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12일 목요일
우리 안의 박정희. 문재인 안의 박정희
박정희. 공과 과를 가진 역사의 문제적 인물이다. 잔당들이 내세우는 빛나는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를 왜 긍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가? 그것은 박정희라는 역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순간. 우리는 후세에게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고 말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의 집권을 막는다는 절박한 목적을 위해 그깟 참배가 대수냐고? 박정희도 그랬다. 민생고라는 절박한 목적을 내세운 그에겐 못할 짓은 없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그깟 죽어버린 독재자들의 유골 앞에서 무릎을 꿇으면 어떻고, 눈물을 흘리면 어떤가." 문제는 그 죽어버린 독재자의 유골이 그냥 해골바가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연 그 독재자는 진정으로 죽어버렸는가? 정신차리자. 30년 전에 죽은 그 독재자가 지금의 대통령을 만드는 게 현실이다.
"국정원과 검찰, 경찰, 사법부, 언론, 재벌, 학계, 새누리당에서 10년간 성장하고 탄탄하게 그 세력을 형성한 '거악'들을 참배 하나에도 정의와 무능이라는 칼날을 드리우는 세력이 상대할 수 있냐"고? 글쎄다. 결과를 예단할 순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란 거기까지 가는 과정의 정당함 아니던가? 민주주의로는 거악들을 직면할 수 없다고 치자. 그렇게 이길 수 없다면 민주주의와 헌정질서까지 포기할 셈인가?
"대한민국에게 필요한 것은 한 쪽의 야만에 '야만'으로 대항할 수 있는 강한 힘"이라고? 그렇다면, 우리가 박정희와 무엇이 다른가?
30대의 네티즌 “모비딕”은 민주화 운동 기간에 성장한 4-50대의 사고방식들이 싫단다. 나또한 그들이 싫다. 그런데 이유는 모비딕과 정반대다. 내가 그들이 싫은 이유는 그들의 사고방식이 바로 모비딕과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비딕처럼 초인을 요구한다. 그들은 모비딕처럼 괴물에 맞서는 방법으로 괴물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유연성? 좋은 얘기다. 그러나 유연성에도 분별력은 있어야 한다. 유연성에 대해 가지는 분별력을 구 시대의 방식 치부하는 건, 유연성이 아니라 어리광이다.
그런 면에서 단지 물리적인 나이 때문에 모비딕에 의해 물뚝심송이 다른 4~50대와 동일시되는 건 부당하다. 물뚝심송이 얼마나 철이 없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40대의 물뚝심송과 30대의 모비딕. 민주화 운동 기간에 성장한 4-50대의 사고방식과 누가 더 가까운가? 물리적인 나이가 아니라 사고를 따지자. 당연히 모비딕이다.
그러한 모비딕이 물리적인 나이를 내세워 물뚝심송의 사고를 민주화 운동 기간에 성장한 4-50대의 사고방식과 동일시한다. 과정을 중시하는게 구시대의 방식이고, 결과를 중시하는 자신이 신세대라는 거다.
니체는 말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노무현이 실패했다고? 글쎄다. 내가 볼 때 노무현같이 성공한 지도자는 없었다. 물론 그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다. 부족한 점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괴물과 싸우면서 그 싸움 속에서 괴물이 되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큰 성공인지 왜 평가할 수 없는가?
노무현같이 성공한 지도자를 좀더 많이 만드는 거. 그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그것만이 과정의 성공을 결과의 성공으로 이끄는 유일한 방법이다. 초인 한명으로 첫술에 배부르리라는 망상부터 집어치워야 한다. 그런 망상이 바로 박정희와 그 잔당들의 방식이다. 김일성을 내세워 자신을 정당화한 박정희를 어쩌면 그토록 닮아가는가?
"저도 박정희 대통령 묘역에 언제든지 참배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가해자측의 과거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통합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 2012년 9월 18일 문재인의 말이다. 반성은 없었다, 꼼수 만으로 통합이 가능하지 않은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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