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4일 수요일

"왜"라는 질문을 다시 돌려주기

 
 
인권에 대한 논쟁중 상당부분은 입증책임만 바꿔줌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왜"라고 질문을 던지는 상대방에게  "왜"라는 질문을 다시 돌려주는 거다.

예를 들어 왜 사형을 폐지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에게는 왜 사형이 필요하냐고 되묻는 거다. 왜 수갑을 가려주냐고 묻는 사람에게는 왜 수갑을 보여줘야 하냐고 되물으면 된다.

사형을 폐지해야 하는 인권적인 이유는 사형이 불필요하기 때문이고, 수갑을 가려줘야 하는 인권적인 이유는 수갑을 보여주는 것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절대적인권, 상대적인권.절대적 인권은 고문당하지않을 권리처럼 어느 순간에도 어떤 이유로도 인간에게는 박탈할 수 없는 인권이라 할 수 있겠고, 상대적 인권은 필요한 경우에 한해, 제한할 수 있는 인권을 이른다.

그런데 만약 필요하지 않은데도 제한되거나. 그보다 적은 불이익으로도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사람의 그 권리를 제한하는 방법으로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면, 우리 헌법은 그걸 권리에 대한 제한이 아니라 기본권에 대한 침해라고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37조 제2항 속의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라는 문언이 내포하고 있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인권과 기본권


1. 인권 vs 기본권

좀 어려울 수 있겠는데, 오늘은 인권과 기본권의 차이를 알아보도록 하자. 얼마 전에 유시민이 차이나는클라스에 출연해서 국가와 정부의 차이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런 비유가 가능한지 모르겠어요. 국가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것은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거에요. 상상속에서. 우리가 자아를 가지고 있잖아요? 우리 몸을 다 해부해도 자아가 없어요. 분명히 인격 자아 이런 것이 있는데, 우리 몸 어디를 해부해도 인격이나 자아 같은 건 없어요. 인권? 없어요. 인권이 눈에 보이냐요? 손에 잡히나요? 우리가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물질적으로는 없는 거에요. 사람들이 믿기 때문에 있는 거에요. 국가도 그래요. 국가도 어디가서 곡갱으로 땅을 파봐도 국가가 안나와요. 국가는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거에요. 실제로 존재하는 건 영토가 존재하고 국민이고, 군대 경찰이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국가는 우리가 실제 있다고 믿는데, 실제로 존재하는 건 정부죠. "나"라는 자아의 모든 의지는 나의 행위를 통해 나타나듯이 국가의 의지는 정부의 행위를 통해서 실현되고 드러나는 거죠. 그런데 정부와 국가는 같지 않아요. 정부가 사라져도 국가는 존재할 수 있고요. 정부는 교체되어도 국가는 영속해요. 국가와 정부는 같지 않지만, 현실에서 국가는 정부를 통해서 자기 모습을 드러내죠. 그래서 우리가 국가를 개선하고 싶으면, 정부를 개선해야 되요. 정부는 누가 구성하나?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서 구성하죠.”

알다시피 유시민은, 국가와 정부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는데, 나는 이 차이가 인권과 기본권의 차이를 설명하는데도 굉장히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권?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권리? 그것은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물질적으로는 없는 거다. 사람들이 믿기 때문에 있는 거다. 기본권이란 헌법에 의해서 실현되고 보장된 인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인권과 기본권은 같지 않다. 기본권이 사라져도 인권은 존재할 수 있고, 기본권이 변경되어도 인권은 영속하다. 인권과 기본권은 같지 않지만, 현실에서 헌법은 기본권을 통해 인권의 모습을 드러낸다.

2. 인권 vs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어제 인권 얘기를 하니까, 어떤 분이 와서, 이러신다. “비주택 거주자들의 인권도 좀 거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ㅋㅋ 내가 거론한다고 해서, 나아진다면야 거론안해드릴 이유도 없지만, 도대체 내가 뭐길래, 나에게 그 거론을 기대하시는지는 모르겠다. 세상 모든 부조리한 일들과 모든 바람직한 일들을 내가 다 챙길순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이 분이 말씀하시는 “비주택거주자”가 뭘 의미하는 지 모르겠지만, 난 일단 “노숙자”들이 떠오르는데, “노숙자들의 인권”이라.. 당연히 노숙자라고 인권이 부정당해서는 안되는 것이 마땅하고, 노숙자가 다른 사람에 비해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한데, 사실, 이 분 말씀의 의도는 단지 그것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의심이 든다.

일단, 이분은 혹시 인권과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혼동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많은 분들이 이 둘을 혼동한다. 이 둘이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겠다. 그러나 이 둘은 사실 좀 많이 다르다. 태생부터 다르고, 현재의 모양도 다르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인권과는 구별되는 기본권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복지사회를 지향하는 사회적 기본권이라고 할 수 있는데, 헌법 재판소는 이를 “국민소득, 국가의 재정능력과 정책 등을 고려하여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대한으로 모든 국민이 물질적인 최저생활을 넘어서 인간의 존엄성에 맞는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행위의 지침”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회적 기본권은 물론 인권보장의 중요한 토대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인권은 아니다.


3. 구치소 재소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행복추구권”?

2013년도에 한 석방된 재소자가 헌재에 구치소 환경에 대한 위헌확인을 구한 적이 있다. 구치소에서 1인당 면적이 1㎡ 남짓 되는 공간에 불과한데, 우리나라 성인 남성 평균 신장인 174㎝ 전후의 키를 가진 사람이 팔다리를 마음껏 뻗기 어렵고 칼잠을 자야할 정도로 매우 협소하다는 것이다. 만약 비주택거주자의 인권이 문제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위헌을 구한 신청인은 이러한 구치소환경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 인격권,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침해됐다고 주장했단다. 신청인은 아마도 자기가 아는 권리는 다 가져다 붙인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보면, 이 신청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작년 말 위헌판결이 나긴 했다. 그런 구치소 환경은 헌법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헌재가 그런 구치소환경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나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질적인 최저생활을 넘어서 인간의 존엄성에 맞는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국가의 지원을 받을 모든 국민의 권리”는 기본권인 것은 맞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박탈해서는 안되는 인권이라고 하긴 어렵다. 구치소 생활자를 대상으로는 제한할 수 있는 권리다. 국가는 그것을 제한하고 싶어서, 재소자를 구치소로 보낸 것이다.

