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나이에 맞는 생각,
제 나이에 맞는 행동. 그리고 삶.
그냥 평범하게 현명한 부모님 밑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대학 다니다가
직장 다니다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큰일 없이 그렇게 사는거?
어느 회사에 다니든, 사업을 하든
평범하게 연애하고
남들처럼 저렇게 사람들이랑 밥도 먹고
길거리도 다니고..
큰 일에 안 끼고 그냥 이렇게?
사실 내 나이에 사회적 이렇게 ..
회색 세상이라고 하죠?
이렇게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많이 없어요
정치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
나는 그렇게 살고 싶은 거예요.
내 행복. 내 삶에 신경 쓰면서...
그런데 그렇게 안 살잖아요?
오지랖이 넓어서 그래요. 잘 안돼요.
그러니까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게
내 꿈이라고. 꿈..
엄마는 아빠를 많이 사랑했다. 부산까지 아빠를 따라온 엄마가 미혼모가 되었을 때 엄마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할머니와 고모의 손에 집에 들여졌을 때, 아빠는 소리를 질렀다. “왜 데리고 왔냐고? 고아원에나 보내라고!” 다행히 고아원에 보내지진 않았다. 할머니와 고모 덕이었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친엄마가 나타났다. 미국에서 총 맞아 죽었다던 엄마였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학교를 자퇴했다. 머리가 나쁘지 않았던지, 검정고시를 통해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느 날 엄마 같던 고모가 자살을 했다. 약을 먹었다. 할머니와 열일곱 살 조카가 보는 앞에서였다. 119에 신고를 했지만, 어린 조카의 말을 믿어주질 않았다. 장난전화 취급했다. 구급차가 도착한 것은 신고한 후 40분이 지나서였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고모는 이미 숨져있었다.
엄마 같았던 고모의 죽음. 마음껏 슬퍼할 수도 없었다. 고모가 자살할 때, 조카와 싸웠다는 얘기가 돌았다. 심지어 신문에서도 확인하지 않은 사실을 써댔다. 할머니와 함께 경찰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유족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던 경찰.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 모두가 미웠다. 그래도 유족인데...
고등학교를 그만두었다. 할머니가 계시던 집을 떠났다. 독립했다. 열일곱 살이었다.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한 끼 먹는 게 급할 때도 있었다. 버터구이 오징어를 파는 알바, 피팅 모델, 일본에서 식당운영도 해봤다. 호떡도 팔았다. 삼겹살도 팔았다. 명품샵도 운영해봤다. 옷가게도 해봤다. 스스로 생각해도 직업이 참 많았다. 독하게 살았다.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유혹도 많았다. 그래도 마음속의 선은 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특히 섹스만큼은 온전히 자유로운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내가 내 몸도 되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먹는 즐거움.
사랑을 하는 즐거움.
섹스를 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그런 즐거움을
돈을 받고 팔기 싫은 거죠.
내 즐거움을 팔기 싫으니까..
그거 하나는 철저하게 지켜서..
사람은 그 때마다 나이에 걸 맞는 일이 있다. 지나보니, 어린 가혜가 스스로 안타깝고 안쓰럽다. 그 나이의 다른 아이들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모습을 보면 감정적으로 자유로워지질 않았다. 그들의 슬픔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한 고아원과도 연을 맺었다. 어쩌면, 그 고아원에서 자랄 수도 있었다.
그 날, 어쩌면 별 볼일 없을 지도 모르는 잠수경험을 믿고 팽목항으로 달려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아이들이 꼬록꼬록 잠겨가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이미 열일곱 살 때 고모가 죽어가는 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텔레비전만 보고, 인터넷에서 키보드만 두드리며 있을 순 없었다.
베테랑 잠수사는 아니다. 사람을 구조해보지 않았으니까. 다만, 깊은 수심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시야확보가 어려운 야간 다이빙 경험도 있다. 그냥 한 사람이라도 살려보자. 구해보자.
그렇게 도착한 팽목항.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대부분의 민간잠수사들도 투입될 수 없었다. 흉흉한 말들이 돌았다. 답답했다. 패닉이 왔다. 얘들은 물속에서 꼬록꼬록 죽어가고 있을 텐데, 해경이 민간 잠수사들의 투입을 거부하는 이유는 가지가지였다.
방송에서 말하는 상황은 딴 세상이었다. 550명 투입. 120대 헬기. 현장에서의 분위기는 냉소적이었다. “구라치네” “거짓말 하네..” “저봐라 저~” 사고해역의 상황은 잘 몰랐다. 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국은 바지선조차 대주질 않았다.
