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0일 화요일

기자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가? 이계덕을 통해 생각한다.



19일 오전 페북 타임라인에 눈에 띄는 글이 올라왔다. 이계덕의 것이었다. 얘기인즉, 페북이 자신의 계정을 차단했는데, 페북코리아 본사에 찾아가서 고소하겠다고 으르고 나니 계정이 풀렸다는 얘기였다. 페북코리아 본사까지 찾아갔다고? 대단한 자다. 페북 한국본사가 어디있길래? 역삼동에 있단다. 역삼동이라. 불현듯 12년 그 일이 떠올랐다.
 
그렇다. 12년 전. 네이버에 의해 내 블로그가 차단되었더랬다. 이유도 밝히지 않은채 내 블로그를 통째로 차단한 네이버의 답변은 국가보안법이었다. 현대사학자인 한홍구 교수의 김일성 관련 글을 스크랩한 게 화근이었다. 내 블로그를 차단하게 한 문제의 그 글은 네이버뉴스에서도 서비스되던 것이었다. 그 때, 몇몇 언론사에서 내 블로그 차단소식을 전하는 한편, 나 역시 이계덕처럼 그 본사에 항의방문을 했던 터였다. 그 때 네이버 본사 역시 역삼동에 있었다. 그 때 일로 내 블로그는 한홍구교수의 역사책에 출연함으로써 졸지에 역사적 블로그의 반열에 올랐었지.

내가 12년 전에 겪던 일을, 12년 전의 내 나이랑 비슷한 나이의 후배가 지금 겪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묘한 동지의식이 느껴졌다. 또 페북이 그러면, 페북 본사에서 속옷 시위를 할 거란다. 국가인권위 진정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국가인권위에 진정할 수 있는 내용이 뭔지 잘 모르는 친구인 것 같았다.


선배 언론학도로서, 표현의 자유에 대해 먼저 고민해온 선학으로서 , 몇 가지 팁을 주고 싶었다. 내 블로그에서 음란물 표현의 자유에 관한 포스트 몇 개를 소개했다. 곧 답이 왔다. "좋은 자료"란다. 우라까이해도 되냐고 묻는다. 무슨 우라까이 씩이나. 출처나 밝히면 된다고 했다.

10분 쯤이나 지났을까? 바로 우라까이의 결과물이 올라왔다. 후우 정말 날림 기사다. 읽기 힘들었다. 첫째 문장이 너무 길었고, 연결도 자연스럽지 못했다. 둘째, 내 글에 대한 인용에서 본질을 제대로 잡지도 못했다. 내 포스트에서 김경신 교수의 사례를 쓰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 사례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서, 굳이 내 포스트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신문기사들이 널려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계덕 기자의 결론을 보니, 내 포스트를 제대로 읽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계덕은 자기가 고소를 하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 것처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는 자신만만했다.
    
곧이어, 이계덕은 자신의 페북에서 “생활의 기사화” 운운하며, 자신의 기사에 대해 얘기했다. 생활의 기사화 같은 소리 한다. 신문기사가 무슨 낙서장인가? 생활을 기사화하려면, 좀 제대로 쓰든지..
  
먼저 이계덕의 기사를 복사해서 대충 고쳤다. 고치면서 보니 이 친구가 정녕 4년차 기자 맞을까 싶었다. 지난 달 한 중학생의 습작기사를 첨삭지도해주었던 기억이 났다. 고쳐진 글을 이계덕에게 보냈다. 자기 글과 비교해본다면, 알겠지. 어떤 글이 더 낫고, 자신의 문장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부끄러움을 안다면, 이계덕이 발전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곧 답이 왔다. 내 글이 훨씬 더 매끄럽다는 것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난 이계덕이 기자의 자존심과 부끄러움을 아는 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다음에 있었다. 이계덕은 한마디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내 첨삭지도문을 통째로 자신의 기사를 대체해 올려놨다. 오오 하느님. 침착해져야 한다. 침착해져야 한다.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이계덕에게 물었다. 몇 가지 우려되거나, 이계덕이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점들이었다. 그런데 이계덕은 자신이 쓴 날림 기사의 오류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가 철썩같이 믿고 있는 사실은 오로지 하나였다. 속옷사진으로 처벌하거나 계정이 차단당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 이계덕은 오로지 그 점을 전가의 보도처럼 여기고 있는 듯 했다. 내 질문과 염려에 대해 이계덕은 이렇게 답했다.

“낙인찍으면 저도 할말 있고 소송하면 돼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일”

그래! 네가 할 일인 줄 몰라서 이러냐? 기사에서 헛소리나  적어놓지 말든지. 이계덕의 기사는 음란물 제한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한 것이었다. 적어도 음란물 정의에 대한 모호성이나 음란물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려고 한다면, 검열자들이 어떤 논리를 가지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았어야 한다. 이계덕은 이미 오래전 검열자들에 의해 반박된 주장을 자신의 기사에서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소송은 왜 이렇게 맹신하는지? 법원을 자신의 편이라고 철썩같이 확신하는 이계덕의 근거가 난 무척 궁금했다. 좀더 자세히 설명했다.