“행복추구권”도 마찬가지다. 구치소생활자들에게 무슨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겠는가? 행복추구권.. 말이 뭔가 있어보여서 여기저기 불려다니는데, 그냥 일반적 자유권을 행복추구권이라고 하는 것이다. 헌법상의 다른 권리로 포섭되지 못하는 자유는 모두 그냥 행복추구권이라고 한다. 행복추구권은 다른 기본권이 커버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충해주는 역할이다. 다른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기본권이 있을 경우 행복추구권은 아예 고려 자체를 하지 않는다. 바로 그런 일반적 자유권을 제한하고 싶어서 국가는 재소자를 구치소로 보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요즘 여기저기 엉뚱한 곳에 불려다니며 고생하는 이 두 권리.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나 “행복추구권”이 두 독재자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박정희에 의해서, 행복추구권은 전두환에 의해서 헌법 속 기본권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2017년 4월 3일 월요일

Caran D'ache Pencil-sharpening Machine 카렌다쉬 연필깎이




카렌다쉬 연필깎이. 무려 150불짜리입니다.


자태에 반해서 사고싶은 분이 계시다면
도시락 싸들고다니면서 말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연필 고정시키는 곳이 어마무시합니다.



당연히 연필에 상처가 생기지요.
심지어 다른 연필깎이에 비해 연필도 잘 못 깍습니다.

2017년 1월 19일 목요일

이재용 불구속 결정에 대해 내가 화를 낼 수 없는 이유



나는 이재용 처벌을 소망한다. 그러나, 이재용 구속이라는 가치보다는 불구속수사의 원칙이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누구에게도 원칙은 불구속수사고, 구속수사는 예외다. 이걸 외면한 채, 같은 죄를 졌는데,  왜 누구는 구속기소되고, 누구는 불구속기소되나? 식의 타령만 일삼다가는... 뭐가 원칙이고 뭐가 예외인지도 모른채.. 구속기소가 남용되는 그런 세상에서 살지도 모른다.

구속여부 판단의 중요한 기준 중에 하나가 그 구속이 꼭 필요한가 하는 점이다. 구체적으로는 도주위험성이 가장 많이 논의되는데. 권력이나 돈이 많으면, 그 사회에서 지키고 싶은 자기것이 많다는 뜻이다. 이 사회에서 지키고 싶은 자기 것이 많은 사람이라면,  “도주의 위험이 적은 걸”로 법원이 판단하는 거라면, 마음에 들진 않지만 나름 합리적이다.

또한, 지금까지 이재용의 자백과 특검의 수사를 살펴보건대, 이재용이 더 인멸할 증거가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이제 돈이 간걸 부인할 순 없다. 강요는 자백했다.  나머지 쟁점은 과연 댓가성 문제인데..나는 그걸 드러난 전후관계를 통해서 특검이 밝혀낼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부분은 불구속상태에서도 증거를 인멸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불구속했을 때와는 달리 구속을 할 경우, 특검이 이 혐의와 관련하여 더 밝혀낼 수 있는 증거가 있다고 판단된다면, 문제가 달라지지만,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다. 문제는 특검이 그걸 피의자의 자백으로 빼도박도 못하게 못박으려고 하니까 구속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 같다.

이렇게 보자면, 이재용에 대한  불구속결정은 너무나 원칙적인 판단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가 화가 나는 것은 이렇게 당연한 원칙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작동하지 않을때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분노해야 할 곳은, 이 원칙이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이지, 이 원칙이 원칙대로 잘 작동되는 곳이 아니다.

“헌법상 평등의 원칙은 국가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계층을 대상으로 하여 기본권에 관한 사항이나 제도의 개선을 시작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2016년 12월 31일 토요일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의 참 뜻


한 점의 오류도 없는 사상이나, 
단 한톨의 진리도 담지않은 사상은 없다 
사람 또한 그러하다.

세상에는 
완벽하게 좋은 사람이 없고.. 
완벽하게 나쁜 사람도 없다.

누구나 인간인 이상 
결점투성이 이고, 
불완전하게 좋은 사람과 
불완전하게 나쁜 사람이 있다.

때로는 어떤 사람의 행동이 
지독하게 우리를 화나게 할 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누구누구의 실체"

이런 말을 사용하는 사람을 
난 기본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왜 신뢰할 수 없었는지 
깊이 고민을 해본적이 없는데. 
오늘 깊이 생각해보니
그것은 @@@의 "실체"라는 표현이..
세상에는 완벽하게 나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의 나쁜 점은 결코 변화할 수 없고 
일관적이라는 잘못된 전제 아래 
이루어진 표현이기 때문인 듯하다.

더구나 대개의 경우, 실체라는 표현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 쓰여질 때가 많다. 
그 사람이 받고 있는 좋은 평가가 
사실은 부당하다는 취지인 것이다.

흔히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들 한다. 
사람들은 
이 말을 대단히 너그러운 사람의 
감정적인 태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이 말처럼 이성적인 태도를 추구하는 말이 없다. 
사람을 미워하면, 죄가 가려진다는 것을 
난 김동식 대리님에게 배웠다.

"잘못을 추궁할 때 조심해야할 게 있어... 
사람을 미워하면안돼
잘못이 가려지니까 
잘못을 보려면 인간을 치워버려
그래야 추궁하고 솔직한 답을 얻을 수 있어" - 미생 -

누군가에게 잘못한 점이 있다면 
"그 사람의 실체 " 운운할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그 사람의 잘못을 논리적으로 얘기하면 될 일이다. 
그래야 그 사람의 잘못이 가려지지 않는다.

만약 잘못을 말하지도 못하면서
"실체" 운운한다면, 
그건 이간질과 모함에 다름 아닐 것이다.

2016년 12월 21일 수요일

법정과 진실



- 형사재판에 회부되었는데, "나에겐 죄가 없다" 무죄를 다투려고 하는 분들에게 -

검찰로부터 기소당해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분노를 표출하면서, 법정에서 무죄를 다투려고 하는 분들이 있다 이 분들에게 재판에 회부된 형사사건 중 무죄를 받는 것은 2% 밖에 안된다는 현실을 알려드리는 건 고욕스럽기 이를데 없는 일이다. 형사사건의 98%. 게임은 검경조사과정에서 모두 끝난다.