이미 투입되었던 민간잠수부들의 입에서 생존자 얘기가 나왔다. ‘생존자 확인했다.’ ‘신호를 주고 받았’고. 심지어 ‘대화도 했다’고 했다 . 대화? 이상했다. 잠수를 해봤기 때문에 안다. “어떻게 물속에서 대화가 가능해요? 물 밖에서 했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수면 위에 나와 있는 부분, 그 밖에서 커뮤니테이션이 되었다고 했다.
눈이 뒤집혔다. ‘아! 그런데 왜 안 되는 거야?’ ‘왜 지금 구조를 제대로 안하는 거지?’ ‘큰일 났다. 여기는 고립되어 있구나.’ 마침 MBN 뉴스제작진이 인터뷰를 요청했다.
“에어포켓에 서른 세 명 생존자 있다는 얘기들이 있다.” MBN 제작진이 문자로 보낸 예상 질문지에 담겨져 있는 내용이었다. 제작진은 확인을 부탁했다. 그 질문을 할 거라는 의미였다. 현장에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MBN이라는 뉴스에서 이런 것을 좀 알아봐달라고 하는데 어떻냐? 하나같이 손사래를 쳤다.
“인터뷰를 그렇게 하는 것은 좋은데. 나는 하기 싫다” “왜요? 지금 텔레비전에서는 종편에서는 550명 투입이다 뭐다 이렇게 하고 있는데 현장은 그게 아니라면서요, 다 뻥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안 해요? 왜 못해요?” “야! 너 그렇게 얘기하면 정부에서 발언.. 정부에서 한 게 있는데.. 너 안 돼!! 골치 아파져! 머리 아파져! 하지 마~ ”
4월 18일 새벽. 결국 직접 인터뷰에 나섰다. 인터뷰가 끝나자, 다 잘했다고 했다. 민간잠수사들과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격려했다. “이 얘기는 누군가는 했어야 했다. 잘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을 한 대가는 혹독했다.
느닷없이 전화가 빗발쳤다. 1분에 전화가 10여 통이 왔다. 모든 전화 수신거절을 설정해 놨다. 욕설 문자도 쇄도했다. 모두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문자가 하도 많이 오니, 뭘 누를 수도 없었다. 연락을 누군가에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문자를 확인할 정신도 아니었다. 인터넷은 확인할 정신도 없었다.
인터뷰 당일부터 인터넷에서는 경찰발 홍가혜 잠적설이 퍼졌다. 경찰과 연락이 되자마자, 출두를 약속했다. 출두하기로 한 전날 자진 출두했다. 102일 감옥생활의 시작이었다.
경찰조사에서 수사관이 물었다. “티아라 사촌 사칭한적 있나?” “아닌데요?” 뭐지 싶었다. 검찰조사에서 담당수사관이 물었다. “연예부기자 김용호씨를 아나?” 그때서야 김용호가 뭔가 크게 한판 했다는 걸 알았다. “해경명예훼손이라면서요, 그거랑 이거랑 내가 옛날에 이랬다 저랬다더라 하는 카더라랑 뭐가 중요하죠? 중요하면 얘기할게요.”
병든 할머니가 면회를 오셨다. 수감된 후 한 달쯤 후였다. 파킨슨병. 근육들이 파괴가 되는 병. 종국에는 밥도 혼자 못 드시고, 화장실도 혼자 못가시고 걷지도 못 하게 되는 병. 근육이 제어가 되지 않기 때문에 걸으면 스톱이 안 되기도 하신다. 특별한 치료법도 없다. 지금도 손을 떠신다. 몸이 많이 아프실 때는 움직이지를 못 해서 어디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분도 아니다. 장거리여행도 힘드신 분.