이계덕 기자님 말씀입니다. ‘문화나 예술 또는 정치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여부, 성적 흥미에만 호소하는지 여부. 이걸 누가 판단할 것인가? 누가 그럴 자격과 권한이 있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커뮤니티 운영자는 물론 법원까지도 뾰족한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 법원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미 준비해놨습니다. 법은 진실의 발견과 사실의 확정에 대한 전권을 법관에게 허락하였거든요. 사실이 그렇지 않더라도, 법관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보기로 법률은 이미 허락한 거에요. 특히 법관은 어떤 표현물에 대한 음란성여부를 판단할 때, 행위자의 진술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외부에 나타난 행위의 형태와 행위의 상황 등 구체적인 사정을 기초로 하여 일반인이라면 당해 행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고려하면서 표현자의 그 심리상태를 추인하도록 되어 있어요. 법원에서 낙인 찍을 경우, 이계덕 기자님은 자신도 할 말이 있고 소송을 하면 된다는 취지로 말씀하셨는데, 법원의 판결은 소송의 대상도 아닙니다. 법관은 논쟁의 상대방이 아니라, 설득의 상대방이 되어야 해요. 법관을 설득해서 이해시키지 못하면, 소송에서 지는 겁니다. 물론 기자님 말씀처럼 기자님 일은 기자님이 알아서 할 일 맞는데.. 그 전에 기자님이 뭔가 오해하고 계신 점이 있지 않나 싶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다음 이계덕의 답변은 압권이었다. “ 일단 닥치면 생각해요ㅠㅠ 미리부터 생각하는건 복잡해요” 기사가 나간 후엔 그 기사에 대해 더 고민할 필요가 이계덕에겐 없는 듯했다. 그는 기레기였다.

한편으로 내 질문과 멘트가 좀 불편했는지, 이계덕은 트윗과 페북에서 나를 의식한 쪽글들을 하루종일 쏟아냈다.

“전 공부도 더 해야하고, 기본소양도 많이 부족해요. 그래서 남들같은 기자가 될래야 될수가 없어요. 그냥 내가 잘하는것, 내가 필요로 하는것, 누군가는 관심없어도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소식을 전하는 것, 그리고 내 기사를 원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 사람들을 위해서 일을 할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것이에요”

“지금 막 닥쳐있는 상황도 컨트롤하기 어려운 판국에 나중에 있는 일까지 지금 미리 생각하라? 그건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는 사람의 이야기죠.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재판만 54개에요. 현재 하고 있는걸 나중에 미뤄가면서 굳이 미리 생각해둘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난 님처럼 '학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류의 소양은 없거든요.”

“그냥 내가 옳다고 믿는 것에 올인해왔기에 앞으로도 그럴것이니까 님의 방식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도피'라고까치 표현하는것은 뭐랄까 '지식의 우월'하다는 자랑으로 밖에 들리지 않아서 그닥 탐탁치 않네요”

“그리고 난 님처럼 어떤 철학적인 메시지로 머리를 복잡하게 하려고 올린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생각했거든요. "팬티가 이쁘다" "입어보고 싶다" "내가 입은 것에 대해 다름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쁜 팬티를 입은 남자연예인이나 여자연예인이 멋있다" "노출은 누군가에게 허용되고 누군가에게는 금지된 것이 아니라 누구나에게 허용된 표현의 자유다" 이거에요.”

심지어 나를 똑똑한척 잘난척하는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글도 보였다.
“똑똑한척 하고 싶은 사람들은 똑똑한척 하는 사람들끼리 놀아라. 내 스스로 모자란거 뻔히 아는데 똑똑한사람들이 '넌 모자라' '넌 모자라' 이럴수록 기분만 더 나빠진다. 그냥 세상사에 대해서 슬플때 함께 울어주고, 기쁠때 함께 웃어주는 정도, ”


지금 쥐뿔도 모르면서 똑똑한 척 잘난척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러지 말라고 이러는 사람을 몰아가는 방식도 기레기다웠다. 그는 비열했다.

이계덕의 말처럼 옳다고 믿는 것에 올인하는 거? 좋다. 그런데, 이계덕의 문제는 그 옳다고 믿게 될 때까지의 과정은 완전 무시한다는 거다. 그래서 이계덕 군이 옳다고 믿는 순간, 이계덕의 맘 속에서는 이미 게임이 끝난 거다. 이계덕은 그 이후부터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해 의심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좋게 말하면 자존심이고 자신감인데, 나쁘게 말하면 기사에 똥 쌀 수밖에 없는 비극이 여기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기자로서 매우 심각한 장애다.