피의자 조사과정에서 검사가 진실을 발견하려고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 그러나 기본적으로 검사는 조사과정에서 피의자를 믿지 않는다. 그럼 검사는 왜 조사를 하는가?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서 조사를 한다는 것은 교과서적인 순진한 말씀이고, 사실은 기본적으로 검사는 기소를 전제로 피의자를 부른다. 검사들? 격무에 시달리는 바쁜 사람들이다. 기소도 하지 않을 사건, 굳이 피의자 불러서 시간 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할 수 있는 자료를 피의자가 충분히 가지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탐색한다. 그걸 가지고 있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기소하는 것이고, 그걸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면,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내린다.

그런데도 순진하게 진실을 밝히겠다고 검사 앞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유리한 점을 모두 다 밝히는 사람들이 있다. 게다가 성질까지 있는대로 부리면서 다 밝혔는데, 만약 기소처분이 나왔다? 그렇다면 십중팔구가 아니라 98%! 아니 100% 유죄를 받았다고 보면 틀리지 않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고? 처음부터 경찰이나 검찰 조사 과정에서 최선을 다해서 내 패를 보여주지 않아야 한다. 검사와 수사관이 헷갈리게 만들어야 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패가 어느 정도인지..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게 뭔지.. 내가 가진 법률지식이 어느 정도인지.. 내 패를 전혀 보여주지 않으면, 유죄의 입증을 위해 필요한 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는한, 검사는 기소하지 않는다. 어느 검사가 무죄율 2% 속에 자신의 사건이 들어가길 바라겠는가?

원래 수사는 불공정한 게임이다. 상대는 법률 전문가고, 피의자는 보통 사람이다. 가지고 있는 법률지식이 애초부터 부족한데, 그나마 피의자에게 있어 검사보다 유리한 것은 사실과 자신이 주장할 내용에 대한 정보다. 그걸 다 까놓았는데 기소되었다? 그럼 백전백패다.

이 불공정한 게임을 그나마 공정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묵비권인데, 자기 혼자 자신은 떳떳하고, 죄나 과실이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하거나, 그 유일한 방패를 일찌감치 거둬버렸다면?? 더더욱 답이 없다. 자신에게 뭐가 유리한지 불리한지 자신이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부터 에러다.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진술이 결국 당신을 옭아맬 것이다.

안다. 억울함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 그런데, 그 억울함을 풀여줄 것이라고 믿었던 법원에서 까지 배신을 당해 고통스러워할 할 그 분들을 생각하자니, 가슴이 미어터진다. 그래서 아프게 불편한 진실을 말씀드릴 수 밖에 없는 내 맘을 이해해주셔라.

법원은 진실이 이기는 곳이 아니라, 법관이 믿고 싶은 증거를 제시하는 사람이 이기는 곳이다. 원래 사람은 진실을 밝힐 능력이 없다. 그래서 분쟁을 종지하려면, 어느 순간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사실을 확정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사실을 확정할 전적인 권한이 법관에게 있다.

법원에서 진실을 다투면, 진실이 이겨서 무죄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은 일찌감치 버려라. 그게 정신건강에 좋다. 불이 무엇으로 인해서 일어났는지, 그 진실에 대해서 검사도 법관도 관심이 없다.그들이 관심 두는 것은, 불이 난데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진실이든 아니든, 확정하는 것이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면? 어쩌면 기소당한 입장에서 피고인이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고민은 이 사고로 인해 벌어질 자신의 피해를 최선을 다해 줄이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점일지도 모른다.
 
물론 끝까지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고 싶은 분의 마음을 모를 바는 아니다. 그러나 진실은 생각보다 굉장히 비싸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 모르겠는가? 그 비싼 금전적 시간적 비용을 투하해서 진실을 얻는 것? 포기하는 게 쉽진 않겠지만, 나로서는 권장하지 못한다.
 
지금 당장 가슴아플지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 다툴 수 없을 순간까지 다퉈본 후, 강제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는 억울함과 그 때까지 겪어야 할 정신적 고통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정식재판을 청구하되, 어느 순간에는 진실과 무죄를 다투는 것을 포기하고, 벌금을 줄이는 것을 조심스럽게 권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나 또한 슬프고 화가 날 뿐이다.
 
참고 : 여기서 세월호 얘기를 한 것은 진실이 비싸다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서다. 세월호 진실을 끝까지 밝히는 것을 권장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2016년 5월 10일 화요일

희생학생 제적 처리에 대해 슬픈 마음으로 유족분들의 이해를 구합니다



음, 얼마 전에 세월호에서 희생된 학생에게 징병검사안내서가 발송되어서, 부모님의 가슴이 아프다는 말씀을 전해듣고 같이 분노했더랬습니다. 병무청이 미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왜 그 학생에게 가슴아픈 징병검사안내가 발솟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차마 마음으로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한 부모님께서 사망신고를 안하셨던 것 같습니다.

희생 학생이 무연고자도 아니니, 관에서 직권으로 사망 신고를 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직권으로 사망신고를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부모님들의 허락 없이 사망처리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서류상 사망처리가 되지 않았으니, 병무청으로서는 징병검사안내서를 발송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병무청이 발송하기 전에 대상자의 생존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사망신고가 되지 않은 탓에 가족관계등록부가 폐쇄되지 않았으니 생존자로 보았던 것입니다. 혹시 세월호 희생자들을 따로 배려하고 싶어도 규정이 없으니 병무청 담당자로서는 도리가 없었을지도 모르고요.

퇴학, 출교, 자퇴, 전학, 졸업, 제적 조금씩 개념이 다릅니다. 흔히 제적당한다는 표현 때문에 유족 분들이 거부감이 드실수도 있지만, 제적은 그나마 어떤 평가나 가치도 포함되지 않은 중립적 표현입니다. 학적과 이별하는 것이죠.

원래 사망자는 그렇게 학적과 이별하는것이 원칙인 듯 합니다. 학교측에서는 유족분들에게 명예졸업을 제안드렸지만, 유족분들이 미수습자 생각에 받아들이시지 못한 모양입니다.

결국 생존학생들을 졸업시키자니, 학교 측에선 사망학생들을 학적에서 이탈시킬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인데, 유족분들의 참담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너그럽고 사려깊은 이해를 구할수 밖에 없는 학교측의 입장도 참 딱한 노릇입니다.

