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사진과 태극기 강매
당초 서청은
민간인 자격으로 제주도에 들어왔다.
처음엔 주로 엿장수를 하다가
점차 세력이 커지자
이승만의 사진과 태극기를 강매했다.
4. 3이 발발하자 서청은
경찰로 또는 군인으로 옷을 바꿔입었다.
과거에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를
사지 않았던 사람들은 총살되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말 태우기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그 위에 태워 빙빙 돌게 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뺨 때리기
또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을 때리도록 했다.
머뭇거리거나 살살 때리면
곧 무자비한 구타가 가해졌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오라리, 고은
제주도 토벌대원 셋이 한동안 심심했다
담배꽁초를 던졌다
침 뱉었다
오라리 마을
잡힌 노인 임차순 옹을 불러냈다 영감 나와
손자 임경표를 불러냈다 너 나와
할아버지 따귀 갈겨봐
손자는 불응했다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경표야 날 때려라 어서 때려라
손자가 할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세게 때려 이새끼야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세게 때렸다
영감 손자 때려봐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때렸다
영감이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다
이놈의 빨갱이 노인아
쎄게 쳐
세게 쳤다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손자
울면서
서로 따귀를 쳤다
빨갱이 할아버지가
빨갱이 손자를 치고
빨갱이 손자가
빨갱이 할아버지를 쳤다
이게 바로 빨갱이의 놀이다 봐라
그 뒤 총소리가 났다
할아버지 임차순과
손자 임경표
더 이상
서로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
총소리 뒤
제주도 가마귀들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다
총살박수치게하기
심지어는 총살에 앞서
총살자 가족들을 앞에 세워놓고
자기 부모형제가 총에 맞아 쓰러질 때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표선면 가시리 안공림 씨(58)는
여덟 살 때 총살장에서 박수를 쳤던
끔찍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너무도 끔찍해 눈을 뜰 수도 없었지만
벌벌 떨며 박수를 쳐야 했다" 고 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초토화작전
10월 5일 중앙정부는
제주도 출신으로
그간 온건책을 지향해온 경찰청장을 사퇴시키고
강성 인물을 새 경찰청장에 임명했다.
이어 경비대 총사령부는
10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병력을 증파했다.
10월 17일에는
제주도 주둔 9연대장의
포고가 발포되었다.
포고문은
해안선에서 5km 이외 지점의
통행금지를 명하면서
이를 어길 경우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주도의 지형상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지점'은
특정한 산악지역이 아니다.
해변마을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들이
이에 해당한다.
중산간에서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발포하겠다는
무시무시한 작전이 수립된 것이다.
가장 참혹한 희생은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무렵까지
약 4개월 동안에 발생했다.
이른바 '초토화작전' 이 벌어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을 덮쳐 온 가옥에 불을 지르고
80대 노인에서부터 젖먹이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토벌대는 초토화작전을 감행하기에 앞서
10월 18일 제주 해안을 봉쇄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제주도 출신 군경검 학살..
서청의 위세는 너무도 커서
제주 출신은 경찰조차 꼼짝 못했다.
중문면 상예리의 강기주는
당시 제주경찰청 고위 간부인
강기천 총경의 동생이었다.
초토화작전이 막 시작되던
1948년 11월 중순께 서청이
상예리에 들이닥쳤다.
모두 죽을 위험에 놓였을 때 강기주는
"나는 강기천 총경의 동생입니다. 무고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청은
"경찰 간부면 다냐. 이 새끼는 더 악질이다"
라며 그 자리에서 먼저 총살했다.
1948년 10월 말부터 11월 초순 사이에
9연대 장병 1백여 명이
군사재판도 거치지 않고
불법적으로 처형되었다.
희생된 군인들은 주로 제주 출신이었다.
같은 시기인 11월 1일 제주도 경찰당국은
경찰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 프락치를 색출했다고 발표했다.
무장대에 동조한 혐의를 받은 군인과 경찰들은
바닷물 속에 수장되었다는 풍문만 전해질 뿐,
대부분 시신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이로써 초토화작전의 걸림돌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주읍내에서는 제주도청 공무원을 비롯해
교육계와 언론계 등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9연대 본부로 끌려가 감금당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중학교 교장, 제주도 총무국장,
재산관리처와 신한공사 직원들이 학살되었다.
심지어 제주지검 검사를 포함해
법조계 인사들까지 끌려가 죽었다.