공부가 부족한 거? 기본 소양이 부족한 거? 문장력이 중2수준인거? 그럴 수도 있다. 내가 볼 땐 다 괜찮다. 차차 나아지겠지. 그런데, 자신이 옳다고 “믿어서 기사로 쓴” 것에 대해서 전혀 의심을 품지 않는 건 다르다. 독자 앞에서 “그건 생각해보지 않았고 닥치면 생각할 거고. 미리부터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기자로서 무책임한 일이다.

이계덕이 자신의 말처럼, 다른 기자들과는 “다른” 방식을 지향한다고 해도, 적어도 사람들은 “기자”라는 직함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한다. 그 기대를 염두해두면서 이계덕도 “기자”라는 직함을 사용할 것이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기자? 겉모습에 치중하지 않는 기자? 이론에 치중하지 않는 기자? 세상에 보도하는 사실을 그대로만 바라보지 않고 한번쯤 비틀어 의문을 제기해보는 기자? 있는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기자? 약자와 소수자의 입장에서 한번 더 생각하는 기자? 내 나이또래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기자? 누군가는 관심없어도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소식을 전하는 거? 그리고 자신의 기사를 원하는 독자를 위해서 일하는 거?

다 좋다. 그런데, 그걸 하려면, 불타는 가슴과 의지만으로 불가능하다. 자신의 철학과 고민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한번쯤 비틀어 의문을 제기하나? 절실한 소식을 잘 전하려면, 많은 독자들에게 신뢰를 주는 기자여야 한다. 그리고 기사에 대한 독자의 신뢰감은 기자의 뜨거운 가슴만으로 나오지 않는다. 차가운 머리가 필요한 이유다.

다른 기자들에 비해 공부가 부족하거나 기본 소양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기자가 일반인의 기준으로 봐도 무식한 건, 좀 고민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기자라면, 적어도 독자보다 무식하진 않아야 한다. 적어도 독자들보다는 많은 책을 읽고, 독자들보다는 많이 알아야 한다. 특히 자신이 기사를 통해 말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분노해야 할때 함께 분노하고, 싸워야할 때 함께 싸워주고 싶으면 활동가나 정치인이 되어야한다. 그건, 기자가 할 일이 아니다. 똑똑하건 무식하건 정치인은 누구나 할수 있다. 그런데 기자는 아니다.

기자가 똑똑한 척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무식해서는 곤란하다. 게다가 무식하면서 자기 생각은 어떠니 저러니 이런 말까지 기사에서 하고 있다. 그게 무슨 힘이 있겠나? 똑똑한 척 하고 싶은 사람들은 똑똑한 척 하는 사람들끼리 놀라고? 내가 똑똑한 척하는게 아니다. 똑똑한 척하는 기자에게 보통 사람 수준의 교양을 요구하는 거다. 적어도 기자한테는 그래도 된다.

얼마 전에 어떤 메이저 신문사에서 상반기 공채가 있었다. 자격 조건이 이렇다. “병X신이 아니거나 자신이 병X신인지 알아야 한다.” 홍세화 선생이 10년 전엔가 “너희들은 무식한 대학생”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대학생에게도 무식은 자랑이 아닐진대, 기자에게는 무식이 자랑이 아니라는 말은 더 말할 이유가 있는가?

“무릇 비평이란 반갑게 마련이다. 가령 소설을 냈을 때 비평이 따르는 게 소설가에게 행복이듯이, 칼럼도 마찬가지다. 기자가 쓴 칼럼에 쓴소리는 달게 들어 마땅하다. 새삼 말할 나위 없지만, 사실을 바탕으로 한 비평은 우리 사회에 빈곤한 토론의 활성화를 위해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 비평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을 때는 전혀 다가오지 않는다. 정반대로 사실을 왜곡해 내놓은 비난과 마주할 때는 무시하는 게 옳다.” 손석춘의 말이다. 그런데 이계덕에게는 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게다.

손석춘의 말처럼 비평을 감사하게 여기기에, 자기 자신에 대한 자폐적 맹신주의에서 비롯한 확증편향은 이계덕에게 너무나 강고하다. 사실에 근거하든 허위에 근거하든, 이계덕에게 비평은 불편하다. 이계덕이 자신에게 애정을 가지고 페북대화를 통해 비평해주려는 페친을 스토커 내지는 잘난척 종자로 몰아붙이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에게 내 멘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답변하자니 그것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자기 자신을 견디기 힘들었지. 결국 자기 페북에서의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던 그의 선택은 나에 대한 차단이었다. 하긴 그의 페북은 그의 개인 영역이니까..

그렇게 자폐적 자기 맹신에 빠진 확증편향 환자에게 동지적 연대감을 가지고 공개적인 비평을 자제하고 인내심을 발휘했던 나의 노력은 모두 허공으로 날라가 버렸다. 무엇보다도 무단으로 내 첨삭지도문을 자신의 기사를 대신에 올려놓은 무례함에 침묵하면서까지 연대감을 발휘했던 나에게 그의 졸렬함은 참으로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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