아마, 사망학생은 학적부와 이별시켜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서 담당자가 어쩔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굳이 학적부와 이별시켜야하는 상황에서 이해를 구한답시고 다시 언급하는게 유족분들 맘을 더 상하게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고요,

만약 명예졸업을 하더라도, 학적부와는 이별할수 밖에 없었을것입니다. 명예졸업과 제적은 모순없이 양립이 가능한 일이니까요. 다만 시기가 문제될텐데. 생존학생의 졸업을 위해 어쩔수 없는 일이었으니, 학교측이 지금 그 사실을 뒤늦게 아시고 노여워하시는 유족분들의 이해를 구할수 밖에 없는것이죠.

보내기 힘든 마음으로 사망 신고를 안하신 마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만약 사망 신고를 해태했다고 해서 법대로 유족들에게 과태료를 부과한다면, 저라도 화가 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망신고를 하지 않으면, 죽은 사람에게 징병검사안내서를 발송해서 유족의 화를 돋우는게 서류에 얽매인 이 사회의 현실입니다.

제적 역시 서류처리일 뿐이죠. 서류상 문제에 일일이 너무 마음을 매이기보다는, 우리가 그 학생들을 여전히 단원고학생으로 인정하고, 그렇게 알고 있다는게 중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 두 사건을 겪고, 감히 해봤습니다.

억울하게 희생된 아이와 관련해서 가슴 아픈 일이 생길 때마다 화를 내시기보다는, 그 화의 에너지를 세월호 진상 규명에 더 쏟으시는 것. 그것이 희생자들이 원하는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철없이 해봅니다. 죄송합니다.

2016년 5월 4일 수요일

"굶주린 자가 음식을 훔친 건 죄 아니라는" 이태리 판결.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한가?


법이 금지하는 행위를 자행해서, 그 행위가 범죄의 요건을 구성하더라도, 처벌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위법성의 조각”이라고 한다. 우리 형법은 위법성이 조각되는 사유로 크게 다섯가지를 정하고 있다. 정당행위(正當行爲), 정당방위(正當防衛), 긴급피난(緊急避難), 자구행위(自救行爲), 피해자의 승낙(被害者의 承諾). 이 다섯가지가 그것이다.

오늘은 그 중에서 형법 제22조가 정하고 있는, 긴급피난에 대해 알아봐야겠다. 조문부터 살펴보자.

형법 제22조 (긴급피난)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위난을 피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

긴급상태에서 자기나 타인의 법익을 보호하기 위한 긴급행위라는 점에서, 긴급피난은 정당방위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정당방위는 언제나 부당한 공격을 전제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공격을 해온 자에 대해서만 방위행위가 가능하다. 긴급피난은 다르다. 부당한 침해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부당하지 않은 침해에 대해서도 가능하다. 즉, 위난을 야기한 자 이외의 자에 대해서도 피난행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피난행위가 상당한 이유를 가지려면 그 행위가 보충성과 균형성, 그리고 피난수단의 적정성을 충족해야 한다.

보충성.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그 위난을 피할 방법이 없어야 한다는 얘기다. 균형성. 덜 중요한 법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더 중요한 법익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거다. 적정성. 그 방법이 위난을 피하는데 효과적이어야 한다.

도대체 어떤 경우를 말하는 걸까? 버스 운전자가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고장나자 승객의 안전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정차되어 있는 타인의 차를 들이받고 멈춘 경우, 손괴죄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길을 지나다 맹견이 덤벼들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모르는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간 경우, 주거침입죄를 묻지 않겠다는 거다.

지난 2일. 긴급피난의 사례로 역사에 남을만한 판례가 나왔다. 이탈리아에서다.

이탈리아 북부 제노바에 살던 우크라이나 국적의 남성, 로만 오스트리아코프는 약 5,300원 어치의 치즈와 소시지를 훔치다 현행범으로 체포되었고, 6개월 징역과 100유로의 벌금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잡힌 순간에 가게를 떠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리고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긴급피난을 인정한 것이다.

이탈리아 대법원은 “피고가 가게에서 상품을 점유한 상황과 조건을 살펴볼 때 그가 급박하고 필수적인 영양상의 욕구에 의해서 이를 취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긴급사태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이탈리아 언론 스탐파 신문의 사설은 수석 판사의 발언을 인용하며 '생존의 욕구는 소유에 우선한다'고 역설했다.

이렇게 “굶주린 자가 음식을 훔친 건 죄 아니”라는 판결은 이탈리아에서 이뤄졌다. 2016년 5월 2일의 일이다. 자본주의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다.

오늘 아침 켈시라는 미국 꼴통 얘기를 읽고, 생각이 많아졌다.


미국 식약청에 켈시라는 박사급 꼴통이 하나 있었단다. 이 사람이 신입사원으로 식약청에 들어가서 처음 맡은 업무는 신약신청서평가업무. 그의 책상위에 놓인 첫 신청서는 독일의 제약사 그루넨탈이 개발한 진정제 탈리도마이드였다.

이미 3년전부터 유럽에서 널리 팔리고 있던 약이었다. 심지어, 임신부의 입덧 방지제로도 처방될만큼 안전하다고 알려져있었다. 그런만큼 식약청 허가는 미국시판을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신입꼴통 켈시는 쉽게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단다. 약품의 독성과 효과 등에 대한 추가 정보를 요구했단다. 회사 측이 제출한 자료가 부족하는 이유였다. 추가자료요구는 한번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 시판사인 머렐은 똥줄이 탔다. 허가는 떼어놓은 당상으로 여기고 이미 창고에 탈리도마이드를 가득 비축해뒀기 때문이다. 전방위 로비를 펼치며 신입꼴통 켈시를 압박했다. 식약청 고위층에게 켈시가  "까다롭고, 고집 많고, 비합리적인 관료"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꼴통 켈시가 이러한 압박을 견디는 어느날이었다. 영국의학저널에 탈리도마이드가 팔, 다리 마비를 일으킬 수 있다는 글이 실렸다. 6개월 후 유럽에서 탈리도마이드가 기형아 출산을 유발한다는 충격적인 연구 결과가 나왔다.

약품은 곧바로 전량 회수됐다. 그러나 그때까지 임신부의 탈리도마이드 복용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팔, 다리가 없거나 눈과 귀가 변형된 채로 태어난 기형아는 1만2천 명에 달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탈리도마이드 베이비'는 17명에 그쳤다. 모두 머렐 사가 허가 이전에 1천 명의 미국 의사들한테 연구 목적으로 나눠준 샘플로 인한 피해 뿐이었다. 꼴통 켈시가 쉽게 시판 허가를 내주지 않은 덕이었다.

