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5일 일요일

인권, 죄


10년이 될지,
30년이 될지 모르지만,
한 10년쯤 후에 출판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책이 있다.
그 책의 머리말로 써먹으려고 써놓은 글.



인권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권리”로 정의된다.   

이 정의는  
인권의 개념에 대한 사람들의 합의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할 것을 예정하고 있다.  
추정이라는 것은  
반증으로 뒤집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소한의 반증 이전에 가지고 있는  
인간의 추정된 권리는  
매우 슬프게도 문화적 습속과 감수성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시대와 사회에 따른  변화를 예정하는 것은  
인권 개념에 대한  인류의 인지능력일 뿐,  
인권이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도 대체 무슨 소리인가?  
인권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권리라는 뜻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사람말이다.  
노예해방 이전에 존재하던 흑인 노예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인권과  
똑같은 인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추정력이 깨지는 과정을 통해  
오늘날에서야 비로소  
그것이 인권침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

필자는 “죄”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 옳지 않다고  
추정되는 행동”이 존재한다는 것.  
죄에 대한 인식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화하지만,  
그 죄 자체는  
동서고금을 통해 변하지 않는다는 것.  
끊임없는 반증을 통해  
인류의 죄에 대한 감각을  
“죄”에 최대한 가깝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살면서 놓지지 말아야 할 숙제라는 것이다.

“존포트 만”이 지은  
“죄의 역사”라는 책이 있다.  
죄는 역사에 따라 변화한댄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려면,  
이 책의 “새로 등장한 죄” 꼭지의  
소제목들을 읽어보면 된다.  

환경파괴, 인생의 실패 : 잠재력을 사장시키는 행위, 우울증,  
아동학대, 아내학대, 성희롱, 유대인대학살의 부인, 동성애 공포증,  
할례, 인종차별, 배타적인 종교관, 음주운전 같은 것들이  
“새로 등장한 죄”라고 언급되어있다.  
과거에는 이런 것들이 죄가 아니었댄다.

엄밀히 말하면, 존포트만이 말하는 “죄의 역사”는  
“죄의 역사”라기 보다는  
“죄를 규정하는 사회의 역사”이자 “문화규범의 역사”인 셈이다.  
하긴 죄가 사회 - 죄를 규정하는 사회 - 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죄에 대한 시대나 사회의 규정에 거부하는 것도 죄일 수도 있겠다.  
물론 인종차별이 습속화되어 있는 시절의 노예해방 전 인종차별과  
현대사회에서 인종차별이 가지는  
죄질이 같을 순 없다.

그 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예해방 전에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행동이  
과연 죄가 아니라고는 할 수 있을까?  
이해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별론으로 하자.  
만약 죄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고 한다면,  
죄는 “죄를 규정하는 사회에 대한 감각”과 동일시될 수 있다.  
눈치가 없어서, 죄를 규정하는 그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감각적으로 따르지 못하는 자는  
곧 “죄인”이된다는 소리다.

필자는 죄를 규정하는 그 사회의 판단이  
사회적 변화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의심한다.  
죄에 대한 사회의 판단을  
사회적 변화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야 말로 죄라고,  
그것이 바로 사회적 죄라고 확신한다.  
적어도 이제는 죄를 규정하는 사회의 판단이  
사회적 변화가 아니라,  
이성적인 思惟들의 경쟁과 토론에 의해  
“추정”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래야 하는 시대에  
죄를 규정하는 사회에 대한  
이성적 思惟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이 제시하는 것은  
하나의 理想이고 추정이다.  
매우 슬프게도 미래의 어떤 사회도  
이러한 필자의 理想을  
완전히 수용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또한 다른 반증으로 인해  
필자의 주장이 뒤집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반증이 있기 전까지는,  
그 도달할 수 없는 理想이지만,  
최대한 그것에 가까워지는 것만이  
곧 인류의 공공선과 발전을 위해  
가장 최선이라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그 역시 결점투성이인 인간에 불과한 주제에,  
지식인의 천형을 짊어진 필자의,  
이 순간까지의 믿음과 소신이다.


이 글을 읽은 한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대학생 여지우다.  



인간의 사유가  
죄와 인권의 '절대이성'에 다다르면  
'인권 역사의 종말'이 오리라는 뜻인가요?


나는 답한다.  



일단,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사유는 죄와 인권의 절대이성에 도달할 수 없음.  
다만, 지 능력의 수준에서 최대한 가까이 가는게 가능할 뿐.

가사 그것이 가능하다고 전제한다고 해도...  
죄와 인권의 절대이성에 도달한 인류는  
자신의 상태가  
죄와 인권에 대한 절대 이성 상태라고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추정"중인 상태에서 고민을 거듭할 수 밖에 없고.

가사, 어떤 인류가  
자신이 죄와 인권에 대해  
절대이성에 도달한 것을 확인했다고 하더라도,  
앎과 실천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을 곧 인권 역사의 종말이라고 말할 수는 없음.



댜시 그 학생이 묻는다.  


절대이성의 존재를 가정/확신하더라도  
그것의 발견과 실천이라는 먼 길을 걸어야 하며,  
그런 일이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군요.


또 답한다.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을 인간에게 요구할 수는 없는 법임.  
먼 길을 거는 일? 충분히 가능한 일임.  
수학적으로 비유하자면,  
0에 도달할 수는 없으되 끊임없이 0에 수렴하고자  
최선을 다해 매진하고 있는 함수를 연상하면 되지 않을까?  
0에 좀더 가까워지는 것을 인류의 진보라고 할 수 있을 것임.



그 대학생 또 묻는다. 이 새끼 사람 더럽게 귀찮게 한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인권의 구체적인 목록을 살펴볼 때,  
이를테면 노동자의 단결권(세계인권선언 제23조 제4항)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임금노동이라는  
현대 산업사회의 지배적 생산관계를 전제로 한 것인데,  
이를 인간이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회적으로 구성된 제도를 바탕으로 규정되는 권리들은  
"의도적인 구성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또 답했다. 귀찮지만, 내가 봐준다. 자라나는 새싹이니까.  



세계인권선언문을 톺아보건대,  
인권에 대한 인류의 자각은  
극심한 인권침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루어졌음이 자명하고,  
( “Whereas disregard and contempt for human rights have resulted in barbarous acts which have outraged the conscience of mankind,” )
따라서 인권에 대한 확인(또는 인정, recognition) 의 모습 또한
그때까지 경험했던 극심한 인권침해의 모습을 반영할 수 밖에 없는 것임.

제23조4항(세계인권선언문) 는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권리 자체가 아니지만,  
그때까지 경험했던 극심한 인권침해로부터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권리”를 확인하고 보호할 목적으로,  
인간에게 부여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판단이 듬.  

(노동조합의 결성과 가입을 방해할 권리가 아무에게도 없으니,  
그런 짓 하지 않을 의무를 부여했다는 뜻임.  
또 다르게 생각해보자면, 20조1항의 예시조항이라고 볼 수도 있음. ) 

인권은,  
단지 인간의 권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인간의 의무이기도 함.  

(인권의 보장을  
신이나, 자연이나 동물에게  
요구할 수는 없는 법이므로..)

바꿔 말하면,  
인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으되,  
그것을 확인하고 보장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얘기임.

이런 측면에서 보면,  
발견의 대상으로서의 인권과  
발명의 대상으로서의 인권이  
공존할 수 있게 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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