읍내 사정이 이 정도이고
지방 주민들의 처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언론인 학살
열세살 소년을 고문해서 죽게 만든 사건이
48년 9월15일자 중앙신문들에 보도되자,
언론마저 토벌대의 토벌대상이 되었다.
48년 10월 경향신문 제주지사장 현인하와
서울신문 제주지사장 이상희가
끌려가 처형당했다.
지역언론사인 제주신보
사장과 전무가 끌려갔고,
편집국장은 총살되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겁간 학살하기
야수로 돌변한 토벌대에 의해
여성들의 수난도 컸다.
성산면 시흥리의
박태수 할머니(당시 60대 중반)에게는
스무 살 가량의 손녀가 있었다.
주변에 소문난 미인이었다.
서북청년단원이 그녀를 탐했지만
할머니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화가 난 토벌대는
할머니를 대낮에 길가로 끌어내어 총살했다.
안덕면 감산리의 강매옥(당시 19세)은
군인들의 겁탈을 죽음으로 막았다.
강매옥의 언니 감경옥 씨(78)는
지금도 학살자의 성씨와 얼굴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친정집에는
군인 3~4명이 임시주둔했는데
그 중에서 '최상사'라는 놈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동생은 참 예뻤지요.
그놈들은 처음에 처녀들을 몇 명 집합시켰다가
동생이 제일 곱다고 생각했는지 덮쳤습니다.
그러나 맘대로 되지 않자 총을 쏜 겁니다.
동생은 배꼽 부근에 총을 맞아
창자가 다 나올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숨졌습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1948년 12월 14일 밤
표선면 토산리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주민들을 향사에 집결시킨 후
1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를 따로 세웠다.
또 "달을 쳐다보라"고 한 후
달빛에 비춰가며 젊은 여자들을 불러냈다.
불려나온 150명이
군인들에게 끌려갈 때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그 이유를 몰랐다.
이들은 18일과 19일 이틀 동안 총살당했다.
한 유족은 "만일 사상문제를 구실 삼는다면
18세부터 40세까지만 사상이 있으며,
유독 젊고 예쁜 여자들만
사상에 연루되었겠느냐"고 항변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4.3 발발 이듬해 봄으로 기억되는데,
금덕리에서 소개온 한 처녀가
하귀지서에 끌려와 매일 전기고문을 받았어요.
사라진 오라버니를 찾아내라는게 빌미였지요,
그녀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몰래 도망쳐 바닷가에 숨었지만
며칠 후 경찰에 붙잡혔지요.
경찰들은 하귀국교 동녘밭에
남녀 대한청년단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녀를 끌고 왔습니다.
그 땐 너나 할 것없이
대한청년단원이 돼야만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앞에 끌려왔을 떄
그녀는 이미 초주검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를 홀딱 벗긴 후
'여자니까 대한청년단 여자대원들이 나서서
철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린 기겁을 했지요.
누가 나서서 찌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단장인 한 여자가 나서서 먼저 찔렀어요.
경찰은 모두들 한번씩 지르라고 했습니다.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내 차례가 되기 전에
그 처녀는 이미 죽었습니다.
경찰은 시신을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죽음을 확인하고는
남자들에게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토하고 밥도 못먹고 난리가 났어요.
또 그 일로 몹시 앓았습니다.
사촌언니는 그 떄 찔렀다면서
그 후 막 아파서 죽다 살아났다는 겁니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 앓는 것이 당연하지요.
내가 죽어서야 잊혀질 일입니다.
그런데 경찰들은 그녀에게 몹쓸짓을 하려다
안되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친구는
"몸을 줬으면 살수도 있었을텐데...'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김계순, 당시 열덟살, 제주4.23사건진상규명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진상조사보고서.)
그들은 또 여맹이 뭣하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촌 처녀들을 붙잡아다가
공연히 여맹에 가입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발가벗겨놓고 눈요기를 일삼았다. ...
지서에 붙들어다놓고
남편의 행방을 대라는 닦달 끝에
옷을 벗겼다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그건 간밤에
남편이 왔다갔는지 알아본다는 핑계였는데,
남편이 왔다갔으면 분명 그짓을 했을 것이고,
아직 거기엔 분명 그 흔적이 남아있을테니
들여다보자는 것이었다.
(현기영, 순이삼촌, 창작과비평사, 1979)
사살 연습
우리 마을 북촌리에대학살이 벌어지던 그날,
아침부터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군인들이 마을 동쪽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설이 있으니
학교 운동장으로 집합하라 했습니다.