탈리도마이드 사건이 전 세계를 뒤흔든 후 곧바로 워싱턴포스트는 꼴통 켈시를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켈시는 소신을 지킨 강직한 공무원의 표상으로 부상했다. 곧 미국 전역의 스타가 되었다. 대통령은 "신약의 안전성에 대한 켈시 박사의 탁.월.한. 판.단.력.으로 미국내 기형아 탄생이라는 큰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며 공무원에게 주는 최고 상을 수여했다. 얼마전 켈시가 101세의 나이로 숨지자, 미국 언론은 켈시를 ‘20세기 미국 여성 영웅’로 추켜세우며 대대적으로 애도했다.

이 얘기를 읽고 난 의문이 들었다. 켈시는 영웅이 되었다. 수많은 목숨을 구했다는 결과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과연 백악관의 말처럼 켈시의 탁월한 판단력 때문이었을까? 만약 켈시가 꼴통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까다롭지 않고 유연하며, 합리적인 신입사원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니다. 여전히 까다롭다고 하더라도, 만약 제약회사의 전방위로비를 버텨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수많은 아기들의 희생 후에, 혹시 만고의 역적이 되지는 않았을까?

도대체 대중들이란? 그들에게 중간은 없다. 영웅이 아니면 역적이다. 결과만 보일 뿐, 과정은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켈시의 업적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가 칭송을 받아야 한다면, 수많은 목숨을 구한 결과 때문이 아니다. 로비에 맞서 힘겹게 원칙을 지켜냈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원칙을 지킨다는 게 이처럼 개인적으로는 괴롭고, 험난하며 고통스러울 수 있다. 더구나 원칙을 지킨다고 해서 켈시처럼 로또를 맞으란 법도 없다. 오히려 꼴통으로 찍히고, "까다롭고, 고집 많고, 비합리적인 관료"로 술자리 안줏감으로 씹히며 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눈물겨운 수많은 희생이 있은 후에, 책임자를 찾아 처벌하는 거?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희생의 책임이 아니라, 꼴통으로 찍히기 싫어서 원칙을 포기한 책임이어야 한다.
 
평소에는 원칙을 지킨다고 꼴통 취급하다가, 만에 하나 희생이 생기면 역적 취급하는 사회. 이런 비합리적인 사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선택은 각자의 몫이고, 그 선택에 따른 책임도 각자의 몫이다. 결국 폭탄을 피하고, 켈시가 맞은 것 같은 행운을 기원하는 수밖에 과연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 해법이 뭐냐고?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2016년 4월 27일 수요일

자본주의사회에서 세월호참사나 옥시사태가 끊이지 않는 이유



왜 경쟁하는가? 


외부와 단절된 섬이 하나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섬에는 중앙은행 A와 시민 B 그리고 시민 C 이렇게 셋이 있다.

여기서 A가 발행한 돈은 딱 만원.

이 돈을 시민 B가 연이율 5프로로 빌렸다.

그러니깐 일년 뒤

이자 500원을 더해 1만 5백원을 값기로 한다.

B는 빌린 돈을 가지고 C에게 배를 한 척 산다.

B는 열심히 고기를 잡아 돈을 번다.

B는 원금과 이자 10,500원을 갚을 수 있을까?

답은 갚을 수 없어!

왜냐하면 섬에 있는 돈은 딱 만원.

애초에 이자 500원은 없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할까?

이자를 갚으로면 방법은 딱 하나.

다시 돈을 찍어낼 수 밖에 없다.

중앙은행 A가 500원을 발행하고

그걸 다시 누군가가 대출하는 것이다.

만약 B가 열심히 일해서 섬에 있는 돈을 모조리 다 벌면

빌린 돈을 모두 갚을 수 있게 된다.

그럼 D가 빌린 500원의 원금과 이자는 어떻게 할까?

당연히 못 갚지. 파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금융 시스템에서 빚을 갚는 것은

개인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돈이 적게 돌면 결국 누군가는 이자를 갚을 수 없게 되고.

그럼 그 사람은 파산할 수 밖에 없게된다는 거.

그럼 당연이 수입적고 빚은 많고 경제사정이 어두운 사람이

제일 먼저 피해자가 된다.

이 세상에는 여러 보존의 법칙이있다.

에너지, 운동량 보전법칙 등등...

현대 금융법칙은 바로 빚 보존법칙이 지배하는 시스템이거든?

누군가 빚을 갚으면 누군가는 파산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이 필연적이다.

이 세상에 이자 시스템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다른 이의 돈을 빼앗기 위해 경쟁할 수 밖에 없는 거지.

[출처]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1탄. 돈은 빚이다 ④ 이자는 어디에서 오는가


기업의 위험편익분석과 징벌적 손해배상 


이젠 이렇게 다른 이의 돈을 빼앗기 위해

경쟁하다보니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나 볼까?

1970년대 포드에서 생산하던 핀토라는 자동차가 있어.

그런데 어느날 포드는 이 차에 결함을 발견하지.

달리다 충돌할 경우 연료통이 폭발한다는 것.

포드는 이 결함을 고칠 경우

대당 11달러의 비용이 발생하고

180명의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포드는 이 숫자에 근거해 위험편익분석을 한 결과,

결함을 고칠 경우 1억3,700만 달러의 비용이 발생하는 반면,

180명의 사망 사고 배상비용은 4,950만 달러만 든다는 것을 확인했어.

이 결과 포드는 핀토를 리콜하지 않았어.

비용적인 측면을 고려한 거지.

결국 매우 슬프게도 사상 사고가 이어졌다.

1972년 릴리 그레이가

13세의 그림쇼우와 차를 타고 가다 차량 간 충돌로

핀토가 폭발하여 릴리 그레이는 사망하고 리차드 그림쇼우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는데

이 재판과정에서 포드가 위험편익분석을 통해

결함 수리 비용보다 보상금이 적게 든다는 이유로 리콜하지 않았음을 밝혀진거야!


기업의 이런 위험편익에 따른 비용계산과 이익추구를 막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월호참사나 옥시사태를 막을 수 없어.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걸  막을 방법이 없어.

그래서 우리는 결국 불매운동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우리가 이렇게 불매운동에 그친다면,

우리는 앞으로 누군가 죽고나서 불매운동만 하는 걸

평생 반복하게 될 거야

위험편익분석에 따른 비용계산을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야.

기업이 할 수 있는

위험편익에 따른 비용계산의 결과를 바꿔주는 것.

