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가 물었다. 수범자의 “양심이나 도리에서 벗어지 않은 행위”를 형벌법규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처벌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아닌가?
강도질이나 강간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신념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사람의 신념은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의 영역에 속할까?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속한다.
헌 법상의 ‘양심의 자유’가 보장하고자 하는 ‘양심’은 민주적 다수의 사고나 가치관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현상으로서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2002헌가1) 양심은 그 대상이나 내용 또는 동기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으며, 특히 양심상의 결정이 이성적․합리적인가, 타당한가 또는 법질서나 사회규범, 도덕률과 일치하는가 하는 관점은 양심의 존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헌법재판소의 견해다.
물론 강도질이나 강간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신념이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의 영역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심 안에 머물러있을 때에 한한다. 그 신념이 “말이나 행동”으로, 외부에 표출되어 실현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가 된다.
양심결정의 자유와 양심실현의 자유
물 론 헌법 제19조가 보호하고 있는 양심의 자유는 양심형성의 자유와 양심적 결정의 자유를 포함하는 내심적 자유(forum internum)뿐만 아니라, 양심적 결정을 외부로 표현하고 실현할 수 있는 양심실현의 자유(forum externum)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헌법재판소는 양심의 자유는 어떤 이의 내심에 머무르는 한, 법률로도 제한할 수 없는 절대적 자유이지만, 그 내심에서 벗어나 외부에 표출될 수 있는 양심실현의 자유는 상대적 자유라고 한다. 법률에 의하여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양심의 자유는 비록 순수히 내심의 영역 안에 남아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내재적 한계설과 ‘양심이 내심의 작용으로 머물러 있는 경우는 물론 외부에 표명된 경우에도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절대적 무제약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절대적 무제약설을 채택할 경우, 문제되는 점이 많다. 사적보복이나 자경단 같은 사적정의실현행위 또한 양심의 실현행위라고 주장할 경우 그것을 제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 적보복이나 사적정의실현행위 뿐만이 아니다. 절대적무제약설의 의하자면, 앞서 말한 것과 같은 강도질이나 강간질을 포함한 모든 범법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다. 양심의 실현행위라는 이유로다. 그것은 법에 의한 보호를 무의미하게 만들어서, 애초에 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법위반사실의 공표명령
누군가 법위반사실의 공표명령에 의해, 자신의 법위반사실을 공표하게 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더고 치자. 그 법위반사실의 공표명령이 내면에 머물러 있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일까?
그 자신이 법을 위반했다는 그 공표 속에는 “법에 대해 옳거나 그르다”는 가치평가나 양심의 판단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단지 국회에 의해 제정된 법을 위반했다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인정일 뿐이다.
그렇다면, 법위반사실의 공표명령이 무죄추정원칙이나 진술거부권을 침해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적어도 내면에 머물러 있는 양심에 대한 자유에는 반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준법서약
준법서약 역시 그 안에 “법에 대해 옳거나 그르다”는 가치평가나 양심의 판단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단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옳던 그르건, 법에 위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약속이 담겨져 있을 뿐이다.
법 이 맘에 들지 않더라도 지켜야 할 의무가 모든 국민에게 주어져 있고, “국가의 존립과 기능은 국민의 국법질서에 대한 순종의무를 그 당연한 이념적 기초로 하고 있”는 점에 살펴볼 때, 이러한 약속을 요구하고, 그 약속 여부를 가석방 심사에 대해 판단근거로 삼는 것을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 하다.
판사의 법적양심
가 석방을 앞둔 수형자들에게만 자신의 양심과 반할 수도 있는 법에 대해 복종의무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법에 대한 복종의무는 모든 국민을 기속한다.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어긋나는 법률에 복종한다는 것은 그 법률이 옳다고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적어도 국민들에게 어떤 현행 법률에 대한 지지를 강요하지 않는한, 법률에 대한 복종의무는 양심의 자유와 무관하다.