군인들은 우선
경찰가족, 군인가족을 따로 분리시키더군요
낌새가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은
사돈의 팔촌이라도 경찰이 있으면
경찰가족쪽으로 줄을 섰습니다.
군인은 우선 민보단 간부를 불러내
바로 총살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사람이 죽었씁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엎혀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김석보, 1998, 63세, 조천읍, 북촌리)
강요배, 젖먹이
강제 성행위
미친 짓거리는 점점 심해져 갔다.
연행자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남녀 모두 옷을 벗긴 후
강제로 성행위를 시키다
총살한 일도 있었다.
4. 19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국회에 양민학살 진상규명 특위가
구성되었을 때
한 증언자는 제주도를 찾은 국회의원들에게
"군인과 서북청년단들이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서
정조를 맺게 하고 총살시켰다" 고 폭로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함정토벌
토벌대는 무장대처럼 낡은 옷으로 변장해민가에 들어가 "산에서 왔다"며
식량을 요구하거나 숨겨줄 것을 애원했다.
측은하게 여겨 밥을 주는 사람은
곧바로 본색을 드러낸 토벌대에게 총살되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대살
토벌대는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도피자 가족' 이라며 수시로 학살했다.
48년 12월 13일
대정면 상모리와 하모리 주민 48명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1948년 12월 22일 표선리로 소개한
가시면 주민 76명이
속칭 '버들못'에서 집단학살되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호적을 일일히 대조했다.
그 결과 젊은이가 사라진 경우엔
"폭도로 산에 오른 게 분명하다"며 총살했다.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총살극을 구경시켰다 하여
"관광총살'이라고도 부른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자수사건
또한 여기저기서 소위 '자수강연'이 열렸다.토벌대는 주민들에게
"과거에 조금이라도
산에 협조한 사실이 있으면
자수해 편히 살라"고 했다.
이미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거나
자수하지 않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협박이 뒤따랐다.
사태 초기 무장대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을 때
주민들 중 어느 누구도
무장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옷가지를 올렸고
쌀 한 되 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나 둘 자수자가 나오자
토벌대는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렇게 하여 1948년 12월 13일
대정면 하모리에서 48명이 희생되었다.
주민들은 이를 '자수사건'이라 부른다.
조천면에서는 '자수'한 150명 가량이
1948년 12월 21일 제주읍내
속칭 '박성내'로 끌려나와 총살되었다.
토벌대는
몇몇 사람이 총에 맞은 채 꿈틀대자
시신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박성내의 학살극은
총에 맞고도 탈출에 성공한
유일한 생존자 김태준 씨(작고)에 의해
가족들에게 알려졌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이름 빼앗기지 마라"
무장대 협조자의 명단이 발각되었다며집단총살하는 것도 비일비재했다.
토벌대의 고문이 워낙 가혹해
일단 취조를 받으면 허위로라도 자백해야 했다.
남원면 신례리 양경수 씨(78)는
당시 "이름 빼앗기지 마라"는
유행어가 있었다고 말했다.
우연히 토벌대에게 끌려가는 사람의
앞에 가거나 근처에 있다가 그의 기억 속에
자신의 존재를 남기지 말라는 뜻이다.
"매에는 장사가 없어 고문을 받으면
아무 이름이나 튀어나오는 법"이라고 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참수
초토화작전 기간 중에서도1948년 12월 중순부터
약 열흘간은 집단학살이 가장 극심했다.
이 무렵 토벌대는
입산한 사람들을 총살한 후
목을 잘라오기도 했다.
그래야 전과(戰果)를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다.
한 서청 출신 증언자는
"목을 잘라오면 승진을 시켜주었다"고 말했다.
1948년 12월 25일
서귀면 주둔 토벌대는
작전을 마치고 내려올 때
길목인 서홍리에 들렀다.
서홍리 주민들은 토벌대의 손에 들린
끔찍한 모습을 목격했다.
한 할머니는 "어떤 여인에게는
자기 아들의 목을 들고 내려오도록 했다" 고
증언했다.
(김종민, 제주 4.3항쟁-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년 봄호.)
30만 제주도민 중 빨갱이로 몰려
학살된 희생자가 최소한 3만.
2001년 5월
제주 4.3사건 지원사업소가 접수한
희생자 신고에 의한 피해자
1만 3천여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학살 희생자중 여성이 21.1%
10세이하 어린이가 5.6%,
61세이상노인이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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