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6일 금요일
김기종씨.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을 파괴한 건 우리였습니다.
"에효.. 테러로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데 왜 진보진영마저 일베스러워지는 건지"
김기종씨 당신이 저지른 사건을 보고 제가 처음 한 말입니다. 진보인지 보수인지 당신에 대해 별다른 고민 없는 상태에서 한 말이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일베나 군복입고 다니는 할아버지들, 새누리당 같은 사람들과 비교해볼 때, 그 순간 왠지 당신은 아마도 우리와 더 가깝다고 느꼈었나 봅니다.
지금 온나라가 아니 온세계가 당신을 규탄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진보이든 보수이든, 군복할아버지든, 세월호진상에 대한 진실규명을 원하는 사람이든.. 당신을 규탄하는데 이제 구분은 없습니다. 이제 누구든, 당신이 자기 편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입니다. 군복할아버지들은 당신을 기화로 종북세력을 척결하자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제 페친 중에 한분은 당신이 극우보수민족주의자일 뿐, 진보와 전혀 관계없다고 말합니다. 그 분은 당신을 진보라 이름붙여 진보전체를 종북몰이로 몰아가는 지금의 현상이 걱정스러우신 모양입니다. 피아를 구분하도록 훈련당해온 것은 진보나 보수의 구별이 없습니다.
묻습니다. 당신은 보수인가요? 아니면 진보인가요? 물론 한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 보수나 진보 둘 중에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것만큼 부질 없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생각해봅니다. 사회학자 조희연식 분류법에 따라 보자면, 당신은 아마도 경제적으로는 자유보다 평등에 가까운 "진보"이겠지요. 사회적으로는 자유보다는 권위주의에 가까운 "보수"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새누리당과 종미에 반대하는 "진보" 아니신가요?
그리고 별다른 고민 없이 다른 사람들처럼 단순한 진영논리로 살펴본다면, 일베나 군복입고 다니는 할아버지들, 새누리당 같은 사람들과 비교해볼 때, 왠지 당신은 아마도 우리와 더 가까워보인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군요.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되었나요?
어제 당신의 사건을 접한 이후에야 당신이 스물 아홉살 때 겪은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괴한들이 사무실에 습격해서..당신의 후배를 강간하고, 다른 후배를 집단구타하고 실신시키고 달아난 사건.. 오홍근 기자 테러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도 특수조직의 치밀한 사전계획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였다는 제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결국 미제사건이 되고 말았죠.
눈을 감고 당신이 되어 봅니다. 억울함, 죄책감. 그리고 패배감. 당신의 고통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당신은 평생을 그 사건 속에서 해방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갔습니다. 내가 당신이라면 어땠을까요?
88년 그날. "우리" 안에 있던 당신은 백색테러분자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파괴된 당신을 외면했습니다. 이미 파괴된 당신이 너무나 불편했나 봅니다. "우리"들의 외면은 끊임없는 당신을 더욱 파괴했을 것입니다.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그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좀더 연대했더라면, 오늘의 당신은 어땠을까?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철저하게 망가진 당신의 배후에는 다름 아닌 "우리"가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로부터 당신을 떠나보내려고 합니다. 그동안 당신을 외면했던 "우리"로서, 꽤나 염치없고 슬픈 선택입니다. 진보인지 보수인지 그 분류를 통해 적과 우리를 구분하던 시대와 함께 당신을 떠나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후세에게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할 수 없기에 내릴 수 밖에 없는 슬픈 선택입니다.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 박정희처럼 되어서는 안되니까요.
우리 안에서 우리가 될 수 없었던 당신을 아프게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제 적이 된 당신을 아프게 바라봅니다. 당신이 적이 될 수 밖에 없도록 몰아간 주제에 이제 당신을 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염치 없는 "우리"의 신세를 이해해주시겠습니까?
니체는 말했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동안 들여다 본다면 그 심연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 될것이다." 당신은 너무 오랫동안 괴물의 심연을 바라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당신을 내팽겨쳐준 "우리"로서, 끝까지 함께 당신과 함께 하지 못한채 당신을 외면해서 죄송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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