까? 지하저수조는 도대체 뭘까? 설비주임은 왜 이것을 매일 똑같이 적어서 소장의 결재를 받는 걸까?

설비주임을 불러올렸다. 이유를 물었다. 그 이유는 세월호 사건에 있었다. 그 전부터 설비주임은 우리 아파트에서 보수가 필요한 내용 가운데, 안전과 관련되어 있었던 내용들에 대해 관리소장에게 보고했었단다. 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관리소장은 거기에 들은 둥 만둥 했었던 모양.

그런던 차에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을 목격한 설비주임님은 정신이 번쩍 드셨다고 했다. 지하 저수조 잠금장치가 파손된 경우, 누가 나쁜 맘을 먹으면, 우리 입주자들이 먹는 식수에 끔찍한 장난을 칠수도 있단다. 사고가 나면 책임 소재라도 가려놔야겠다는 다급한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받아들여지든 말든 일지에 같은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러던 것이 벌써 여덟 달째라는 것이다. 살펴보니, 같은 내용이 적히기 시작한 것이 정말로 4월 17일부터였다.


벤추레라? 옥상 환풍을 위한 프로펠라를 말하는 거란다. 그런데, 이게 언제부터인가 소리가 나서 주민들의 민원이 있었단다. 구리스를 발라도 해결되지 않자, 소장의 지시에 따라 벤추레라를 묶어놨다고 했다. 벤추레라가 돌아가지 않으면, 환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화장실에서 피우는 담배연기 등이 실내로 확산될 수도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소장은 자신이 벤추레라를 묶어놓으라고 지시한 기억은 없다고 발뺌했다.

100만원 이하의 지출은 관리소장 전결사항. 입대의에 보고할 필요도 없었다. 입대의회장의 싸인만 받으면 바로 집행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관리소장의 말인 즉, 당시 입대의회장이 승인해주지 않을 것으로 지레 예단하고, 입주자대표회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셨단다. 자신은 보고하지도 않은 주제에, 입대의회장 탓을 하고 있다.

불과 몇 만원도 들지 않는 일들이었다. 매달 나를 볼 때마다 달려와, 입대의의결이 필요한 공사에 대해 설명하던 소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돈이 되지 않는 아파트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은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도대체 이 소장은 우리 아파트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던 걸까?

도대체 세월호 사건이 터지지 않았으면, 이런 내용조차 알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까마득해졌다.
   

2015년 1월 4일 일요일

관리사무소장 해임의 건


1. 의결주문

현 관리소장인 @@@을 해임한다.

2. 제안이유

가. 우리 아파트 관리소장인 @@@은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우리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의 회의록과 회의공지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관리소장 본인의 입장과 편리를 위해 그 내용이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거나 변질시키는 정황이 들어나,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을 막음과 동시에 추후에 제대로 된 회의록과 회의공지문작성을 위한 방편으로 입주자대표회의 전체 내용에 대한 녹취를 전 입주자대표회장과 본 이사가 위 관리소장에게 요구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위 관리소장은 앞으로 모든 회의에 대한 녹음을 실시하겠다고 약속을 하였음에도 실제로는 한 번도 이를 시행한 바 없으며 본 이사가 이를 수차례 주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2014년 마지막 입주자대표회의까지 한번도 녹음 없이 회의를 기록하고 본인의 생각대로 회의록과 회의공지문을 작성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의결내용을 좀 더 정확하게 적시하라는 본 이사의 요구에 대해, “주민들에게 너무 자세하게 알려주면 골치가 아프다”는 등의 발언으로 입주자대표회의 내용에 대해 정확히 알 권리가 있는 입주자분들의 권리를 묵살한 바 있습니다.

나. 2014년 여름. 각동 22층과 21층 몇몇 세대에서 우수관이 막혀 집안이 범람하는 사고가 수차례 발생하였는데, 그 후, 위 관리소장은 이러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면서도 마치 필요한 조치를 취한 것처럼 입주자대표회의를 기망한 바 있을 뿐만 아니라, 추후, 다른 세대에서 같은 이유로 같은 사고가 재차 발생하여, 자신의 발언이 거짓임이 밝혀지자, 이를 적발한 본 이사에게 전화하여 이러한 사실을 입대의에서 밝히지 말아달라는 취지로 회유를 시도하고, 그 후, 입대의가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고 재차 지시하면서 이를 각 세대의 서명을 받아 이를 입증하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입대의에 이 입증자료를 제출하지 아니한 상태입니다.

