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5일 일요일

김용민의 결단을 기대하며 써내려간 김용민 변론


인권 감수성이니 어쩌니 하는 비판에 부화뇌동하고 싶지는 않다. 그가 실제로 라이스를 강간 살인당하길 바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실제로 지하철에서 엘리베이터를 없애고 계단을 통으로 만들기 원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깐에는 웃자고 한 소리다.

 그의 웃자고 한 소리가 금도를 어긋나게 된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이른바 ‘카타르시스 커뮤니케이션’을 선호하는 우리 사회의 패거리 문화가 무관치 않다. 데이터를 합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해서 다른 사람과 접근하든가 설득하든가 하는 과정이 익숙치 않기 때문이다. 설득을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생각을 일방적으로 주장만 하면 되는 일종의 ‘배설 커뮤니케이션’에 우리 사회가 젖어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커뮤니케이션이 힘을 얻게 된다. 물론 이때, 그 서클 안에서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지지도도 오른다. 우리 정치문화가 바로 그랬다.

관타나모 캠프에서 벌어진 미군의 성폭행이 나쁘다는 건 사실 설득이 필요 없는 문제다. 그저 그 사건에 대한 그 분노를 결집하고, 해소시켜줄 풍자가 야유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김용민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게다가 분노의 번짓수도 한참 틀렸다. 라이스가 강간을 옹호하는 미 군국문화의 아이콘은 아니지 않는가?

니체는 말했다. “괴물과 맞서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동안 들여다 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 될것이다.” 오오.. 괴물과 맞서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불쌍한 자여. 김용민...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의 김용민은 이렇게 괴물이 되었었던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양심 있는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를 용서할 수 있는 것과 정치인 김용민을 허락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아파도 할 수 없다. 새누리당 석호익 후보는 “구멍” 발언이 문제가 되어, 낙마했다. 그 때 포화를 쏘아대던 통합야권이여! 김용민에게는 다른 잣대를 들이댈 것인가?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던가?

아 이러니하게도, 이런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문화를 한 단계 성숙시키고 사회의 진보를 앞당길 수 있다. 물론 아깝다. 그 제물이 이미 후보등록을 마친 김용민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김용민을 버림으로써 더 큰 진보적 가치를 쟁취해야 한다.

통 합야권과 김용민은 결단해야 한다. 사실 이런 자충수는 수구들에게서 더 빈번하다. 지금 당장 김용민이 아깝다고, 앞으로 수많은 수구들 앞에서 눈 질끈 감아야할 가련한 신세로부터 자칭 진보개혁세력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는가? 그 점은 바로 지금 그 결단의 여부에 달렸다.  만에 하나 당선된다고 해도, 통합야권은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발칙한 상상력이 뇌리를 스친다. 만약 사퇴와 함께, 노원갑 무소속의 노동자 후보에게 김용민과 통합야권의 힘을 실어준다면 어떨까? 모르긴 해도, 김용민은 더 큰 정치적 자산을 얻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차피 지금은 완주를 해도 당선은 물 건너가지 않았나? 당에 부담이나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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