경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경찰이 물었었다. 가족들한테 알려줄 사람 있냐고. “할머니한테 알려줄까요?” “절대 알리지 마라. 집에. 다른 사람에게는 상관없지만 할머니한테는 이 일을 모르게 하라” 부탁했었다. 그런데 언론에서 하도 많이 떠들고, 이웃사람들까지 와서 한마디씩 거드니, 할머니라고 모르실 수는 없었다. 움직이지도 못하시는 분이 수감 한 달 후에 면회를 오셨다. “내 새끼 어떡하냐고.. 내 새끼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내 새끼 어떡하냐.. 내 새끼 불쌍해서 어떡하냐.. ”
아무 말도 안 나왔다. 아무 말도 못했다. 다른 변명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 미안해. 다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진실은 밝혀진다. 할머니 내 걱정하지 말고, 나 여기서 밥도 잘 먹고 잘 자고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할머니가 말했다. “잘 했다. 너 다이빙 배우러 다닌다고 하는 거 다이빙하러 다닌 거 할머니가 알고 그거 거짓말 아니라는 거 알고 네 성격상 애들을 살리려고 간 것도 안다. 가혜야, 너무 억울해 하지 마라. 억울하다 생각하지 마라. 너는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했다. 네가 아니었어도 다른 사람이 했어도 너처럼 이렇게 됐을 거다. 잘 했다.”
고마웠다. 키워주신 친할머니. 할머니는 평생 그 동네에 살면서, 다른 분들한테 피해 한번 안 끼치고 헌신적으로 사셨다. 이런 할머니에게 이웃사람들이 찾아와서 입방아들을 찌고 갔단다. “가혜가 거짓말해서 잡혀갔대.” “가혜.. 거짓말해서 감옥 갔다며?” 우리 할머니는 그게 아닌 거 아는데.. 할머니는 미치시는 노릇이셨을 게다.
미안해요. 할머니한테 제일 미안해요.
아빠 엄마보다 미안한 건 할머니..
나를 키워주셨으니까.
내가 이런 성격이 생겼고.
이렇게 살고 이렇게 예쁘게...
저는 제가 얼굴이 예쁜 게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을 항상 할 수 있고,
이렇게.. 남들 위해서 살 수 있는 이런 것들이
저희 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요?
할머니의 교육, 가르침으로..
그렇게 할머니는 나를 예쁘게 키워주셨는데,
나는 국민악녀가 되었잖아요?
그게 할머니한테 미안하죠.
그렇지만 저희 할머니는.. 고마운 게 그거에요.
이런 저를 사랑한다고 하시고.
잘했다고 해주시고.
수감된 후 한 달은 독방에 있었다. CCTV가 스물네 시간 가동되는 곳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혼거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검찰조사가 끝난 후였다. 그 안에서도 유명했다. 다들 거짓말쟁이 유언비어유포자로 알고 있었다. 이지메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무시했다. 재판에서 유리하게 이런 증언이 있었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그 말조차 믿지 않았다. 말을 막 뱉는 스타일이라 더더욱 그랬다. 사기범조차 말끝마다 “거짓말해서 들어 온 년” 운운했다. 그 안에 있으면 사람들이랑 다투기도 하는 법이다. 무슨 말을 하면 교도관들마저도 거짓말로 받아 들였다.
평생 이렇게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힌 체 살아야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도 나를 이렇게 무시하고 괄시하고 하는구나. 사실이라고 하는데도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구나. 세상에 혼자 있는 기분이었다. 사막에 나 혼자 있는 기분. 가위에 눌린 것 같은데 의식은 있는데 소리를 치는데 아무도 내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 남자친구의 존재가 큰 위로였다.
내가 네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아는데
언론에서는 그렇게 떠들어 대니까
누군가한테 내가
홍가혜 남자친구라는 말도 못 할 뿐 아니라
자기네들 술 먹으러 가는 회식자리에서도
제 얘기가 나오고 이랬데요.
화가 났대요 많이. 그래서 그렇게 얘기 했데요
남자친구도 그렇게 얘기 했데요.
참 세상 무섭다.
자기 이제 자기 위에 사람한테
그렇게 얘기 했데요
참 세상은 무서운 것 같지 않습니까?
홍가혜 사건을 보면 좀 그렇지 않냐고..
그 사람이 무슨 이득이 있어서
거기 가가지구 그렇게 했겠냐?
모든 걸 지금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데
민간잠수부 막은 것도
이렇게 사실로 들어나고 있는데
이런 거 보면 참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인 거 같다고
그냥 제삼자 얘기 하듯이
그렇게 얘기를 했더니
다들 반응이 다들 반응이 그랬데요.
쟤가 뭔 말하나.. 쟤가 뭔 말하나..
그러면서 또 개중에는 그래 억울한 거 같더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때 당시에 뭔가를 하려고 해도
이미 저는 잊힌 사람이 되었어요.
그 때 안에 들어가면서 어떻게 됐는지
사람들이 잘 모를 뿐 아니라
그렇잖아요? 기사한 건 안 났으니까
수감되고 나서는 잊힌 사람이 된 거죠.