이것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법관에게 재판하라고 명하더라도, 그것이 법관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법률에 의해 재판하라는 것이 법관에게 그 법이 옳다고 인정하라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 런데, 법관들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재판하여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심지어 평소 성매매에 대한 형사처벌에 대해 반대입장을 표명해온 판사가 자신의 재판에서 성매매특별법에 의거 성매수자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치자. 혹시 “양심에 따라 재판”하여야 한다는 헌법의 명령을 마치 어긴 양, 이중인격자취급을 하는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 나, 판사가 재판을 할 때, 그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양심”은 자신의 양심이나 신념이 아니다. 헌법제103조가 명하고 있는 것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자신의 양심이 아니라) ‘그 양심’ ( 다시 말하면 ‘헌법과 법률에 대한 양심’ ) 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헌법 제27조를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관의 양심이 아닌)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되어 있다.
하긴, 국민들에게는 법률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면서, 법관에게는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 재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말이 안되지 않겠는가?
전향
그렇다면, 준법서약제도 이전에 있었던 전향제도는 어떠한가?
국가의 전향공작에 의해, 만기석방을 앞둔 비전향자들에 대한 다양한 탄압이 있었다는 증언이 수도 없었지만, 여기서 그것은 잠시 논외로 하자.
구 사회안전법 제7조 제1호의 경우, 보안처분의 면제요건으로 ‘반공정신이 확립되었을 것’을 규정을 둔 적이 있었다. 이것은 보안처분기간의 갱신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처분대상자의 신념이나 사상을 신문하고 전향의 의사를 확인하는 근거가 되곤했다.
여 기에 대해 대법원은 97년도에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대상자가 같은 법 제6조 소정의 ‘죄를 다시 범할 현저한 위험성’의 유무를 판단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 불과할 뿐 전향의 의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를 두고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규정에 반한다고 볼 수 없다.”
또한 2002년에는 양심의 영역과 관련되는 사항을 규율하는 실정법이라고 해도, 그것을 위반하는 경우 이행강제, 처벌 또는 법적 불이익의 부과 등 법적 강제가 따라야만 비로소 그 실정법이 양심의 자유를 제한했다고 볼 것이라는 취지의 판결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내려졌다.
동의하기 어렵긴 하지만, 97년도 대법원판례와 2002년 헌법재판소판례에 따르자면, 전향제도 역시 그것이 양심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거나 침해일 수 없다. 그들에게 전향을 확인하는 것은 ‘죄를 다시 범할 현저한 위험성’의 유무를 판단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설사 그 확인 결과에 따라 처분대상자가 어떤 불이익을 받더라도 그러하다. 그것은 처벌과 같은 법적 불이익이 아니라, 보안처분면제를 받을 기회가 줄어드는 사실상의 불이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2008년도에는 헌법재판소가 양심의 자유에 대해 기존의 자신의 견해와 다른 견해를 내놓아 주목된다. “비록 법적 강제수단이 없더라도 사실상 내지 간접적인 강제수단에 의하여 인간 내심과 다른 내용의 실현을 강요하고 인간의 정신활동의 자유를 제한하며 인격의 자유로운 형성과 발현을 방해한다면, 이 또한 양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제 정리한다.
이석기의 행동이 불법이 아니라는 이정희의 확신은 양심의 자유에 의해 보장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가치평가나 양심의 판단이 아니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문제다. 그러므로 양심의 자유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양 심이나 도리에서 벗어난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법률에 위반되어 처벌을 면하지 못하는 불법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생각은 자유롭게 하라고 하면서, 그 생각을 “말한다”고 해서 처벌한다면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그게 내란음모죄와 국가보안법이다.
총기를 소지할 자유를 국가에 대항할 자유의 일환으로 여긴 나머지 헌법적인 권리로 보장하는 미국을 바라보자면, 말만 해도 잡아가는 대한민국의 법은 확실히 끔찍하다.
이렇게 맘에 안드는 법을 무시하는 건, 백번 양보해서 “양심의 자유”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걸 실현했다고 해서 처벌을 면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건 자가당착이다.
매우 슬프게도 “국가안보”를 위해 법률로서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우리나라 헌법이다.
물론 이 슬픈 현실은 바로 잡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현실은 그대로 둔 채, 그 법현실에 복종하는 공무원들을 두고 “양심의 자유”운운하며 뭐라고 하는 건, 번짓수가 틀려도 한참 틀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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