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3일 목요일
자신의 블로그에 생식기사진을 게재한 대학교수
1.
자신의 블로그에 생식기사진을 게재한 대학교수가 있었다. 방송통신위원회 심의위원으로 활동하던 박경신이었다. 그가 게재한 생식기사진은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음란정보로 “의결”한 것들이었다. 생식기사진 밑에는 “이 사진을 보면 성적으로 자극받거나 성적으로 흥분되나요?”라고 쓰여 있었다. 박 교수는 당시 "생식기 이미지 자체를 음란물이라고 보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서 부당하다"는 취지의 주장을 담은 글을 함께 게시했다.
검찰은 박 교수를 기소했다. 정보통신망을 통해 음란한 화상 또는 영상을 공공연하게 전시했다는 혐의였다.
1심은 박 교수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1심법원은 재판장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여지는지는 절대로 밝히지 않은채, “우리 사회의 평균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사건 게시물은 지배적으로 성적 수치심이나 호색적 흥미에 치우쳐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하긴 진실의 발견과 사실의 확정에 대해 가지고 있는 법원의 권한에 따르면, 1심법원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판단할 권한이 있었다. 그게 바로 자유심증주의였다.
또한 1심법원은 그 게시물이 “별다른 사상적·학술적·교육적 가치를 지니지 않”다고 했다. 그 게시물은 방송통신위원회의 의결을 비판하고자 하는 나름의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지만, 1심법원은 그것을 애써 외면했다. 하긴 진실의 발견과 사실의 확정에 대해 가지고 있는 법원의 권한에 따르면, 1심법원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판단할 권한이 있었다. 자유심증주의였다.
다행히 2심법원의 자유심증은 1심법원의 것과 달랐다. "게시물을 전체적으로 본 일반 보통인이라면 핵심내용이 사진이 아니라 그 뒤의 박경신 교수의 주관적 견해 부분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박 교수의 게시물에는 “사상적·학술적 가치있기 때문에 음란물이 아니라”고 했다. 박 교수는 2심선고 후 “사법부의 승리”를 선포했다. 사법부의 승리는 무슨... 개뿔
2.
98년도에 내려진 헌법재판소의 견해에 따르면, 음란물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째, 인간존엄 내지 인간성을 왜곡할 정도로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성표현이어야 했다. 둘째, 전체적으로 보아 하등의 문학적, 예술적, 과학적, 정치적 가치를 가지지지 않았어야 했다.
1심법원과 2심법원은 둘 곳다 이 기준을 적용했다. 문제는 각자 법원에게 주어진 “사실발견에 관한 자유심증” 권한이었다. 진실을 발견하고 사실을 확정할 권한이 있는 법원은 각자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판단을 했다. 그러기에 같은 기준을 가지고, 같은 사건을 보면서도 사실에 대한 판단은 달랐다.
이 사건처럼 같은 잣대를 가지고 같은 사건을 바라보면서도, 법원마다 판단이 달라지는 일은 너무나 빈번한 일이다. 변수는 여러 개다. 검찰의 거증능력, 변호인의 변호능력, 심지어 예상치않은 법원의 예단도 변수가 될 수 있다.
이번 재판에서는 다행히 상급법원이 해당 게시물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메시지를 인정해줘서, 박경신이 유죄를 겨우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재판부가 이 사건의 2심재판부처럼 두눈 번쩍 뜨고, 정신을 잘 차리고 있으란 법도 없다.
3.
그렇다면 박경신을 두 차례의 재판에 불러들이며 고초를 겪게 한 원흉은 무엇일까?
모호한 처벌기준일까? 아니다. 두 차례의 재판에서 사용된 기준은 똑같은 것이고 나름 명쾌했다. 똑같은 사건에 똑같은 기준이 적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법률가들의 판단이 다른 것은 사실에 대한 확신이 달랐기 때문이지, 기준이 모호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법적 잣대를 들이대지 말아야 할 도덕적 문제에 대해 법적 잣대를 들이댔기 때문에 생긴 문제일까? 그도 아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판결번복과 사실판단을 둘러싼 법원사이의 의견차이는 늘상 모든 사건에서 늘상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절도, 폭행, 상해, 살인, 강간과 같은 범죄의 판단에 있어서도 이런 일은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
그렇다. 박경신을 두 차례의 재판에 불러들이며 고초를 겪게 한 원흉은 바로,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 아니었을까? 재판과정에서 진실의 발견과 사실의 확정에 대한 전권을 지니고 있는 판사는 슬프게도 그 권한에 걸맞지 않게 인간의 불완전함을 달고 다닌다. 권한은 있는데 능력은 없는거. 이거 골때리는거다.
4.
물론 우리 사회는 재판관의 인간적인 불완전함과 그 판단의 불완전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걸 따르기로 마음 먹은 것은, 그것을 따르지 않고서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존재라는 이유로, 어떤 인간에게도 진실의 발견과 사실의 확정에 대한 권한을 주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될까? 이 세상 모든 이가 동의하지 않는한 어떤 판결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재판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보다 사회정의를 위해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재판제도와 재판관의 불완전함을 직시하고 욕하면서도, 그 제도에 복종할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재판관의 인간적인 불완전함을 잘 알고 있는 이 사회가 그 불완전함을 완화시켜줄 나름대로의 장치를 여러 가지 두고 있다는 점이다. 심급제도와 탄핵주의 같은 것들은 모두 그런 재판관의 인간적인 불완전함을 완화시키고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나름의 제도라 할 거다.
이렇게 인간의불완전함 때문에 벌어지는 일을 두고, 애초에 있었던 음란물 규제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것처럼 책임을 돌리는 것은 좀 생뚱맞다.
5.
과연 박교수는 왜 생식기 사진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놓았을까? 음란물 규제 자체에 반대하는 걸까? 그가 음란물 심의위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보자면, 그건 아니었을 거다.
박 교수라고 “모든 표현이 시민사회의 자기교정기능에 의해서 해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겠는가. “일정한 표현은 일단 표출되면 그 해악이 대립되는 사상의 자유경쟁에 의한다 하더라도 아예 처음부터 해소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거나 또는 다른 사상이나 표현을 기다려 해소되기에는 너무나 심대한 해악을 지닌 것이 있다”는 것을 박교수라고 모르겠는가? 박 교수라고 굳이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성을 왜곡하고 저해하는 표현물”을 자유롭게 하고 싶겠는가?
다른 사상이나 표현을 기다린다면, 시민사회의 자기교정기능에 의해서 충분히 해소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생식기 사진이라는 이유만으로, 성적으로 자극받거나 성적으로 흥분될 거라고 예단하고, 더 이상의 판단을 거부해버린 심의위원들에 대한 항의. 박교수가 그것 때문에 생식기사진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놨다는 것은 박 교수의 글을 통해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교수가 항의하고자 하는 현실 역시, 음란물 규제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심의관들의 불완전함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었을까? 박 교수가 항의하고자 하는 현실은 음란물 규제를 존속한채, 인간의 불완전함을 완화시켜주는 제도의 도입을 통해 타협할 수 있는 일은 혹시 아닐까? 음란물일 지라도 함부로 그 표현을 규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똘레랑도 오늘은 생각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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