수감된 사람들과 사이가 좋아진 건, 같이 보던 텔레비전 뉴스에 어느 날 유가족들이 불처벌 탄원서를 냈다는 게 방송된 이후다. “홍가혜씨 말에 뭐 공감을 하고 사실인 부분들이 많다.” 식의 인터뷰가 방송되자, 비로소 같은 방 사람들이 믿어주기 시작했다.
7월 30일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보석금 500만원을 공탁하는 조건이었다. 할머니가 보증보험을 끊어서 보석금을 해결해주셨다. 같은 방 재소자들이 믿어주기 시작한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때였다.
세상에 나와 인터넷을 보니 기가 막혔다. 눈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티아라 사촌 사칭, 연예부 기자 사칭, 자신을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밝힌 한 악플러까지. 안에서도 조사받을 때 얼핏얼핏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수감된 100일 동안 국민쌍년이 되어 있었다.
목을 매려고도 했다. 달리는 차에 뛰어들려고도 했다.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예전에 밝던 모습이 없어졌다. 만날 인터넷 검색하면서 힘들어하고 울고, 밥을 아예 안 먹거나 폭식을 하고, 잠도 못자고, 남자친구 말 한마디에 예민해졌다. 자주 싸우게 됐다.
남자친구가 많이 힘들어했다. 진짜 많이 힘들었을 거다. 오죽하면 울면서 그랬다. “나도 피해자라고.. 나도 세월호의 피해자다.” 남자친구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자신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옛날에 그 모습이.. 밝고 긍정적이고 그런 모습들이 없어졌으니까.
남자친구가 없을 때
제가 목을 맨 적이 있어요.
근데 남자친구가
뭔가 이상해서 들어왔었던 거죠
바로.. 그런 것도 있었고..
한번은 너무 답답해서 집에만 있었거든요 제가?
답답해서 나와 가지고 씻지도 않고 나와서
차 도로에 1시간을
가만히 앉아 있은 적이 있어요.
차 그.. 인도있는 거기.. 앉아서
그냥 .. 앉아가지고 멍 하게
너무 답답 했어요.
그 '왜'라는 단어하나가 저를
그렇게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아요.
“얼마나 힘들지 알 거 같다.” “힘내세요.” 이런 말을 들어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났다. 웃기는 소리였다. ‘지들이 뭘 얼마나 알아? 뭐? 아픔을 알아? 이렇게 지금 나오고 나서 할 게 아니라 들어 가 있을 때 좀 해 주지. 지금 와서 자기네들이 뭘 안다고. 나에 대해서 정말 뭘 안다고. 왜 마치 나를 다 안다는 식으로 얘기를 할까’ 싶었다. 그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표현할 수가 없다. 지금도 마녀사냥에 대해 떠올리고 생각하고 하면 너무 힘들다.
출구가 안 보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래도 그나마 많이 나아진 것은 이제 법정에서 다 사실로 밝혀졌으니까. 진상 규명까진 아니더라도 그 때 했던 발언이 다 사실로 밝혀졌으니까.
지금도 페이스북 메시지나 카톡으로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게 사실이냐 저게 사실이냐” 자기네들이 검색하면 지금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대답을 안 해주면 대답을 안 하는 걸 보니 너 그게 사실인가 보다 식이다. 대답 안 해주기도 곤란하다. 강요되는 폭력적 질문에 그런 기억 떠올리는 자체가 너무 고통스럽다. 사실이 아니니까.
위로가 되는 유일한 일은 세월호 유가족 분들을 만나는 일이다. 그 분들을 만나면 일단 마음이 편하다. 얘기를 나누면 공감이 된다. 서로 그 사건에 대해서 너무 잘 아니까. 그 분들도 다른 데서 얘기하지 못 하는 속 얘기들을 해주신다. 그런 걸 듣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유가족이 열분 정도. 가끔은 모르는 유가족 분들로부터도 카톡이 온다. 고맙다는 말들을 많이 하신다. 정작 드릴 말씀은 “죄송하다.”라는 말 밖에 없다.
그분들이 ‘고맙다.’
‘가혜씨가 있어서..
자기네들이 당한 일들을
정말 그대로 여과 없이 목격해 준 발언해 준
자기네들 대신에 발언 해 준 가혜씨가 있어서
우리가 숨통은 튀었다.’
