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뉴스 앵커가 곤욕이다. 최근 검거 압송되는 김길태를 스케치하면서, “마음고생이 심해서인지, 얼굴이 수척해보인다”라는 말을 했단 이유다.
분노한 네티즌들은 단단히 뿔났다.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살인한 범인에게 마음고생으로 수척해보인다는 말은 김길태의 변호사가 할 말이지, 사실보도를 해야할 언론이 할 말이 아니”랜다. 하긴, 인면수심의 사이코패스에게도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그도 인간이었다는 것이 곤혹스럽고, 불편할 수도 있다.
결국 성난 넷심에, YTN도 두손을 들었다.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자, “표현이 부적절했다”며 사과했단다. 코미디다. 엽기적이다. 과연 “마음고생이 심해서인지 얼굴이 수척해보인다”라는 말 속에 범인에 대한 어떤 특별한 배려가 담겨져 있는가?
흉악범을 향한 넷심의 분노는 이런 평범한 스케치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평범한 스케치는 범인에게도 배려라는 얘기다. 분노하는 자신들의 마음과 똑같지 않은 감정의 스케치는 그 역시 분노의 대상이 된다는 거다.
경찰은 압송과정에서 김길태의 얼굴을 노출했다. 기존의 마스크의 제공을 중단한 게 아니다. 쓰고 있던 마스크 조차 빼앗겼다. 이례적이다. 얼굴노출을 결정한 건, 법도 판사도 아니다. 시민의 분노에 힘을 얻은 수사팀이다.
“인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런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오히려 공익에 맞는 것 같다는 수사팀의 의견에 따라 이같이 결정했"단다. 지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한다. 왜? 판결까지 지들이 하지.
경찰은 “공개수배할 때 이미 사진이 공개돼 굳이 얼굴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다. 불가피하게 한번 침해된 인권이기 때문에, 계속 침해되어도 괜찮다는 논리다. 검거를 위해, 얼굴공개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의 얼굴 공개와 압송시의 얼굴 공개는 분명 다르다. 목적의 정당성? 수단의 적합성? 침해의 최소성? 법익의 균형성? 어느 하나 충족하는게 없다. 과잉금지의 원칙은 수사팀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내동이쳐졌다.
똑똑히 보자. 경찰은 자신들의 말처럼 “굳이 감춰”주는 서비스를 ?안한게 아니다. 성난 민심을 위해 마스크를 빼앗고, 친절하게 벗겨주는 서비스까지 해준 거다. 분노한 민심을 등에 업은 분풀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언론은 이에 호응하듯, 만방에 체포된 범인의 얼굴을 뿌려대고 있다.
김기태 때문에 이 사회가 잃은 건, 소중한 여중생 한명만은 아니다. 이 사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원칙들을 하나하나 내려놓고 있다. 과연 우리 사회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고, 김기태라는 괴물 앞에서 분노할 방법은 없는걸까?
니체는 말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속에서 스스로 괴물이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동안 들여다 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 될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