4,950만 달러로 분석된 180명의 사망 사고 배상비용을

확 높여주는 거야!!!

"사람 목숨을 돈 갖고 장난치면 망하게 해버리겠다"는 정신을

기업에게 단호히 보여줘야 해!!

자본주의가 일찌기 발전된 미국과 달리

아직 우리나라는 징벌적배상제도를 배제하고

오로지 실손해만 계산해서 배상하게 하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의 목숨값이 정률의 배상금으로 결정되고,

이에 따라서 이뤄지는 위험편익분석과 그에 따른 기업의 선택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거.



자본주의를 없앨 수 없다면,

기업에 대한 징벌적배상제도라도 도입해야 하는

시급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거야.



2016년 1월 10일 일요일

도로명주소의 인문학적 함의와 가치





1. “지번” 주소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지번”이라는 게 있어. 쉽게 말해서 땅덩어리의 번호야. 토지 번호. 땅이라는게 한정된 자원이긴 한데, 이것을 땅덩어리의 개수가 한정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돼. 때로는 땅덩어리의 숫자가 막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도 있거든? 분필하거나 합필 하거나 하게 되면, 같은 면적의 땅 안에서도 하나의 땅덩어리가 여러개의 땅덩어리가 되고, 여러개의 땅덩어리가 하나의 땅덩어리가 되게 되는 거지. 그래서 행정기관이 이렇게 땅의 개수와 모양이 바뀔 때마다, 순서대로 부여하는 번호가 바로 지번이야.

그런데 이 지번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 분필된 순서 외에 알 수 있는 정보가 없어. 그런데 우리가 분필된 순서를 알아서 뭐해? 그냥 행정기관이 편의상 붙인 고유번호라고. 고유번호. 인덱스의 역할 외는 하는게 없어요. 땅의 모양이나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이 고유번호를 가지고 토지대장을 살펴보거나, 토지대장에 의해 작성된 지도를 봐야만 답이 나올 거고, 땅의 주인을 알려면 이 번호를 가지고 등기부등본을 떼어봐야 하는 거야.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의미없는 숫자 인덱스인 토지번호를 오랫동안 “주소”로 사용해왔어. 최신 토지대장의 내용이 반영된 지도가 없으면, 이 지번은 그냥 그 장소를 특정하는 역할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야. 그냥 아무 의미 없는 땅이름을 숫자로 붙여놓고서는 그걸 우리는 굉장히 오랫동안 “주소” 또는 어떤 장소에 대한 위치정보를 제시하는 용도로 사용해 온 거지.

그런데 마침 이걸 도로명 주소로 바꾸는 획기적인 일이 몇 년전부터 사용되고 있는데, 사람들이 불만이 많은 가봐. 일단 불편하고 왜 바꾸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네? 오늘은 내가 이 역사적 과업의 인문학적 함의에 대해서 얘기해주도록 할 게.

2. 토지 중심에서 건물 중심으로

지번을 중심으로 한 주소는 토지 중심으로 짜여진 거야. 땅의 번호 (address)가 곧 사람의 주소 (domicile)가 되는 거니까 말이지. 그런데 새 주소에서는 땅덩어리의 번호를 배제되고 건물에 번호를 매기는 방식이라는 것이 포인트 중에 하나야!

지번주소가 뭐냐? 아직 농경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일제가 토지 수탈을 위해 토지대장을 정리하며 만들어놓은 지번을 그대로 주소로 삼는거지.

단지 일제가 만들어놓은 거라서 기분나쁘다는게 아냐! 당시는 농경사회니까. 토지가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겠지. 그런데 지금은 토지보다는 건물이 더 중요한 자원이고!! 사람이 사는 장소의 측면으로 봐도 토지보다는 건물이 더 합당한 시대가 온 거라고.

자원으로서의 땅과 건물의 가치. 또 주거주지로서 땅과 건물의 가치, 여러 가지 특면을 비교할 때, 이제 땅번호는 건물번호에 비해 주소로서 적합하지 않은 거라고 그걸 시대에 맞게 바꾸는 작업이 바로 새 주소라고.

3.  행정기관 편의 중심에서 이용자 편의 중심으로 ..

이 제도 변화를 두고 “행정이 인식을 따라와야지 왜 인식이 행정에 따라가야 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지적하고 싶은게 바로 그 점이야!!

지번 주소는 행정이 지들 편의대로  여기가 135번지요! 하면 백성들 모두가 이유도 모른채 그 의미 없는 번호를 가지고 주소로 삼아야 하는게 지번 주소인데. 새 주소는 단지 부동산이 생긴 순서대로 번로를 붙이는 게 아니라, 부동산에 접근하는 방법인 도로의 이름과 그 도로 안에서의 위치에 따라 건물 번호를 붙여놓은 주소 체계지.

도대체 뭐가 관 중심의 사고이고 뭐가 민 중심의 사고인지? 이 불쌍한 백성은 관의 깊은 뜻을 왜 몰라주는 거지? 피아골 너! 행정기관이 하는 일은 일단 딴지부터 걸고 싶은 거 아냐?

4. 그렇다면 땅 번호 - 지번 – 의 미래는?

물론 땅 번호는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사람이나 건물에게도 주소가 필요하지만, 땅에게도 고유번호는 필요하거든. 땅을 관리하려면 말이지. 그런데 사실 땅의 고유번호가 필요한 순간이 살면서 얼마나 되겠냐고? 땅을 사고 팔 때! 땅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주장할 때! 경계담 쌓아야 할 때! 그 외에는 없어요!!!

도대체 보통사람이 1년에 몇 번이나 땅을 사고 팔겠냐고? 보통사람이 1년에 몇 번이나 경계담을 쌓겠냐고? 그래서 보통 생활에서는 사람 또는 기관의 주소로 건물번호를 중심으로 한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고, 땅이나 건물같은 부동산을 거래하거나 권리의무에 대한 다툼이 있을 때! 그 때만 아마 땅 번호. 지번이 사용될 것이라는 게 내 예측이고. 아마 도로명주소를 추진하는 당국의 소망도 비슷할 거야.

즉 지번은 부동산 고유번호로서의 역할 외에는 하지 못할 거라고. 지금도 토지대장을 살펴보면, 땅 덩어리마다 지번을 이용해서 만든 19자리의 부동산고유번호가 부여되어 있거든. 그런 용도로만 사용될 거라는 거지.