그리고 미안하다. 나한테 말하는 게..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 했다. '
구속 됐다는 소리 듣고
석방하라고 강력하게 항의도 하긴 했지만
바로 구해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했다
뭐 이런 말들도 하시면서
어떤 분은 이제 얼마 전에
성호어머님이라고 언론에 나오시는 분인데
성호어머님이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가혜씨 버텨달라. 좀 더 버텨 달라.
역사에 중요한 사건의 증인이 된 걸 잊지 말고
당신은 이 사건에 있어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유일한 사람이 된 걸.. 유일한 사람이 된 걸...
유일한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이 사건에 있어서는 당신이
제일 유일한 사람이라고.. 이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이렇게 맨몸으로 뛰어 들어 그 분들을 위해 이렇게 했던 것. 어떻게 보면 그랬기 때문에 그 분들이 그렇게 표현하시는 지도 모른다. “유일한 사람” 이런 말씀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이제 지지해주는 분들이 많다. 그래도 그 분들의 달콤한 말에 일희일비하게 되진 않는다. 감사할 뿐이다.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러나 그걸 떠나서 위안을 받고 위로를 받는 곳은 유가족들뿐이다. 유가족 분들의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버틸 수 있는 버팀목이다.
이번 달에 선고공판이 있다. 유죄를 받을지, 무죄를 받을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밝혀질 부분들은 다 밝혀졌다. 유죄와 무죄. 그건 법리적인 싸움이니까. 재판부가 정치적인 눈치를 보지 않고 사실만 가지고 판결을 정의롭게 해줄 거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결과를 예단할 수는 없다.
이미 세월호가 정치적으로 많이 기울었다고들 한다. 이 사건도 어떻게 보면 세월호 사건 아닌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판결까지도 정치적으로 기울 수도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유죄가 되던 무죄가 되던 중요하지 않다.
아직도 이 나라를 법치국가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이제 국가를 신뢰할 수 없다. 검찰과 경찰. 검사가 그렇게 무리하게 기소를 했다. 취지는 왜곡되고 검사에 의해 마음대로 해석되었다. 믿고 있던 원칙들은 작동하지 않았다. 불구속수사원칙조차 지켜지지 않았다. 인격과 인권이 무너졌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보장받아할 권리. 그런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사람이 되었다.
원칙을 안 지키는 건 이미 우리나라 검찰의 현주소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사람마다 다른 법칙이 존재한다. 정미홍씨나 권은희씨나 정몽준 아들. 한명도 구속 안 되지 않았나? 힘없고 빽없으면 겪을 수 있는 일. 그래서 좀 더 많이 배워야겠다. 좀 더 내 힘을 길러야겠다. 계속 힘없고 빽없는 바보일 순 없다.
저는 이번 제가 이런 큰일을 겪고 나서
제가 큰일을 겪고 나서 이제 든 생각이에요
바뀐 생각이지만..
아! 꿈이라기보다는
아 내가 이런 일을 당했으니까
앞으로 이런 일을 해야지
뭐 이런 생각이 들 거 아녜요?
근데 어.. 저는 평범.. 아까도 얘기했지만
평범하게 살고 싶고
내 나이에 맞게 살고 싶거든요?
하지만 저도 언젠가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고
이렇게 하나의 가정의 엄마가 될 거잖아요?
내 자식한테 이렇게 얘기 해 주고 싶어요.
진실과 사실과 정의를 외치면
억울하게 마녀사냥 당하지 않고
배고파지지 않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깐 썩은 사회에서는
진실과 정의를 외치면
배고파지고 왕따가 되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게 되지만
더 이상 썩은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진실과 정의를 외치면 배 안고파지고
왕따 안 되고 억울한 감옥살이 할 일 없다.
내가 할머니한테 받았던 가르침 그대로
양심을 항상 살찌우고 살아라.
그렇게 살아도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준다는 말을
해 주고 싶어요.
엉뚱한 생각이지만, 만약 무죄를 받는다면, 수사했던 경찰과 기소했던 검사를 찾아가고 싶다. 왜 그랬는지 묻고 싶다. 그러고 나서 다 이제.. 다 내려놓고 돌아가고 싶다. 예전으로..
[심층인터뷰] 국가적 마녀사냥 피해자 홍가혜를 만나다 1 http://t.co/WYYRnBatus 열심히 인터뷰하고 열심히 썼습니다. 읽으신후에 하트 한번 눌러주시면 많은 분들이 읽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pic.twitter.com/T8JnmVHIMe
— http ://똘.net (@dominic74jkh) 2014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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