다. 2014년 가을 지역난방관리공사가 우리 아파트 화단을 파헤쳐서 난방파이프를 공사하는 과정에서, 우리 아파트가 새로 시공한 새 보도블록이 파괴되었는데, 위 관리소장은 지역난방공사로 하여금, 이를 보수하게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기한을 정해 보수를 최고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시에는 우리 아파트가 직접 공사하여 그 대금을 청구하겠다”는 취지의 내용증명을 보내라는 본 이사의 요구를 면전에서 큰소리로 묵살하고, 추후 11월 말까지는 자신이 책임지고 지역난방공사로 하여금 보수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여놓고서도, 지역난방공사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고 그 결과 아직까지도 보수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라. 위 관리소장은 2014년 12월11일 입대의를 대신하여 주민들을 대상으로 소독업체 설문평가를 실시함에 있어서. 이 설문평가가 소독업체 계약연장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소독업체의 서비스에 대한 평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이 평가가 소독업체의 서비스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소독방식의 변화에 따른 선호도조사인 것처럼 공지하여 주민들을 기망하는 방법으로 이 설문조사를 방해한 바도 있습니다.

마, 뿐만 아니라 2014년 말 새로 선출된 당선자들의 전화번호를 다른 당선자에게 안내하는 과정에서 몇 개의 숫자를 바꾸어 안내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도저히 실수라고만 보기 어려운 사정이 있고, 새로 선출된 당선자들이 자신이 없는 장소에서 서로 소통하는 것을 방해하여 자신이 새로 구성된 입주자대표회의를 좌지우지해볼 의도가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위와 같은 사정을 종합해볼 때, 우리아파트 입대의와 위 관리소장과 사이의 신뢰관계가 사회통념상 근로관계 또는 위임관계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고 봄이 상당합니다. 이는 해고 또는 해임을 위한 정당한 사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체 없이 이에 대한 위 소장의 소명을 청취하신 후, 해임을 의결하여주실 것을 구하는 바입니다.

3. 주요내용

현 관리소장인 @@@을 해임을 의결하고, 해고를 예고함과 동시에, 신규관리소장 모집공고를 내어 새로운 관리소장을 선임하자는 것입니다.

4. 비용추계서

해당사항 없음

5. 참고사항

주택법시행령 제51조 (입주자대표회의의 의결사항 등) 4호. 자치관리를 하는 경우 자치관리기구 직원의 임면에 관한 사항

2015년 1월 2일 금요일

담배값 인상에 따른 강제 금연. 이렇게 하시면 성공확률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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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흡연자분들이 담배 사시면서 같이 납부해오신 돈이 있습니다. 건강진흥기금이었나? 그렇게 모여진 돈이 꽤 됩니다. 그 돈 가지고 나라에서 오래전부터 하던 사업이 있습니다.

보건소에 가셔서 당당하게 금연프로그램에 참여하세요. 모든 비용을 그 기금이 부담합니다. 보통 6개월 프로그램인데, 처음 6주 동안은 매주 한번 보건소에 가야 합니다.

그러면, 패치도 주고, 니코틴 껌도 주고, 침도 놔주고, 예쁜 간호사 아줌마가 심심할 때마다 전화도 해줍니다.

니코틴껌이나 패치? 약국에서 돈 주고 사시려면 만만치 않게 비싼데요. 흡연욕구를 줄이시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냥 쌩으로 끊으시면 성공률이 10%도 안되지만, 껌이나 패치를 사용하시면 금연성공률이 30% 정도 된다고 하네요?

아! 그리고 한장 더 붙이시고 이러시면.. 간이 못 견딜 수도 있어요. 메슥거리고 식은 땀이 나고.. 이것은 간이 힘들다고 비명을 지르는 겁니다. 그렇게될 때까지 붙이시는 건 좋지 않지만, 만약 그 지경에 이르시면, 즉시 패치를 떼십시오. 그리고 가까운 약국으로 달려가셔서 앰플로 된 간해독제가 있으니 이용하세요.

금연을 위해서 물을 조금씩 자주 마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흡연욕구를 야기할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맵고 짠 음식을 먹으면, 담배 생각나지요? 그런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시고, 심심하게 드시고요. 술 드실 때 담배생각 나시죠? 당분간은 음주도 자제를 하셔야 합니다. 어떤 분은 커피를 드실 떄 무조건 담배를 피우셔야 하는 분이 있는데, 그런 분들은 커피도 당분간은 자제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화장실에서의 흡연욕구와 식후땡 욕구, 음주시 흡연욕구에만 좀더 신경쓰시면, 꼭 성공하시리라 믿습니다. 화이팅
  

2015년 1월 1일 목요일

드라마 피노키오 "동네 개 이야기"




"진짜 닮았네. 13년 전이랑. 그때도 이랬던 것 같다. 다들 화재원인을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너네 아버지 얘기가 튀어나왔어. 지금 저 찬수처럼."

"그래서 이렇게 말이 안되는 얘기에 사람들이 홀리던가요? 캡도 그러셨어요?"



"미안하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 때는 그게 맞는 줄 알았어. 원래 개가 짖으면, 동네 개들도 따라 짖거든. 이유도 모르고. 지금보니까 알겠네. 내가 동네 개였다는 걸. "



김용호라는 개가 짖으니까 따라짖는 동네개들. 아직도 그런 동네개들이 보이는 걸 보면, 김용호가 이해도 된다. 잠깐의 부끄러움만 접으면 효과가 너무 확실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