5. 도로명 주소가 신도시 사는 사람들은 상관없지만, 종로, 동대문, 서대문 등 구도심 사는 사람들은 불편하다?

똥을 싸라!! 솔직히 도로명 주소의 이익이 구 도심에서보다 신도시에서 더 높아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어! 그런데 신도시하고 구도심하고 비교하는 거 자체가 웃긴 거지. 왜 신도시하고 비교를 해? 구 도심 하나만 놓고 지번 주소를 사용하는게 더 편리하냐?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는게 더 편리하냐? 그걸 따져봐야지!!

종로에는 북한산, 동대문엔 배봉산, 서대문에는 안산과 인왕산이 있어. 그리고 면으로 인식된 공간이 있어!! 길을 그저 뚫리는 대로 나 있고! 그런 상황에서 도로명 주소로 뭘 찾으면 속이 희까닥 다 뒤집어진다고? 난 도대체 그런 상황에서도 행정기관이 규칙없이 부여한 지번 주소가 도로명 주소보다 나은 이유가 뭔지 모르겠거든?  어차피 지번주소 받으면, 인터넷에서 쳐봐야! 거기 찾아갈 거 아냐! 도로명주소도 마찬가지고! 희까닥 뒤집어지긴 뭘 뒤집어지냐?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는 것이 기존의 행정구역 "동"이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해! 행정구역은 예전처럼 그대로 존재하는거야. 주소체계를 도로명대로 바꾼다고 해서  행정구역까지 도로 명대로 바꿀 필요는 없잖아? 길 하나가 한 행정구역 안에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길 하나가 여러 행정구역에 걸친 경우도 생길 수 밖에 없으니까. 도로명주소가 생긴다고 해서 동과 리가 없어지는 건 아니라는 거..

특히  행정구역 가운데, 구, 읍, 면 이상은 지번주소 때와 다른게 없어. 도로명 주소에도 포함되는 거지. 다만, 행정구역가운데서 동과 리는 주소에 활용되지 않고, 도로명주소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거야.

이렇게 행정구역과 주소를 분리하는 것이 과연 행정기관 중심인지 사용자 중심인지.. 그건 각자가 좆잡고 생각을 해보도록 하자고.

6. 그래도 너무 불편하다고?

도로명 주소라는게 어느 한 정부에서 갑자기 떨어진게 아냐. 준비만 거의 20년 가까이한 사업이라고!! 준비만!!  1996년도 김영삼 정부 때 내무부 주도로 시범사업을 추진했고. 1997년도 강남구, 안양시, 안산시, 청주시, 공주시, 경주시 여섯 개 기초지자체를 통해 시범사업을 벌였으며 97년부터 2010년까지 무려 14년 동안 도로명 주소시설물을 전국에 설치했고. 2010년 예비안내를 거쳐서, 2011년 도로명주소를 일괄고지했고 2014년부터 비로소 전면적으로 시행한 제도라고!!

그런데 고작 지금 2년 지났어. 2년동안 기존 주소의 습속을 버리지 못한 니들이 불편해한다고 해서..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거냐? 다시 행정기관이 규칙없이 붙인 지번을 주소로 사용하는 그 시절로 돌아가자고!!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그래. 불편하겠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계속 많이 사용해!!! 언제까지? 네가 안불편해질 때까지. 니가 아직까지도 도로명 주소가 불편하다는 건, 아직 네가 그걸 많이 사용하지 않아서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열심히 사용하라고!! 도로명 주소가 너 같은 얘들이 불편하다고 징징댄다고 해서 되돌릴 수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만약 되돌린다면 그거야 말로 미친 짓이지.

2016년 1월 1일 금요일

억울하냐? 복창해라! "상대방의 선빵은 나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한 3개월전에 게임상에 욕설문제로 고소당한적이있는데 
상대방이 먼저 욕설을 했고 (그것도 저보다 매우 심하게 반복적으로요) 
해당 욕설에 대한 자료들을 경찰조사과정에서 제출하였습니다. 
그뒤로 경찰서에선 불기소 처분으로 검찰송치했다는데 
검찰청에선 벌금50 으로 기소하였다고하네요 이런경우도 있나요? 
불기소 처분되서 안심하고있다가 방금 문자받고 정신이없네요"


억울하지?

억울한 마음을 이해해..

그런데 형사처벌은

너하고 상대방하고

누가 더 잘못했는지를 따지는게 아냐..

상대방은 치워놓고, 오로지 너만 놓고

법이 처벌하기로 정해놓은 행위를

네가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이 점을 따지는게 형사재판이라고..

물론, 상대방이 먼저 욕을 했다는 점은?

네 범행의 동기로서 참작할만한 충분한 사유가 될 거야..

형량을 결정할 때 충분히 반영되었을 거고..

그렇지만 네 행위의 유무죄를 정할 때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복창해!! "상대방의 선빵은 나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상대방이 먼저 욕설을 한 점..

그것도 너보다 너 심하게 반복적으로 한 점..

그 점은 상대방을 처벌하느냐를 결정할 때

고려될 것이지..

너를 처벌할 때 고려할 사항이 아니라는 거야..

단지 네 범행에 참작할 만한 동기가 될 뿐야..

물론 여기서 "정당방위"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정당방위는 침해를 방위할 목적으로 행하였을 떄 성립하는 거지..

선빵에 대한 복수를 정당화하기위해 준비된 조항이 아니라는 거..

경찰하고 검찰의 의견이 다르다는 게..

너를 더 억울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

원래 경찰하고 검찰하고 기소에 대한 견해가 다르면.

검찰이 이기는 거야..

정히 억울하면 정식재판 청구해..

만약 법원의 견해가 검찰하고 다르면..

처벌을 면할 수 있을 테니까.

억울한 네 마음에 흡족한 답변이 아니라서 미안하긴 한데..

그래도 계속 억울해 하는 것보다는

이게 더 네 마음에 나을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거야..


2015년 12월 30일 수요일

표창원이 야당 지지자들로부터 다구리를 당한 적이 있다...





작년 봄. 세월호 참사 직후의 일이다. 표창원이 야당 지지자들로부터 다구리를 당한 적이 있다.  "세월호 참사의 해결은 ‘박근혜를 잊을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라는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당시 지식인으로서 당연히 할수 있는 말을 한 것 같은데 그날은 하루 종일 트위터에서 다구리 당했다. 하여간, 이쪽이든 저쪽이든, 자기 생각이랑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는 용납하지 못하는 족속들이란.

