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국민 사이에 참회와 용서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나라가 있다. 바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소수의 백인이 다수의 흑인을 폭력으로 다스렸던 남아공은 1948년부터 법으로 인종차별 정책을 펼쳐 왔었다.
그런데 96년 8월 20일, 흑인들의 인권을 처참하게 유린했던 백인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인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는 46년 간에 걸쳐 백인정권이 자행한 만행들을 솔직하게 인정한 뒤 사죄를 했다.
그
는 흑인 대통령 만델라 정부가 만든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서 "나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면서 이 자리에 섰다." "과거에 저질러진
수많은 잘못들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참회할 준비가 돼 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라고 공개적으로 사죄했다. 이어서 그는 백인 정권의 범죄 행위들을 기록한 29쪽 분량의 보고서도 함께 제출했다. 그리하여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서 철저한 진상규명과 범죄자의 진정한 사죄로 흑인과 백인 사이에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독재자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숱한 부정과 부패를 저질렀으며
국민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고통과 한을 남겼다. 그 죄로 전두환, 노태우는 법의 판결을 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참회가 없었다. 법정은 참회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그들이 벌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이루어진 적이 없다. 그들이 참회를 하지 않으니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4·19 민주화를 군화발로 짓밟은 독재자
박정희의 딸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의 대표가 되어 명동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하고, 개신교의 영락교회에서 참회 예배를 보고, 불교의
조계사에서 108배를 했다. 순수하고 거룩해야 할 고해성사와 종교행위가 정치적 쇼로 바뀐 것이다. 독재자의
딸이 독재자였던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참회의 쇼를 통해 사회의 지도자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회가 비정상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총칼로 민주주의를 짓밟았고 그 딸은 다수라는 숫자의 힘으로 국민의 뜻을 뭉개버렸다. 외국 언론은 이번 탄핵을
'헌법적 쿠테타'라고 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금세기의 대표적인 죄는 죄에 대한 감각의 상실에 있다' 또한 '어떤 의미로든지 병들고 변질된
사회는 흔히 홍보수단의 부추김까지 받아 죄에 대한 감각을 차츰 상실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고 했다(화해와 참회 18항).
그렇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친일 극우 신문들은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를 찬양하는 소리를 수십 년 동안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친일파들이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재자가 존경받으며 독재자의 딸이 사죄와
참회의 쇼를 벌이며 뻔뻔하게도 사회의 지도자로 나설 수 있는 것이다.
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지 않았다면 감히 그럴 수 없다. 정치는 쇼로 통할지 모르나 참회는 쇼로 되는 것이 아니다(루가
18,9-13). 세례자 요한은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이라고 하지 않았던가?(마태 3,8). 초등학생 수준의 윤리와 정의만
있어도 감히 쿠테타를 선동하지 못할 것이며 독재자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소리를 입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그 신적 창설자의 구속 사업을 이어서 수행하는 만큼, 사람의 마음 속에 회개와 참회의 정을 일으키는 일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속한다'(화해와 참회 23항).
따라서 교회는 정의와 평화를 갈망하며 촛불을 든 사람들을 격려하면서, 동시에 지난 50여 년 동안 총칼을 앞세워 부정과 불의로 이 나라를 지배해 왔던 독재자들과 그 추종자들로 하여금 참회의 길로 나오도록 촉구해야 마땅할 것이다.
남아공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용서와 화해의 기쁨을 보고 싶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