오늘 MBN 인터뷰를 보고 환호하는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을 보니, 문득 그 때 생각이 난다.  명색이 심리학자다.  그런데, 지금까지 대중들을 기분 좋게 만들자고, 말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표창원 교수에게  한번도 발견해본적은 없다.  몰라서가 아닐 것이다.  어떻게 빨아줘야 대중들이 좋아할 지 어쩌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 까닭은  어쩌면,. 그렇게 하기엔 표 교수의 비위가 약하기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오늘 MBN 인터뷰를 보면서 몇 번씩 들었다.

정치인에게는 표의 등가성이 있다. 무식한 표나 똑똑한 표나 다 같은 한표다.  반면, 달리 학자는 진리를 추구한다. 표창원, 그는 곱씹어볼 수록  정치인보다는 학자가 어울리는 사람이다.

문제는 앞으로 정치인이 된 학자 표창원을 바라볼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자들이다. 이들은 너무 뜨겁다. "노무현 관장사" 라는 제목을 뽑은 한겨레 앞에서, 국회의원 후보 권은희를 검증하는 뉴스타파 앞에서 이들이 냉정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얼마나 뜨거워질 수 있었는지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지금 표창원을 뜨겁게 받아들이는 이들은.. 과연 앞으로 표창원을 어떤 온도로 바라볼까? 정치인 표창원 앞에서 다시 한번 그들의 뜨거움을 확인할 수 밖에 없는 슬픈 순간. 그 시간이  머지 않았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지금 뜨거운 마음으로 표창원 교수를 바라보는 더불어민주당지지자들은 명심하자.  같은편만 결집하는 정치지도자가 아니라 다른편을 설득하는 정치지도자가 되려면, 적에게 적용한 기준을 우리 편에게도 적용하는 공정성이 필요하다. 오늘 표창원 교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속시원함"은 바로 이러한 공정함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앞으로 표창원 교수의 기준이 우리를 향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과연 냉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일 능력이 있을까?  작년 표창원을 다구리했던 우리들의 모습을 성찰하며 미리 생각해 볼 일이다.

2015년 12월 27일 일요일

[가족간의 종교갈등] 초등학교 다니는 자식이 어느날 갑자기 교회에 나가겠다고 한다면..





아직 애인도 없는 처지다. 이런 내가 생길지도 모르는 자식 걱정을 하는 경우처럼 아직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가 있다.

혹시 나의 2세가 나와는 다른 종교적 선택을 하면 어쩌나 하는 고민을 할 때가 대표적이다. 사실 “가족 간의 종교갈등”은 호락호락한 문제가 아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 때문에 살인도 벌어지고, 무고한 사람을 살인자로 만들기도 한다. 볼테르로 하여금 “똘레랑스론”을 쓰게 한 것도 결국은 “가족 간의 종교갈등”이 바로 그 시발점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내가 열심히 성당에 다니던 시절엔 그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 때 나는 내 2세가 나와 다른 종교적 선택을 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당연히 가톨릭적인 인간으로 기르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을 줄 알았다. 나에게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당연한 진리를 그때 나는 외면하기 일쑤였다. 하물며 종교적 선택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나의 2세가 나와는 다른 종교적 선택을 하면 어쩌나? 이 고민은 내가 교회와 이별한 순간부터 벌어졌다. 그 녀석이 교회나 성당, 또는 절에 나간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지? 어느 날 갑자기 아들 녀석이 친구 따라 성당에 나가겠다고 하는 장면을 상상해보곤 했다.

그런데 이 고민을 현실로 직면하신 분이 페친 중에 계시나 보다. 철학자이시다. 이렇게 철학적인 고민을 많이 하시는 분들조차도, 자식 문제에까지 철학적인 판단을 하기엔 현실이 팍팍한 것일까? 아! 결국 부모가 된다는 건 바보가 되는 것인가?

나라면, 그래도 자녀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어떻게 자녀가 내 맘처럼 되길 바라나? 다만, 그 선택에 내가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랄 수 밖에. 그러려면 적어도 자녀와 충분한 대화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대화라는 게 생각보다 무지 귀찮고 지난한 일이다. 게다가 보통의 아빠들은 바쁘기 이를데 없다.

그래서 매우 슬프게도 결국 많은 부모들에 의해 폭력이 동원된다. 그게 다! 부모들에게 대화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바쁘시다잖는가? 한국에 사는 얘들이 민주사회의 건강한 시민으로 자라지 못하고, 결국 힘을 숭상하는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왜 진리의 힘을 불신하는가? 자유롭고 공개된 장소에서 진리가 허위를 이기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자녀 앞에서 진리의 힘을 불신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진리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진리란게 얼마나 비싸고 귀찮은 건데.. 게다가 본인 스스로가 자신이 진리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녀를 굴복시키려 하고 있다. 하긴 자녀처럼 쉽게 굴복시킬 수 있다고 여겨지는 상대 앞에서 귀찮게 대화를 동원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차라리 자녀 앞에서 솔직해지는 건 어떨까? 아버지도 (또는 어머니도) 진리와 허위를 완전히 구분하지 못하는 불완전하고 결점 많은 인간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을 부모로서 염려하는 이유를 최선을 다해 솔직하기 얘기해 주자.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교회에 나가겠다고 한다면? 그 때는 답이 없다. 가지 말란다고 해서 안 갈 얘가 아니다. 부모 몰래 교회에 나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부모자녀간의 소통의을 끈을 유지하는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확실한 것은 자신이 자녀를 마음대로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부모치고, 이런 소통의 끈을 잘 유지하고 있는 사이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언젠가 성매매 처벌을 반대하는 주장을 피다가 굉장히 도발적인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네 딸이 성매매를 하겠다고 하면 어쩔래?” 그 때 나는 진짜로 내 딸이 성매매를 하겠다고 나서는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고야 말았다. 심사숙고 끝에 내놓은 내 진심어린 대답은 이러했다.

“딸에게 성매매를 권장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매매를 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막을 방법도 나에겐 없습니다. 내가 하랜다고 하고, 하지말랜다고 하지않겠습니까? 다만, 만약 그들이 성매매와 관련해서 저에게 진로에 대한 상의를 해온다면, 난 다행스럽고 기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동안 내가 그들과 굉장히 잘 소통해왔다는 뜻일테니까요. 아빠에게 자신의 성매매에 대해 상의를 할 만큼 친밀한 딸을 저는 일찌기 본적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